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G 박태준 朴泰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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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朴泰俊,포스코 설립자,Tae-Joon Park,Korea
박태준 朴泰俊 Park Tae-joon
Founder of POSCO
(formerly Pohang Iron and Steel Company)
Founder of Postech

포스코(포항제철) 설립자
포항공대(Postech) 설립자

(전)기업인, (전)국회의원
(전)포스코 명예회장



[출생] 1927년 10월 24일
[사망] 2011년 12월 13일 (84세)

[성별] 남성

[별자리] 전갈자리 [띠] 토끼띠
[혈액형] O형
[취미] 골프, 독서, 서예



[학력사항]
~ 2009 고려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 1996 포항공과대학교 학사 명예졸업
~ 1992 모스크바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
~ 1991 워털루대학교 공학 명예박사
~ 1989 버밍엄대학교 공학 명예박사
~ 1988 셰필드대학교 금속공학 명예박사
~ 1988 카네기멜론대학교 공학 명예박사
1961 ~ 1963 단국대학교 정치학 학사
~ 1956 국방대학원 수료
~ 1948 육군사관학교 6기 학사
~ 1946 와세다대학교 기계공학 중퇴



[경력사항]
2012.06 철강 명예의 전당 헌액
포스코 청암재단 이사장
2003.03 포스코 비상임고문
2002 포스코 명예회장
2000.01~2000.05 제3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1998.11 민족화해협력협의회 상임고문
1998.10 2002년 월드컵 추진 국회의원연맹 회장
1998.10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고문
1998.09 고위국정운영협의회 위원
1998 자민련 경북 포항북지구당 지구당위원장
1998.05 자민련 6월 지방선거 중앙당 선거대책위원회
1997.11~2000.01 제2대 자민련 총재
1997.11~2000.05 자민련 국회의원
1996.12 포항공대 총동창회 명예회장
1992 중국철강회사 총공사 명예고문
1992.07~1992.12 제14대 국회 한일의원연맹 회장
1992.05~1992.12 제14대 국회의원
1992.02 제11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
1990.01~1990.02 민주정의당 상임고문 겸 중앙집행위원
1988 민주정의당 대표
1988.04~1992.05 제13대 국회의원
1988.09~1992.07 한일의원연맹 한국측회장
1988.09~1993.02 한일경제협회 명예회장
1987.03 산업과학기술연구소 이사장
1987.02~1989.04 전경련 부회장
1983 민정당 중앙위 부의장
1981~1983 국회 재무위원장
1981.04 제11대 국회의원
1981.02 한일경제협회 회장
1981.02~1992.10 포항종합제철 대표이사 회장
1980.11~1981.04 한일의원연맹 회장
1977.10 국제철강협회 이사
1976.11 학교법인 제철학원 이사장
1975~1990.03 한국철강협회 회장
1968.04 포항종합제철 대표이사 사장
1964.12 대한중석광업 대표이사 사장
1961.09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담당 최고위원
1961.07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 실장

[수상내역]
2008 대한축구협회 창립75주년 공로상
2007 자랑스런 육사인상
1999 욱일대수장
1997 포항시민의 상
1992 칠레 최고훈장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대십자 훈장
1992 세계적 철강상 윌리코프상
1992 한국경영자대상
1991 호주 켐페니언급 훈장
1991 노르웨이 국왕훈장
1990 프랑스국가 최고훈장 레종도뇌르훈장
1987 페루공화국 대십자훈장
1987 브라질공화국 남십자성훈장
1983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십자훈장
1981 브라질공화국 십자대훈장
1979 페루공화국 대공로훈장
1979 오지리공화국 은성공로대훈장
1974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3 금탑산업훈장
1954 화랑무공훈장
1953 화랑무공훈장
1952 충무무공훈장
1951 화랑무공훈장
1950 충무무공훈장

박태준(朴泰俊, 1927년 10월 24일 ~ 2011년 12월 13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을 설립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민주정의당 대표,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한국의 "철강왕" 혹은 한국의 "카네기"라고 불렸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호는 청암(靑岩)이다.



[생애]
[생애 초반]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
읍) 임랑리에서 태어나 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자랐다.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하였다.



