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진시황 秦始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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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帝,중국 통일,Qin Shi Huang, China
진나라의 초대 황제, 중국 최초 황제
Qin Shi Huang

인류 역사인물 100명중 17위 선정


인류 역사인물 50명에 선정



[본명]영정(嬴政)
또는 ( 조정(趙政),여정(呂政) )

[재위]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10년
(King of Qin: 7 May 247 – 220 BC)

(Emperor of China:
Reign: 220 BC – 10 September 210 BC)

[출생일] 기원전 259년 1월

[사망일]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
(양력 9월 10일) (50세)

진 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는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중국 최초의 황제이다.
한국.net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혹 조정(趙政)
이다. 혹, 씨는 조(趙)다. 성명은 영정이
고, 혹 씨명은 조정이며, 여불위의 아들이
라는 설대로 여정(呂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 대단하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
의 승상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
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
지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
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
으며,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사
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
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
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
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
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
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
고 있다.


=====================================

기원전 259년 출생,
기원전 210년 사망.

조나라 대상 여불위와
여불위의 애첩이었다가
태후가된 어머니와의
사이에 태어난 진시황.

태후의 또다른 연인,
가짜 환관인 노애와
두 아들을 둬.


기원전 238년,
노애가 국왕 옥쇄를 훔쳐,
불법으로 군대 동원,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패,
능지처참,
환관인 노애의 두 아들도 사형.

아버지 여불위도 유배,
몇달 후 자살해,

중앙집권주의를 완성해,
춘추전국시대의 7국중
3개국 차지해.

다음 정벌 대상은 연나라,
환관 노애의 쿠데타 시도이후,
궁정안에서는 오직 왕만이 무장,
오직 왕만이 군대 동원가능토록 해.


자객으로,
죽음 직전까지의 상황에도 가.
망상증세 시작해...
죽인 수많은 영혼들을,
저승에서 만날일이 큰 걱정...

내세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군대뿐...

왕위 등극 순간부터,
자신의 죽음에대한 준비를 시작해...
사상유래가 없는,
실제크기의 병마도용...

죽은 후의 영혼 군대를 만들어,
황궁의 호위부대,
죽음과 배신에 집착...

사지가 찢겨져 나간 병사들도 위해,
죽은 병사들의 영혼도 위로키 위해,
완전한 신체에 돌로 만든
갑옷도 입혀...


기원전 223년,
중국통일 목전에...
50만 초나라군대가 진나라 군대를
제압해...

진나라도 50만 병력 동원,
초나라를 포위하고 장기전 돌입해...
십자궁 돌격소총은 기원전 3세기에는
치명적 무기.

뿔과 힘줄의 복합 궁은,
에너지와 사거리가 매우 큰,
무시무시한 독창적 무기,
결국 초 제압.

마지막남은 제나라는 싸우지 않고
항복해...
그때가 기원전 221년,
천하 통일된 중국이 되네...
그가 진시황, 나이는 39세.


최초의 황제로서,
구슬관을 쓰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진시황제,
이는 최초의 존엄한 신,
창시자, 창조가,
혈통의 시발점.

통치제도를 확립해,
봉건제도를 일시에 쇄신해...
법가사상을 반영해...

기원전 220년,
병력들은 이제 손을 놓고,
북쪽 흉노족으로 부터의
안전을 위해, 보호막인
만리장성을 축조 및 보강해...

난공불락의 만리장성은 높이 9m
길이는 4800km
많을 때는 노역자 백만명이상
동원해...
그중 약 4분의 1은 건설과정에서
죽어.

또다른 위대한 과업으로
무덤을 만들어...


요약하면,
중국 최초의 중앙 집권적
통일제국인 진나라를 건설한
전제군주.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와 이사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 강병책을 추진하여 천하 통일
의 위업을 달성.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의
정비,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등을 강행.



======================================
[초기 생애]

영정은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
의 아들이다.
그러나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
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사기》 여불위열전에서는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진시황제를 숨겨주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그러나 여불위열전의 기록이
사실인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어쨌건, 영정은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
직이 주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
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한 지 1년 뒤
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영정은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몸이 매우 허약하였다.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국왕의 자리에 즉위하였다.

[여불위와의 분쟁]
새로 진나라 왕이 된 시황제 영정은 친정
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
때에 승상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
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시황제의 모친 조태
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이에 여불위
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38년에 시황제 영정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시황제은 곧바로 군사를 파견
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또한 노애와 조씨 사이
에서 태어난 아들 2명을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황제은 여불위를 승상의 자리에
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에 여불위는 결국 자결하였으
며 시황제은 비로소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전국 통일 과정]
전국 통일 과정은 이미 시황제가
즉위 하기 이전인 장양왕때 부터 시작되었
다. 아버지 장양왕이 기원전 250년 주나라
정벌, 즉 진주전쟁에서 승리하여 정복 병합
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230년부터 시황
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
한 통일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진나라는 가장 세가 약했던
소한부터 멸망시켰다.

기원전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멸망시켰다.
그 때, 연나라의 태자 희단이 자객 형가를
시켜 잔치 자리에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기원전 225년에는 위나
라, 기원전 223년에는 진나라 다음으로
세가 가장 세었던 초나라, 기원전 222년에
는 연나라,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시황제
의 나이 39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하였다.

[최초의 황제]
시황제는 국왕(國王)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사와 왕관 등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칭호를 정하게 된다. 처음에 정은
도교에서 나오는 신비한 칭호인 태황(太皇)
과 천황(天皇)과 지황(地皇) 중에서 어느
칭호를 정해야 할 지 고민이었다. 이사와
왕관 등은 태황과 천황과 지황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태황의 칭호를 바쳤다.
결국 고심 끝에 시황제은 삼황오제에
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기로 하였고, 자신은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
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통
일 후, 진시황은 뒤의 신하나 자식들이 아
버지나 선군의 시호를 짓는 것이 품위에 맞
지 않는다 생각하고 자신의 후대 황제들을
이세, 삼세황제등으로 부르게 지시하였다.)

