Name 최제우 水雲 崔濟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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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사상가(19C), 水雲 崔濟愚, 조선, Korea
최제우 水雲 崔濟愚 Choe Je-u

[출생-사망]
1824년 12월 18일(음력 10월 28일) ~
1864년 4월 15일(음력 3월 10일) (39세)

[호] 수운(水雲)
[국적] 한국
[활동분야] 종교
[주요저서]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
[시대] 조선


[요약]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로 민족 고유의 경천(敬天) 사상을
바탕으로 유(儒)ㆍ불(佛)ㆍ선(仙)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최제우(崔濟愚, 1824년 12월 18일 (음력 10월 28일) ~
1864년 4월 15일(음력 3월 10일))는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이다.
아명은 복술(福述), 호는 수운(水雲)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생애]
1824년 12월 18일(음력 10월 28일) 경상북
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몰락한 양반
근암 최옥(崔鋈)과 재가(再嫁)한 어머니 한
씨(韓氏) 사이에서 서자(庶子)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
울 수 있었다.


31세(1854)까지 10년 이상 전국 각지를 유
랑하며 유불선(儒佛仙) 삼교, 서학(西學),
무속(巫俗), <정감록(鄭鑑錄)>과 같은 비기
도참사상 등 다양한 사상을 접하는 동시
에, 서세동점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이라는
이중의 위기에서 고통당하는 민중의 참담한
생활을 직접 체험했다.

32세(1855)에 우연히 <을묘천서(乙卯天書)>
라는 비서(秘書)를 얻어 일종의 신비 체험
을 한 끝에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근처에
있는 천성산 자연 동굴에 들어가 49일 기
도 생활을 했다. 생계를 꾸려가기도 힘든
지경에 처한 가족을 처가에 맡긴 채 구도
생활을 계속하던 수운은 36세(1859)가 되
던 해에 오랜 유랑 생활과 처가살이를 청산
하고 고향 용담으로 돌아와 정착하기에 이
르렀다. 고향에 정착한 지 1년 뒤인 1860
년 음력 4월 5일에 수운은 아주 특별한 체
험을 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천사문답(天
師問答)’이라고 불리는 하늘님과의 문답
끝에 1860년(철종 11년) 천주 강림의 도를
깨닫고 동학을 창시하게 된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의 난과 영·
프 연합군의 베이징 침입 사건이 있었다(→
제2차 아편 전쟁). 이 여파로 조선에 대한
열강의 세력 침투가 시작되어 민족적인 위
기의식이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서학(천주
교)의 전래는 사상과 풍속이 다른 조선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최제우는 서학
에 대항하는 유교·불교·선교 등의 교리
를 종합한 민족 고유의 신앙인 동학을 창시
하였다. 동학은 후에 천도교로 발전하였
다. 동학의 근본사상은 ‘인내천’(人乃天)
이다. 즉, 이것은 인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성실과 신의로써 새롭고 밝은 세상을 만들
자는 외침이었으며 어지러웠던 나라를 구하
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또 모든 사람은 평
등함을 주장하였는데, 갈수록 신도가 늘어
나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수운은 동학을 펴기 시작한 지 만 3
년도 되지 않은 1863년(철종 14년) 12월에
체포되었고, 이듬해 3월 10일 ‘삿된 도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죄(左道亂正之律)’
로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觀德亭) 뜰
앞에서 처형당함으로써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1907년 순종 때
그의 죄가 풀렸다. 저서로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이 있다.