[군 복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한국전쟁에 출전하여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수훈하였다. 포스코를 세계적 철강기업으로 성장시킨 그는
1961년 단국대학교에 편입,
19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를(육사6기) 비롯해 당시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의 학사학위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국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규 학위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복무했고, 또 정규 학사과정
육군사관학교가 (11기 이후) 뒤늦게 신설되어 정부차원의
학사학위과정 위탁교육이 필요해서 취해진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정규 학사 학위는 단국대학교가 유일하다.

5.16 군사 정변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박정희가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쿠데타 전날
가족을 맡겼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에 관여하였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였다.

[정치 활동]
예편 이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현재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고,
1968년 4월 포항제철의 초대 사장이 되어 10년 만에
연 55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일본의 미쓰비시 종합연구소의 "한국의 성공 기업을 본다"라는
제목의 1991년 연구보고서에서는 포스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으로 "모험사업 추진의 리더로서 지도력, 통찰역,
사명감을 충분히 발휘한 박태준 회장의 공헌"을 들고 있으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연구한
"포철의 경영 성공 사례" 1992년 보고서 역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포스코 성공의
가장 주요 요인으로 들고 있다.
또한 스탠포드대 경영대학원이 연구한 "한국의 발전과
포철의 역할"이라는 보고서에서도 역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으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여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로 당선돼 국회 재무위원장을 역임하고,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박태준은 포철 회장직을 임기 중이던 1992년 10월 물러났다.
박태준은 포철을 창업 2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 3위의
철강업체로 키운 한국철강업계의 명실상부한 대부이자
세계철강업계의 거목으로 꼽혀 왔다.
설립 당시부터 정치 외풍으로부터 포철을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해 온 박 명예회장은 김영삼 정부와 불화로 결국
정권 수립 직전에 회장직을 내놨다.

1992년 10월 5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당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박 명예회장은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포철은 긴급이사회를 소집, 박 회장의 사퇴번의를
촉구키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김영삼과의 불화로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김영삼 집권 이후 포철 협력사들로부터 39억여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한동안 외국을 떠돌았는데,
여기에는 표적수사라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경제적 실패를 공격하면서 항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정치적으로
재기하였다.

[국무총리 시절]
1997년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고
김종필과 함께 김대중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선을 지원하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궁지에 몰려 재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하였다.

[말년]
포스코의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매년 포스코 청암상을 수여하는 것에 참여하였다.
2011년 12월 13일, 호흡 곤란 증세로 치료를 받고,
회복 도중에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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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 朴泰俊 ]

[요약]
한국의 기업인, 정치가.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62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1968년 포항종합제철
(지금의 포스코)을 설립하여 한국의 철강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키워내는 등 국가 경제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정치에도 참여하여 민주정의당 대표, 국무총리 등을 역임하였다.

[출생-사망] 1927.10.24 ~ 2011.12.13
[호] 청암
[국적] 한국
[활동분야] 경제, 정치
[출생지] 경남 양산
[주요수상]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베서머금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윌리코프상, 청조근정훈장
[주요저서]
《신종이산가족》(1987)

호는 청암(靑岩)이며, 1927년 9월 29일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간 뒤
1945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기계학과에
입학하였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6기)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6·25전쟁에 참전하였고,
1961년 5·16군사정변 후 박정희 군사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1963년 단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1964년 대한중석
(지금의 대구텍) 사장을 지냈고,
1968년 포항종합제철(지금의 포스코)을 창립하여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 뒤 1991년까지 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하였다.

1980년 전두환 정부 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여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전국구)이 된 뒤 국회 재무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90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후보 진영과 대립하다가 민자당을 탈당한 뒤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포항종합제철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97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한 뒤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는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을 받고 재임 4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2008년 6월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2011년 12월 13일 급성 폐 손상으로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뒤 사회장을 치르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지금의 포스코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내
한국의 ‘철강왕’으로 불리면서
1987년 영국금속학회가 수여하는 베서머 금상에 이어
1992년 세계 철강업계에 공이 큰 인사에게
수여하는 윌리코프상을 받기도 하였다.
1975~1990년 한국철강협회 회장,
1980~1981 한일의원연맹 회장, 1981년 한일경제협의회 회장,
1988~1993 한일경제협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1971년 포스코청암재단의
토대가 된 제철장학회를 설립하였고,
1986년 포항공과대학교를 세웠다.



