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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John Wesley,신학자,감리교 창시자,England
존 웨슬리 [John Wesley]
종교개혁자, 신학자, 감리교회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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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03년 6월 28일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주 엡워스

[사망] 1791년 3월 2일 (87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런던



[직업] 신학자, 저술가 영국 성공회 사제

[언어] 영어, 독일어

[국적] 영국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활동기간] 1725년 ~ 1791년

[장르] 기독교신학교육 저술

[부모]
새뮤얼 웨슬리(아버지)
수재너 웨슬리(어머니)

[친지] 찰스 웨슬리(남동생)

[자녀] 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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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영국의 종교개혁자 ·신학자. 메서디스트(감리교)교회의 창시자.
사람들에게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하고,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대규모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메서디스트(감리교)교회의 창시자.
영국 링컨션 주 엡워드(Epworth)의 목사관에서
성공회 주교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경건한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의 19남매 중
열다섯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아버지로부터
엄격하고 철저한 신앙 훈련을, 어머니로부터는 헬라어, 라틴어,
프랑스어를 배웠다. 옥스퍼드 대학 처치칼리지를 졸업하고
1726년 링컨칼리지 연구원을 지내면서
아버지 교회에서 부제로 일하였다.



1729년에 대학으로 돌아가, 동생 찰스 웨슬리가 중심이 된
학생신앙단체인 ‘신성(神聖)클럽’의 메서디스트 운동과
관계를 맺는 한편, W.로 등의 신비주의 저서에 심취하였다.
1735년 동생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州)의 선교사로 건너갔는데,
그 동안에 모라비아 교도들의 신앙에서 크게 감동을 받고
전도에 힘썼으나 실효를 못 거두고, 1737년 귀국하였다.

그후 독일 경건파인 모라비아 교도의 집회에서 마침내
뜨거운 회심(回心)을 경험한 후, 모라비안의 본거지인 독일의
‘헤른포트 형제단’을 방문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벌였다. 사람들에게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하며, ‘그리스도교인의 완전’을 설교하는 한편,
당시 전 영국 사회에서 번지던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대규모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그가 죽은 뒤
메서디스트 교회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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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John Wesley, 1703년 6월 28일 ~ 1791년 3월 2일)는
감리교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단을
형성한 인물이다.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에서 안수를
받았으며 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이다. 또한 웨슬리의 사역과
저술은 감리교의 활동만이 아니라 19세기 성결 운동과
20세기 오순절 운동 및 기독교 사회복지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요약]
[신학공부와 목회활동]
차터하우스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교수(fellow)가 되었으며,
1725년에는 부제/집사목사가, 1728년에는 사제/장로목사가 되었다.
영국국교회 사제/장로목사였던 아버지 새뮤얼 웨슬리의
교구에서 사제로 사역한 후 1729년 옥스퍼드로 돌아와
신성회(Holy Club)를 지도하였다. 신성회는 신학 공부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을 연마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며,
동생 찰스 웨슬리가 처음 시작하여 조지 휫필드도 가입하였고,
존 웨슬리도 가입한 후 모임을 지도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아메리카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건너가는 동안 만났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류하였다. 이후 독일을 방문해 모라비안 교회와
독일 경건주의 교회들을 돌아보기도 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복음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웨슬리는 이날의 일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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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여행과 사회개혁]
웨슬리의 사역은 조지 휫필드처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사역이었다. 하지만 휫필드가 예정론의 칼빈주의적
감리교를 지향했던 것과 달리 웨슬리는 자유의지론을
바탕으로 하여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브리튼 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다니면서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모임인 속회를 조직하여 소모임 안에서
신자들이 훈련 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끔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 자신처럼 나라 곳곳을 다니며 선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감리교도들은 교도소 개혁과 노예해방 등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끌고 개혁하였다.