[연대기]
1824년 12월 18일(음력 10월 28일) 경주군
현곡면에서 출생
1833년(10세) 모친 별세
1840년(17세) 부친 별세
1842년(19세) 울산 밀양박씨와 결혼
1844년(21세) 장삿길에 나서 이후 10년간
전국을 주유
1854년(31세)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경
주 용담집에 들어앉아 구도의 사색 시작.
음력 10월 부인의 고향인 울산 유곡동 여시
바윗골로 이사
1856년(33세) 양산 천성산 내원암으로 가
49일간의 입산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별
세로 47일 만에 중단.
1857년(34세) 다시 천성산 적멸굴로 가 49
일 입산기도. 기도를 마친 후 생업으로 용
광업을 경영.
1858년(35세) 용광업 그만 둠.
1859년(36세) 울산을 떠나 경주 용담으로
귀향.
1860년(37세) 5월 25일(음력 4월 5일) 한울
님을 만나는 종교체험.
1861년(38세) 음력 4월경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어 수행하는 방법을 정하고 교리체계를 세움.
1861년 음력 6월부터 용담으로 찾아오는 이
들에게 포덕(布德) 시작. 음력 7월에 <포덕문> 지음.
1861년 음력 8월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
이 수운이 가르치는 도를 서학으로 몰기 시작. <안심가> 지음.
1861년 음력 11월 경주 관아에서 수운의 활
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짐. 수운은 용
담을 떠나 울산, 부산을 거쳐 전라도 남원
으로 감. 음력 12월에 남원에 당도. 이후
남원의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6개월간 체류.
1862년(39세) 음력 7월 경주로 돌아가 박대
여 집에 은신. 음력 8월 측근들에게 포덕에 나서라고 권유.
1862년 11월 20일(음력 9월 29일) 경주진영
에서 수운 체포. 수운은 음력 10월 5일 석
방되어 용담으로 돌아옴. 음력 11월 9일 흥
해 매산리로 피신. 음력 12월에 최초로 접주들을 임명.
1863년(40세) 음력 3월 다시 용담으로 돌아
옴. 음력 5월 하순부터 적극적으로 교화활
동. 음력 7월에 최경상(해월)을 북도중주인
(北道中主人)으로 임명.
1863년 음력 12월 10일(양력 1864년 1월 18일)
조선 왕조의 관군에게 체포됨.
1864년(41세) 4월 15일(음력 3월 10일) 대
구에서 참형(斬刑)당함.
=====================================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字)는 성묵(性
默)이다. 아명은 복술(福述), 관명(冠名)
은 제선(濟宣), 호(號)는 수운(水雲)이
다. '제우(濟愚)'는 35세 되던 해에 어리석
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1824년 12월 18일 경주 가정리
(稼亭里,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출
생했다. 그의 집안은 7대조인 최진립(崔震
立)이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여 병조판서로
추서되었으나, 후손들은 중앙의 관직을 얻
지 못해 쇠락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최옥
(崔鋈)도 영남 지방에서 비교적 이름
이 알려진 문사(文士)였지만 과거에 낙방
해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최제우
는 최옥이 63세 때에 곡산(谷山) 한씨(韓
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재가녀(再
嫁女)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익혔고,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결혼했다. 그러
나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17세에 아버지마
저 죽자 3년상을 마친 뒤 1844년부터 1854
년까지 각지를 유랑하였다. 이 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
던 문제를 이해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
게 되었다. 1854년 고향으로 돌아와 처가
가 있는 울산 유곡(裕谷)으로 거처를 옮겼
으며, 1855년 한 승려에게 <을묘천서(乙卯
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는 신비 체험
을 하였다. 1856년 성산(千聖山, 경상남도
양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입산 기도를 시
작했으나 숙부의 죽음으로 중단하였고, 이
듬해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다시 49일
간 기도하며 도를 닦았다. 1859년 다시 경
주로 돌아와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修
道)를 하였다. 그러다 1860년 5월 7일 득도
(得道)를 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한국.net

깨달음을 얻은 뒤에 ‘용담가(龍潭歌)’,
‘안심가(安心歌)’ 등의 한글 가사를 지
어 포교 활동을 시작했으나, 1861년 지역
의 유생들에게 서학(西學)으로 몰려 경주
를 떠났다. 울산, 부산을 거쳐 남원 은적암
(隱寂庵)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 무렵 ‘포
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등을
저술하며 교리와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
리고 이듬해 다시 경주로 돌아와 포교를 하
다가 관아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으나 풀려
나와 포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교인의 수
가 늘어나자 경주ㆍ영덕ㆍ대구ㆍ청도ㆍ울
산 등지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
主)를 두어 교도(敎徒)를 관장하게 했는
데, 1863년에는 접소가 14곳, 교도의 수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동학의 교세가 빠
르게 성장해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자 1863
년 8월에 최시형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
으로 임명해 도통(道統)을 잇게 했다. 자신
은 포교 활동을 계속하다가 1864년 1월 18
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左道亂
正之律)’로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다가, 4
월 15일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경주 가정리 구미산(龜
尾山)에 묘가 있으며, 1907년에 사면(赦免)
되었다.