주요 상훈으로는 충무무공훈장(1950, 1952),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
국민훈장 무궁화장(1974), 레종도뇌르훈장(1990),
노르웨이국왕훈장(1991), 한국경영자대상(1992) 등을
수상하였으며, 사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이밖에 1988년 미국 카네기맬런대학교 공학 명예박사학위,
영국 셰필드대학교 금속공학 명예박사학위,
1992년 모스크바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학위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신종이산가족》(1987)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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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어록]

"철은 산업의 쌀이다. 이것이 곧 제철보국이다."

"나는 많은 시간을 사람 문제에 골몰한다.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만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돈은 우리조상님들의 피값이다.
공사를 성공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 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
(포항제철 설립 초기 강한 의지 피력)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10년은 걸린다.
몇 밤이고 진지하게 10년 후의 청사진을 그려보라.
인생은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청사진이 나와야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

"이 땅에서 태어난 것 그 자체가 큰 인연이다.
나에게 일관제철소를 만드는 일이 주어졌을 때,
나는 회피하 수 없는 사명감을 느꼈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사람은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수 없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 드립니다."
(1992년 10월 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내
고 박정희 대통령 무덤 앞에서)

"저는 중대장으로 동료들과 함께 6.25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장교들이 죽어 있는데 대부분 총알을 등뒤로
맞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도주하다 총들을 맞은 것입니다.
그때 깨달은 바가 컸습니다.
무슨 일이든 정면으로 맞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후로 어긴 적이 없습니다."

"독재의 사슬도 기억케 하고, 빈곤의 사슬도 기억케 하라."

"일하는 자에게는 일하지 않는 자가
가장 가혹한 비판자 노릇을 하는 것이 인간사."
(호암 이병철이 박태준에게 자주 하던 말)

"10 년후의 자기의 모습을 그려야 합니다.
아직 10년후의 자기 모습이 모호한 사람은 몇밤이고
진지하게 10년후의 청사진을 구워 내야만 합니다.
인생은 건물과 같아서 청사진이 확정되어야 비로소 주춧돌
을 놓을 수 있습니다.
일단 10년 후의 자기 모습이 뚜렷이 나타난다면
두려움이나 수치심은 사라지고
용기와 자부심이 샘솟을 것입니다."

"짧은 인생, 영원 조국에 !"

한국.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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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Tae-joon

[Born] October 24, 1927
Busan, South Korea
[Died] December 13, 2011 (aged 84)

[Alma mater] Waseda University
[Occupation]
Army general, politician and Honorary
chairman of POSCO

Park Tae-joon (October 24, 1927 –
December 13, 2011) was a South Korean
soldier, politician, businessman and author.

As a business man, he was called
the "Korean Andrew Carnegie". He
founded POSCO, which has been the
world’s leading iron company for 25
years. As a politician, he served as
prime minister. He was born in Busan.
His pen name was Chungam.

[Biography]
[Early years]
He was born on the 24 October 1927 in
Busan. When he was six years old, he
moved to Japan where his father was
working, and returned to Korea
following the Korean imancipation from
Japan.

[Education]
Whilst in Japan he entered the
University of Waseda but returned to
Korea without graduating. Following his
return he studied at the Korea Military
Academy and became a 6th Graduate, then
at Dankook University with a major in
politics, followed by a time of study
at National Defense University Graduate School.

He studied at Dankook University in
1961 and graduated from the Faculty of
Political Science and Law with a major
in political science, in August 1963.
He and other Korean military officers
completed a bachelor´s degree in a
four-year standard university as
required by the government. They had
served in the army without completing a
standard degree course after the
liberation and it was the government’s
measure to build the Korea Military
Academy (then called the South Korea
Guard Academy) for officers to have a
standard degree course (after 11th
graduation). The government had noticed
that they needed a commissioned
education for officers to have bachelor
´s degree course in government level.
The degree awarded from Dankook
University is the only one which is
acknowledged by Korea.

[Military service]
In 1948, Park graduated from the Korea
Military Academy and was then
commissioned as shavetail. He was
awarded the Chungmu Order of Military
Merit and the Hwarang order of military
merit after participating in the Korean
War. He did not take part in May 16
coup, but entrusted his family in case
of failing Park Chung-hee.

After the coup, he became a member of
commerce[trade] and industry in Nation
re-building supreme council and had a
part in the first five-year Korea
economic development plan.

In 1963, Park was discharged as a Major General.