[신학사상]
웨슬리는 비록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지만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주장하였고,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에 맞섰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게 자리한다면,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공교회주의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표현되는 수단인 성례전과 예전을 존중하는 영국국교회
고교회주의와 개인의 종교경험을 존중하는 복음주의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
(means of grace)을 통해 신자들이 변화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감리교와 영국국교회]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영국국교회 성직을 유지하였고,
영국에서 감리교 운동은 단지 침체된 영국성공회를 개혁하는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 하였으나, 미국 감리교회에서 목사를
안수할 감독을 웨슬리가 파송하며 미국에서는 분리적
태도를 취했다. 웨슬리 사후 영국 감리교는 미국 감리교회처럼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감리교로부터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구세군 , 성결교,
오순절 운동 등이 생겨났다. 즉 당시 영국 사회와 교회사에
끼친 웨슬리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는 "영국에서 제일 사랑 받는 사람"이라고
흔히 묘사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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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의 입장을 지닌 감리교회로
발전하였고, 국가교회인 영국국교회로만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는 복음주의적 생명력을 심으며, 잉글랜드 성공회가
현재의 성공회로 발전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영국신학의 전통으로 존중되고 있다.
전자는 저교회파(Low Church), 후자는 고교회파(High Church)로
불리기도 하였다.

[존 웨슬리의 신학]
존 웨슬리의 신학은 당시 교리 중심의 사상적 신학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실천중심"의 신학을 전개하였다.
교리를 선택하는 문제로서 신앙이 아니라 "성화" 즉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에 견주어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은총과 사랑은 웨슬리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며, 신학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삶의 기준이 되며 최종적 칭의를 향한 능력으로 보았다.
이는 개신교의 교리를 형성했던 칼빈주의나 루터주의,
경건주의 등과 구별되는 신학적 방법론이었다.

웨슬리의 신학적 접근은 교부신학자와 같이 성서에 기초하여
성서의 진리를 실현하며 전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주목하는 실천적 신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성서의 진리를 실현하는 신학은 세상을 낙관론이나
비관론적 입장이 아니라 양쪽의 긴장을 지닌 중도적 대안
또는 제3의 과정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제3의 방법의 현실적 표상은 율법과 복음, 은총과 행위,
사랑 받음의 은총과 힘 입음의 은총, 칭의와 성화,
순간과 과정, 은총의 보편성과 은총의 제한적 실현,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응답, 최초 칭의와 최종 칭의와
같은 긴장 속의 주제에 대한 대안과 방법을 제시하며 나타났다.
이 신학의 주제들은 은총의 개념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은총의 개념은 초기 교부들과 고전 공의회의 신학을 뛰어넘어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을 시작으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발전의 과정을 수반한다고 보았다. 기독교인의 '삶'이란
구원을 주는 은총의 실천 속에서 일관되게 매일 성장을 가져오며,
'의'도 내주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점차 자란다고 보았다.
이를 위한 실천적 은총의 수단은 일반 수단과 특별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하나님의 여정 속에 있는 일반적 은총의 수단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깨달아가는
보편적 순종이고, 특별한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과 상황적 은총의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제도적 은총의 수단은 대부분의 신자가 생각하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경건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능력을 경험하는 체험도
존중하였다. 공중예배와 성경읽기, 성찬 참여, 가족기도,
개인기도, 성경공부, 속회와 금식과 절식이 제도적 은총의
수단이며 이들을 습관적으로 실천하고 그 안에서 영혼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중 특히 성례전인 성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분을 따라
내적인 은총에 대한 외적인 징표이고 이로서 우리가 내적인
은총을 받는 수단이라고 강조하였다.
그가 보았던 성찬은 기존의 성례전시각인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츠빙글리주의와 차이를 둔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엄숙한 기념으로 이 기념인 온전한 기억과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몸의 현전이 아니라 실재적인 영적 현존이 있다고
구분하였고, 성례전을 통해 칭의와 성화의 현재적 구원 은총인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금 나탄다고 설명하였다.

성례전으로 세례에 대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믿고 행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稱義)론을 기독교인이 성령에 의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로 보았다.
세례는 기독교인이 되는 첫단계이나 완전한 단계는 아니며,
죄를 짓는 과정 속에서 세례로 받은 주님의 자녀로
온전히 새롭고 깨끗하게 될 수 없기에 체험적인 온전한 마음의
변화와 경건한 성화의 삶이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세례와 거듭남을 구분하였으므로 성인의 세례와
유아 세례를 묶어서 생각하였다.