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
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행정 장관), 위(사령 장
관), 감(감찰관)을 두었다. 또한,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켜 천하
제일의 산업도시가 되어 발전하면서 그들
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
를 높이기 위해 함양궁을 제2궁전,제3궁전
이 회랑으로 이어져 웅대한 궁전으로 바꾸
고, 전국의 농민을 사역에 동원하여 인해전
술로 폭 50m의 황제 전용 도로를 만들었
다. 시황제는 자기를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천재라고 생각하여,
고관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
다. 그래서 법은 시황제가 모두 정하고, 결
재도 혼자서 했다. 그래서 상소는 함양궁
에 산더미처럼 쌓여졌다. 상소는 저울로
달아졌고, 결재량은 하루에 1석(30kg)으로
정해졌다.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
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
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신설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기원전 213년, 함양궁에서 큰 연회를 베풀
었다. 그때 시황제의 나이는 46세로 절정기
였다. 연회도중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야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
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
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안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뗐으나 시황제
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
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
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
(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
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분서갱유는 원
래 단지 책을 압수하거나 학자들을 단속하
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제국 성립후 유
학자들이 한제국의 성립의 명분성을 위해
서 확대했다는 설이 있다.) 이에 분개한 황
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
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
이 있는 국경 근교로 유배되었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
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
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나아가서는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
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법을 매우 엄히 하
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
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삼족
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
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
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
했다 전해진다.

[불로 불사의 꿈]
어느 날 시황제의 행차는 낭아산에 도착했
다. 시황제는 그 풍경이 맘에 들어 3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갑자기 그곳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는데 한 섬이 갑자기 나타나자마
자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오늘날의 신기
루라고 추정하고 있다.) 어느 날 제(산둥
성)에 살고 있는 서복이라는 방사가 시황제
가 보았던 섬은 전설상의 봉래산 이었다고
주장하고는 봉래산에서 불로불사약을 구해
오겠다고 했다. 서복이 갈 배에는 수많은
보물과 소년소녀 3000명이 실어졌다.
그리고 서복은 떠났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탄 배가 지금의 일본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했다는 설이 있다.
시황제가 불로불사약을 너무나도 간절히
원하고 있어서 각지에서 수상쩍은 방사들까
지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디 어디 가면 구
할 수 있다던가, 아니면 자기가 불로불사
의 기도를 올린다면서 돈을 뜯어가자 시황
제는 효험이 없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
률까지 만들었다. 시황제는 불로불사 약인
줄 알고 먹고 자신의 생명까지 위축한 것
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수은이다. 결국 시
황제는 불로불사를 꿈꾸다가 마침내는 자신
의 생명까지 줄어든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전국 순행]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씩이
나 전국 곳곳을 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때에 많은 협객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
였다. 그리하여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시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얼마
나 두려워 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시황제는 길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번은 시황제가 금릉(金陵, 현재의 남경)
에 왔을 때, 왕기가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시황제는 근처에 소나무를
빽빽이 세워 왕기의 기운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금릉은 삼국 시대까지 말릉(枺陵)으
로 불리었다. (이후 건업으로 개칭되고 이
후 건강으로 재개칭) 이렇게 시황제는 거
의 온 중국 대륙을 돌아다녀 자신이 성공
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
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자신을 뒤따랐다.
사기에 따르면 시황제는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
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
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또는 화가 난
시황제가 그 지역의 주민을 몰살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졌으며 유언장을 조고에
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
에 묻혔다. 이 능묘는 1974년 우물공사를
하면서 부장품인 병용(군사모양의 인형)과
더불어 발견되어 지금도 발굴 중이다.
한국.net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
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몽염
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
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
하지 않자 조고는 몽염을 일단 감옥에 가두
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는 황제
에 오르니 그가 진 이세황제이다. 원래 이
세황제는 몽염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조고
의 말을 듣고는 몽염과 몽의를 반역혐의로
몰아 삼족을 멸족시켰다.
====================================
Qin Shi Huang (260–210 BC), personal
name Ying Zheng, was the King of the
state of Qin (r. 246–221 BC) who
conquered all other Warring States and
united China in 221 BC. Rather than
maintain the title of king borne by the
Shang and Zhou rulers, he ruled as the
First Emperor of the Qin dynasty from
220 to 210 BC. The title emperor
(huangdi) would continue to be borne by
Chinese rulers for the next two millennia.


During his reign, his generals greatly
expanded the size of the Chinese state:
campaigns south of Chu permanently
added the Yue lands of Hunan and
Guangdong to the Chinese cultural
orbit; campaigns in Central Asia
conquered the Ordos Loop from the nomad
Xiongnu, although eventually causing
their confederation under Modu Chanyu.
Qin Shi Huang also worked with his
minister Li Si to enact major economic
and politic reforms aimed at the
standardization of the diverse
practices of the earlier Chinese
states. This process also led to the
banning and burning of many books and
the execution of recalcitrant scholars.
His public works projects included the
unification of diverse state walls into
a single Great Wall of China and a
massive new national road system, as
well as the city-sized mausoleum
guarded by the life-sized Terracotta
Army. He ruled until his death in 210 
BC after a futile search for an elixir
of immortality.

(from naver.com history channel
wikipedia.org 등)


Banning, Burning of many Books,Barrier, Border, influence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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