그는 포교를 위해 ‘용담가(龍潭歌)’,
‘안심가(安心歌)’, ‘교훈가(敎訓歌)’,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도
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도
덕가(道德歌)’, ‘흥비가(興比歌)’, ‘검
결(劍訣)’ 등의 한글 가사(歌詞)를 지었
고,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
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
然其然)’ 등 한문으로 된 글들을 남겼다.
그의 한문 저술들은 1880년 최시형에 의
해 <동경대전(東經大全)>으로 편찬되었으
며, 한글 가사들은 이듬해 <용담유사(龍潭
遺詞)>로 묶여 간행되었다.

[최제우의 사상]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1860년대에 조선
사회는 심각한 혼란과 위기에 놓여 있었
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
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외
척(外戚)의 세도정치가 지속되면서 정치 기
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
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
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농민들
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
성들이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확산되었고, 서양 열강
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
과 서학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성리학을 대신할 수 있는 새
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였는데, 19세기에는
<정감록(鄭鑑錄)>의 도참사상이나 <주역(周
易)>이나 미륵사상에 기초한 후천개벽사상
등이 민중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최
제우는 오랜 방랑으로 농민의 현실을 자세
히 알고 있었기에 사회 현실과 민중의 요구
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
다. 그는 한국 전통의 경천(敬天) 사상을
기초로 유(儒)ㆍ불(佛)ㆍ선(仙)과 도참사
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
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립
된 것으로서, 그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
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道)는 비
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
다”(논학문)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도
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지기금지(至氣今
至) 원위대강(願爲大降) 시천주(侍天主) 조
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
(萬事知)’의 21자로 나타냈다. 이는 “지
극한 기운이 오늘에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빕니다. 천주(天主)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
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라는 뜻이다.

‘지기금지(至氣今至)’라는 말에서 나타나
듯이 최제우는 기일원론(氣一元論) 사상에
기초해 있다. 우주 만물은 모두 지극한 지
기(至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의 정성
으로 그 지극한 기(氣)를 몸과 마음에 모
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곧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
에 따라 하늘과 사람이 일체화될 수 있다
는 것으로, 최제우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의 사상에서 천주(天主)는 따로 존
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천주
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인간은 신분이나
빈부(貧富), 적서(嫡庶), 남녀(男女) 등의
구분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
면 모두 군자가 될 수 있다. 그는 시천주
(侍天主)의 방법으로는 마음을 잃지 않고
기를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
를 강조하였다.

또한 최제우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선천
(先天)과 후천(後天)으로 구분했으며, 혼란
에 가득 찬 선천의 종말기를 자기의 사사로
운 마음만을 위하는 ‘각자위심(各自爲
心)’의 시대라고 하였다. 그는 5만년에 걸
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
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고
취하였다. 또한 그는 서학과 서양 세력이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며, 동학에 의해 모두
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올 것
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는 무위이화(無爲而化)에 따른 조
화를 강조하였다. 자연과 인간 세계의 조화
는 정해져 있다. 곧 음(陰)과 양(陽)이 조
화 속에서 사계절의 변화가 나타나듯이, 인
간 사회의 질서도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끊
임없이 변화해간다. 이로써 최제우는 사회
질서의 개혁에 대한 민중의 희망을 고취하였다.

이처럼 최제우는 시천주 상에 기초하여 민
중의 평등의식을 반영하고 고취하였다. 그
리고 여러 민중 사상을 흡수하여 지배층의
성리학에 대항하여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
과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
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그의 사상은 2대 교
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
(人是天)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
(事人如天)’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3대 교
주인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하
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체계화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제우 [崔濟愚] (두산백과)
====================================
[정의]
1824(순조 24)∼1864(고종 1). 동학(東學)
의 교조(敎祖).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복술(福述)·제
선(濟宣). 자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
雲)·수운재(水雲齋). 경주 출신. 아버지
는 옥(鋈)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7대조인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의
시호가 내려진 무관이었으나, 6대조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양반 출신이었다.

[생애]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일찍부터 경사(經史)
를 익혔으나 기울어져가는 가세(家勢)와 함
께 조선 말기의 체제내부적 붕괴양상 및 국
제적인 불안정이 그의 유년기에 커다란 영
향을 미쳤다. 13세의 나이로 울산 출신의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4년 뒤 아버지
를 여의었다. 3년상을 마친 뒤에는 집안살
림이 더욱 어려워져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
며 갖가지 장사와 의술(醫術)·복술(卜術)
등의 잡술(雜術)에 관심을 보였으며, 서당
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세상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것
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1856년 여름 천성산(千聖
山)에 들어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면서 시
작된 그의 구도(求道) 노력은 그 이듬해 적
멸굴(寂滅窟)에서의 49일 정성, 그리고 울
산 집에서의 계속된 공덕닦기로 이어졌고,
1859년 10월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
온 뒤 구미산 용담정(龍潭亭)에서 계속 수련하였다.