He was awarded the Chungmu Order of
Military Merit(1950, 1952), the Hwarang
order of military merit(1951, 1953,
1954), the Order of Civil Merit, the
Rose of Sharon Medal(1974), the order
of the Legion of Honor(1990), the
Norway order of military merit(1991).
After his death, he was conferred
posthumous honors of the Ching[Manchu]
dynasty presented merit. He was granted
an honorary engineering doctorate
degree from Carnegie Mellon University,
The University of Sheffield, Birmingham
University, and The University of
Waterloo. He was also granted an
honorary doctorate in economics from
M.V. in Russia.

[Commercial life]
After he transferred to the first
reserve, he became the president of
TaeguTec in 1964. One year later, the
Taegutec turned around from deficit. He
became the president of Posco in April
1968. 10 years later, POSCO was a
global company, and by 2010 was the
world's third largest steelmaker.

[Political activities]
In 1980, Park entered the political
world because of the possibility of
being appointed as the first member of
the Nation Preservation Legislation
Council. He was elected to be the 11th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under
the Democratic Justice Party and he
served as a director of the finance
committee in the National Assembly.
After three similar parties were
merged, he became chairman of the
Democratic Liberal Party.

Park resigned as president of POSCO in
October 1992. In the beginning of
Posco's establishment, Park used it to
protect himself from political draft.
He laid down the president position
right after the establishment of a new
government of discord with Kim Young-
Sam and his government. He submitted a
letter of resignation in October of
5th, 1992. Park's honorary president
rejected the position of election task
force from Kim Young-Sam’s Democratic
Liberal Party. On the same day, POSCO
had an emergency board meeting to
reverse his decision of resignation
from POSCO.

Discord with Kim Young-Sam caused Park
to resign from his position in the
National Assembly. Park wandered from
place to place abroad because he was
suspected of taking about 3.9 billion
from POSCO sub-venders. There was a
widespread doubt that there was to be
any targeted investigation of him. In
1997, he successfully came back and was
elected as a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in Buk-gu Pohang by blaming
President Kim for the economic failure.
He became the chairman of the Liberal
Democratic Party, then supported Kim
Dae Joong for the 15th presidency with
Kim Jong Pil. He took office as the
chairman in the government of Kim Dae
Joong in 2000, but he resigned his spot
because of property fraud suspicions.
In his later years he participated
in awarding the Chungam prize every year.

[Awards and achievements]
[Awards]
According to authorities of POSCO,
“The National Commission give an award
to Park Taejoon for contributing to
national development.”

The National commission also remade 6
out of his 7 medals (2 Chungmugong
medals, 3 Hwarangmugong medals,
Mugunghwa medal, Gumtap-industry medal)
as a memorial to him. The National
Commission placed 6 remade medals
except for Gumtap-industry medal at the
mortuary during his funeral.

[Achievements]
[Successful management of POSCO]
According to Japan's Mitsubishi
Research Institute, POSCO was able to
succeed as a leader in promoting
venture leadership and insight.
Chairman Park Taejoon has demonstrated
sufficient commitment to the creation
of Harvard Business School and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major
factor in the success of POSCO
is "outstanding leadership of President
Park Taejoon". In addition, in a
Stanford Business School study released
a report that called the "outstanding
leadership of President TJ Park"
critical to the development of South
Korea. He created apartment
complexes for the employees of POSCO,
while paying more attention to the
composition of the highest level of
housing complexes, including preschool
for children was established.

[Contributions to education]
He established Poha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in 1986. In 1971
he established the POSCO Scholarship
Foundation. Its goal was to expand the
existing "Taejoon Park Foundation",
launched in September 2005. It worked
to promote cooperation in Asia, next-
generation human resource development,
and participation and sharing of
practice Republic of Korea under the
three strategies Asia uses to promote
business. On June 16, 2008, the Board
of Directors at POSCO Center selected
Park Taejoon as president of the
foundation. POSTECH (Poha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has been
awarded scholarships each year in
recognition of its founder's
contributions to the development of
Park Taejoon Prize.

[American Metal Market Steel Hall of Fame]
In 2011 Tae-joon was inducted into the
inaugural class of the

American Metal Market Steel Hall of
Fame
for his substantial role in
turning South Korea into one of the
most industrialized nations on earth.

(from etoday.co.kr, 머니투데이, daum.net, naver.com,
wikipedia.org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등)


Chairman,Contribution,Carnegie,Chungam,influence(+)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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