상황적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을 초월하는
성령의 인도로 은총 안에서 자라 가도록 하는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수단을 구분하였다. 선행 은총을 통해 생긴 도덕법은
신앙인의 양심과 상황에 맞춰 생각하도록 하였으나
상황적인 대응이 아니라 하나님, 그리스도론과 밀접한
도덕법으로서 윤리적 기준을 의미한다.

[사회참여]
존 웨슬리는 신약성서의 희년사상(누가복음서 4:18-19)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고민하였던 실천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회개혁사상을 주장하였다.
1.고용안정:실업은 빈곤의 원인이므로 고용이 안정되어야 한다.
2.자본주의의 부당성 : 자본주의는 실업증가, 가난,
사회적 불평등, 독점화를 가져온다고 지적하고,재산을 공유한
고대교회의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함.
3.세금제도 개혁:부자감세 반대,민중감세 주장
(민중들의 세금부담 감소)
4.상속반대: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상속.
5.노동으로써 정직하게 번 돈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
6.돈의 위험성 지적:돈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만약 교회가 부자가 되면 성령께서 떠나신 교회가 될 것이다.
웨슬리는 그를 따르는 설교자들에게 부자들을 비평하는 설교를
하여야 한다고 했다.
7.연대실천:억눌린 자를 변호하고 고아를 위로하며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어 마음속에서 기쁨의 노래가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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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監理敎會, Methodist Church)는
성서를 중심으로 한 이성, 전통, 체험을 기독교의 근간으로
이해하는 복음주의적이며 경건한 신학적 입장을 가진 개신교 교파이다.

신학적으로는 종교개혁가와 웨슬리의 전통을 수용하고 있으며,
교회 구조는 공교회(보편교회)의 구조인 감독제 교회이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방회의 감리사, 대규모 구역인 연회에
감독이 있는 교회구조를 가졌다.
감독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연회의 성직자 안수와
주요 의사결정을 내린다.

18세기 영국국교회 성직자였고 신학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복음주의 운동과 사회복음 운동, 부흥 운동으로 등장한
개신교 교파다. 성직자이자 신학자였던 존 웨슬리는
영국이 신앙적인 침체기에 빠져 있을 당시,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 조지 휘트필드등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클럽을 조직했다.

그들은 클럽활동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고 병자와 빈민,
감옥에까지 방문하여 전도에 힘썼다.
격식을 중시하고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특징이었으며
이는 감리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8천5백만명이 넘는 신도들이 있는
개신교 교회로 폭넓은 신학적 토양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영국과 미국, 남미에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감리교 신학적 배경]
감리교회의 신학은 성경, 전통, 이성, 체험을
신학적 토대로 가진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응답이 반드시 따라야한다는 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자유의지다. 이를 다섯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공교회적 구원론]
첫째, 감리교는 공교회적 구원론을 재발견하였다.
초대교회와 공교회의 만인구원론을 바탕으로 누구나 구원을
받을 성도가 될 수 있으며, 구원에 참여하는 결단을 내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받을 대상이 이미 정해졌다는 예정론을 거부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하나님"은 구원을 하시는 분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삼위일체 하나님 체험]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체험신앙이다.
종교적인 체험은 추상적인 절대적인 교리로서 하나님이 아니라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삶의 변화, 회개, 거룩한 용서를
느끼고 십자가를 지신 역사 속, 신약성경에 기록된 부활의
그리스도를 따르고 확인하는 신앙을 강조한다.

[평신도의 참여]
셋째, 평신도를 교회의 온전한 지체로 이해한다.
평신도를 위해 교회 교리를 찬송으로 고백하고
이해하도록 하고, 교회활동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성례전을 제외한 교회 활동을 평신도에게 개방한다.
일찍이 감리교 운동이 시작될 무렵부터 영감에 넘치는
수많은 찬송가를 작사하고 작곡하거나 기존 노래로 불러서
감리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바 있다. 평신도가 교회 내에서
속회를 통해 작은 모임으로 활동하며 선교와 전도,
성경공부 활동을 강화하고, 속회 지도자를 평신도에서
선출하였다. 야외전도와 순회전도에 성직자의 설교와
성찬식과 함께 평신도들를 동참시켜 회개와 체험 나누고
평신도의 역량으로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한다.