이 무렵 가세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까지
기울어져 있었고, 국내 상황은 삼정의 문
란 및 천재지변으로 크게 혼란된 분위기였
으며, 국제적으로도 애로호사건(Arrow號事
件)을 계기로 중국이 영불연합군에 패배하
여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맺는 등 민심
이 불안정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혹은 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 유
일한 희망을 걸고 이름을 제우(濟愚)라고
고치면서 구도의 결심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
험을 하게 되었다. 하느님에게 정성을 드리
고 있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
득하여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
가 공중에서 들려왔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하여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고, 곧 놀라울 정도
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
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
다. 또한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
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
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
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
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고, <논학문 論
學文>·<안심가 安心歌>·<교훈가>·
<도수사 道修詞>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
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
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
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
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
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
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
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전
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
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
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
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
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
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
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
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
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
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만 39세) 참형에 처해졌다.

[활동사항]
그가 본격적으로 종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기간은 득도한 이듬해인 1861년 6월부터
1863년 12월까지 약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
간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피신하며 지낸 시
간이어서 안정되게 저술에 몰두할 수는 없
었으나 틈틈이 자신의 사상을 한문체·가사
체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처형당하게 되자 남아 있
던 신도들은 그의 글들을 모아서 기본되는
가르침으로 삼게 되었는데, 한문체로 된 것
을 엮어놓은 것이 ≪동경대전 東經大全≫이
고, 가사체로 된 것을 모아 놓은 것이 ≪용
담유사 龍潭遺詞≫이다. ≪동경대전≫·≪
용담유사≫에는 두 가지 신앙대상에 대한
명칭이 나타나는데 천주(天主)와 하날님이
그것이다.

천주 또는 하날님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
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입장을 알아
보려면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는
데,‘시천주(侍天主)’에 대한 두 가지의
해석이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하나는 하
느님은 초월자이나 부모님같이 섬길 수 있
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른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하느님
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그의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
함과 동시에 인간 밖에 존재하는 초월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신관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그의 종교체험이 무속
적인 원천에 뿌리박고 있다는 주장과 접맥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참고문헌]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도원기서(道源記書)』(강시원, 1879:윤
석산 역주, 문덕사, 1991)
『천도교창건사』(이돈화, 천도교중앙종리
원, 1933)
『동학사』(오지영, 영창서관, 1940)
『동학의 사상과 운동』(최동희, 성균관대
학교 출판부, 1980)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이현희 편, 청아
출판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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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e Je-u,
who used the pen name Su-un,
(18 December 1824 – 15 April 1864) was
the founder of Donghak, a Korean
religious movement against foreign
invasions and critical of Joseon
Dynasty government policies of the
time. His teachings led to peasant
revolts in Korea which were
contemporary with the Taiping Rebellion
in China, and he was martyred by order
of the Daewongun, only weeks before the
death of Hong Xiuquan.

His birth-name was Choe Je-seon ("save
and proclaim"). During his childhood,
he was also called Bok-sul ("blissfully
happy"). He took the name Je-u
("saviour of the ignorant") in 1859.
His disciples called him Su-un ("water
cloud"), which was the name he used for
his writings, and also called him
Daesinsa, the great teacher.

[Life]
[Early life]
Choe Je-seon was born into an
aristocratic family on 18 December 1824
(the 28th day of the 10th month) at
Kajong-ni, a village near Gyeongju, the
ex-capital of Silla and now a city in
the south-eastern province of Gyeongsang.

His father Choe Ok was a scholar who
had failed to obtain a post in the
government, his clan not being in
favour with those then in power. He had
reached the age of sixty and had been
married and widowed twice without
gaining a son. He adopted a nephew in
order to preserve his own line before
marrying a widow named Han. Choe Je-
seon was the result of this final
union, but he was considered
illegitimate in the Neo-Confucian
system: the children of a widow who had
remarried occupied a low position in
the social hierarchy and could not, for
example, take the examinations
necessary to become a bureaucrat.
Despite this he received a good
education.

His mother died when he was five years
old, and his father when he was
sixteen. He married a woman named Park
in 1836. She came from Miryang (and
originally from Ulsan). He led an
itinerant life before finally settling
with his family in Ulsan in 1854. In
1856, he began a 49-day retreat in the
Buddhist monastery of Naewon-sa, but
had to leave on the 47th day to attend
the funeral of his uncle. The next year
he managed to complete the 49 days at
Cheok-myeol Caves, but did not find the
experience spiritually fulfilling.