[기독자의 완전]
넷째, 기독자의 완전을 추구하여, 교육을 중요하며,
동시에 사회적 관심을 고양시킨다. 웨슬리의 신학은
“완전을 향한 실천”이지 완전한 교리가 아니었고,
“완전한 사랑”이지 완전한 도덕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실천하는 과정을 중요시하며
그 과정에서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완전한 사랑을 강조한다.
완전한 실천을 위해 어른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도
성경의 복음으로 훈육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따라
살게 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이 되도록 노력한다.

완전한 실천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18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의 극심한
대립적 사회 구조 상태에서 빈민자, 고아, 노인, 노동자,
노예의 신앙적 차원만이 아니라, 사회적 생활환경을
향상시키고자 하였다. 사회적 복지와 사회제도 개선을
주장하였고, 하나님의 창조의지를 벗어난 노예 제도,
아동 노동, 과다한 노동시간, 고리대금업을 폐지하는
사회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당시 영국의 사회,
정치, 경제적인 대립적 갈등을 줄이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공교회주의적 일치]
다섯째, 공교회주의(보편교회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교회연합을 강조한다. 교회가 동서로 분리되는 11세기 이전인
공교회 시기의 신학과 교회제도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바탕으로
공교회를 따르는 현재 세계 교회들의 일치를 강조한다.
대한민국에서도 미국의 선교로 남북 감리교회가 하나의
감리교회가 되었고, 한국전쟁과 역사적 문제들에서
대한민국 감리교회는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감리교회는 최초의 개신교 연합회인
세계감리교협의회를 설립하고, 20세기에 전세계의
교회일치 운동, 즉 에큐메니컬 운동을 시작한 지도적 교회이다.

[복음적 성화 개념]
이런 감리교회의 사상은 자유의지 개념으로 예정론의
장 칼뱅(존 칼빈)과 개혁교회(영어: Reformed Church,장로교회)와
신학적 입장과는 차이를 보인다. 웨슬리의 구원론에서는
구원은 예정되어있지 않고 예지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반드시 수반되어야한다.
예정론을 거부한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 아르미니우스와
유사하다고 하여 개혁파 교회에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웨슬리와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을 살피면
예정론의 거부만 유사할 뿐 그 이외 부분은 전혀 다르다.

감리교회에서는 이전 종교개혁에서 형성된 교회에는 없던
성화 사상이 발전하였다. 성화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께 더 높은 수준으로 만나며,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며, 이를 체험하면서 한번의 구원 은총에만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신학적 입장이다.
이런 신학적 배경에는 영국의 국가주도 종교개혁을
부족하다고 보고 언약사상으로 개혁하려고 했던
청교도와 독일교회의 경건주의와 초대교회의 전통을
존중하는 공교회(보편교회} 전통과 함께 영향이 있다.

감리교회는 루터교회와 함께 개신교 전통적 복음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조직신학, 기독교 사상 부문과
성경신학에서 새로운 연구에 대해서도 포용적 성향이다.
따라서 신학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감리교회는 다양한
신학을 존중하며 진보적인 성격과 동시에 급진보다는
기독교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한국 전래]
한국에서는 감리교의 첫 선교가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1884년 6월 2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Maclay,R.S.)가 한양에서 당시 개화파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대한제국 고종에게 감리교회의
선교사업에 대한 윤허를 요청하였고, 고종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활동만을 허용하였다. 직접적인 선교는
1885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인천에 도착하며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전신인
조선감리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전래 초기부터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한국 내 관련 대학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연세대학교
(장로교회와 공동 설립), 이화여자대학교, 배재대학교 등이 있고,
감리교회 목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협성대학교, 목원대학교 등의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이 있다.

[미국 연합 감리교회]
미국 내의 감리교회는 영국 감리회와 달리 감독제 교회 형태를
유지하며 발전하여 1950년대까지 미국내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회으로 성장하였다. 현재 대표적인 교단은
1968년 '감리교회' (The Methodist Church)와 역시 감리교 전통의
'복음주의 연합 형제교회' (The Evangelical
United Brethren Church)가 통합하여 세워진
'연합감리교회' (The United Methodist Church)이다.
그 외에 '자유감리교회' (The Free Methodist Church) 및
'나사렛교회' (Church of the Nazarene)가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20세기 초에는 감리교회 내에서 개인의 성화를 중요시 하는
성결운동로 인해 성결교회가 발생하였고, 영적 체험과 은혜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이 벌어지면서 오순절 교회,
즉 순복음 교회가 발전하게 된다.

연합감리교회의 조직은 미국 이외에도 캐나다와 유럽,
아프리카와 필리핀의 교회들을 포함한다. 그 외 감리교회들은
국가별로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여 운영되고 있다.
세계 각지의 감리교회의 교류를 위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세계감리교협의회 본부가 있다.
보편교회의 감독제 교회 전통을 계승하여 감독을 중심으로 한
감독제 교회의 치리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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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Wesley

[Born] 28 June [O.S. 17 June] 1703
Epworth, Lincolnshire, England

[Died] 2 March 1791 (aged 87)
London, England

[Nationality] British (English until 1707)

[Alma mater] Christ Church, Oxford

[Occupation]
Cleric, Theologian, Author

[Spouse(s)] Mary Vazeille

[Parent(s)] Samuel and Susanna Wesley

[Relatives]
Samuel Wesley (brother)
Mehetabel Wesley Wright (sister)
Charles Wesley (brother)

[Religion] Christian (Anglican / Methodist)

[Church] Church of England

[Ordained] 1725

[Offices held]
President of the Methodist Conference

John Wesley (28 June [O.S. 17 June] 1703 – 2 March 1791)
was an English cleric and theologian who,
with his brother Charles and fellow cleric
George Whitefield, founded Methodism.

Educated at Charterhouse School and
Christ Church, Oxford, Wesley was elected a fellow
of Lincoln College, Oxford in 1726 and ordained
as an Anglican priest two years later.
He led the "Holy Club", a society formed for the purpose
of study and the pursuit of a devout Christian life;
it had been founded by his brother Charles,
and counted George Whitefield among its members.

After an unsuccessful ministry of two years at Savannah
in the Georgia Colony, Wesley returned to London and
joined a religious society led by Moravian Christians.
On 24 May 1738 he experienced what has come to be
called his evangelical conversion, when he felt his
"heart strangely warmed". He subsequently left the Moravians,
beginning his own ministry.

A key step in the development of Wesley's ministry was,
like Whitefield, to travel and preach outdoors.
In contrast to Whitefield's Calvinism, Wesley embraced
the Arminian doctrines that dominated the Church of England
at the time. Moving across Great Britain and Ireland,
he helped form and organise small Christian groups
that developed intensive and personal accountability,
discipleship and religious instruction.

Most importantly, he appointed itinerant,
unordained evangelists to travel and preach
as he did and to care for these groups of people.
Under Wesley's direction, Methodists became leaders
in many social issues of the day, including prison reform
and the abolition of slavery.

Although he was not a systematic theologian,
Wesley argued for the notion of Christian perfection
and against Calvinism—and, in particular,
against its doctrine of predestination.
He held that, in this life, Christians could achieve
a state where the love of God "reigned supreme
in their hearts", giving them outward holiness.
His evangelicalism, firmly grounded in sacramental theology,
maintained that means of grace were the manner
by which God sanctifies and transforms the believer,
encouraging people to experience Jesus Christ personally.

Throughout his life, Wesley remained within
the established Church of England, insisting that
the Methodist movement lay well within its tradition.
In his early ministry, Wesley was barred from preaching
in many parish churches and the Methodists were persecuted;
he later became widely respected and, by the end of his life,
had been described as "the best loved man in England".
In 2002, he was placed at number 50 in the BBC's poll
of the 100 Greatest Britons.

(naver.com 지식백과 두산백과 wikipedia.org)


Christ Church, Christian, Church of England, influence(+)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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