In 1858 he lost his house and all
effects in bankruptcy, and he returned
with his family to the paternal
household in 1859. He spent his time in
prayer and meditation and wrote the
poem Ipchun ("Spring Equinox").
According to his own account, he was
greatly concerned by the public
disorder in Korea, the encroachments of
Christianity, and the domination of
East Asia by Western powers, which
seemed to indicate that divine favour
had passed into the hands of foreigners:
A strange rumour spread through the
land that Westerners had discovered the
truth and that there was nothing that
they could not do. Nothing could stand
before their military power. Even China
was being destroyed. Will our country
too suffer the same fate? Their Way is
called Western Learning, the religion
of Cheonju, their doctrine, the Holy
Teaching. Is it possible that they know
the Heavenly Order and have received
the Heavenly Mandate?

[Religious activities]
On 25 May 1860 (the 5th day of the 4th
month) he experienced his first
revelation, the kaepyeok, at his
father's Yongdam Pavilion on Mount
Gumi, several kilometres northwest of
Gyeongju: a direct encounter with
Sangje ("Lord of Heaven"), during which
he received the mystical talisman, the
Yeongju. He threw himself into three
years of proselytising. His most
remarkable method was the composition
of poems and songs in the vernacular
gasa style, which lends itself to
dramatisation. These he presented to
his first audiences of women, who
distributed them rapidly. The songs
prepared the ground for essays
expounding his ideas. He called his
doctrine Donghak ("eastern knowledge")
to distinguish it from the Seohak
("western knowledge") of the Catholics.
It was largely a combination of Neo-
Confucianism with Korean shamanism, but
borrowed two elements from
Christianity, the singular God
(Cheonju/Sangje) and the principle of
egalitarian aloofness from the rest of
society.

He learned that he was suspected of
Catholicism and from June 1861 to March
1862 he had to take refuge in Jeolla
province to avoid arrest, spending the
winter in a Buddhist temple in Namwon.
In December 1862 he founded the first
Donghak communities, governed by 16
leaders.

The popularity of his movement
contributed to the peasant revolts in
Gyeongsang in 1862, and he was arrested
shortly before 10 December 1863 for
sedition and heresy. He was tried,
found guilty on 5 April 1864, and
beheaded on 15 April 1864 (the 10th day
of the 3rd month) at Daegu, at the
place today marked by his statue. His
grave is in a park at Yugok-dong, a few
kilometres north of Ulsan.

[Legacy]
After his death, the movement was
continued by Choe Sihyeong (Haewol, 1827
–1898). The works of Choe Je-u were
collected in two volumes, The Bible of
the Donghak Doctrine (in Korean-
Chinese, 1880) and The Hymns of Dragon
Lake (in Korean, 1881).

In 1894, the brutally suppressed
Donghak Peasant Revolution, led by Jeon
Bongjun (1854–1895), unleashed the
First Sino-Japanese War, which placed
Korea at the mercy of Japan. Choe
Sihyeong evaded capture for four years
but was finally executed in 1898. In
the wake of this disaster the movement
was drastically reformed by Son Byong-
Hi (Uiam, 1861–1922), who removed overt
political elements, inserted religious
ones, and renamed it as Cheondogyo in
1905. Although initially it won the
approval of Japanese authorities, this
new religion was active in anti-
Japanese resistance and a major factor
in the March 1st Movement of 1919,
which failed and forced Cheondogyo
underground until 1945.

His life was the subject of Stanley
Park's 2011 film The Passion of a Man
named Choe Che-u (동학, 수운 최제우).

[Works]
His works were proscribed and burnt
after his execution, but two canonical
books, one of prose and one of poetry,
were compiled and published later by
Choe Sihyeong:
Bible of the Donghak Doctrine (동경대
전, 東經大全, Donggyeong Daejeong) in
Korean-Chinese Published at Inje on 15
July 1880
Republished in 1000 copies at Mokcheon,
east of Cheonan, in February 1883

The Hymns of Dragon Lake (용담유사, 龍潭
遺詞, Yongdam Yusa) in Korean Published
at Danyang in July 1881

(from 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민족문화대백과 wikipedia.org 등)


Domestic,Donghak Doctrine,Donggyeong Daejeong,
in Dynasty & Daewongun,Daegu,Dragon,influence(+)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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