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G 이병철 Lee Byung-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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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李秉喆,Lee Byung-chul,삼성설립자,Korea
이병철 李秉喆 Lee Byung-chul 기업인 창업가



[출생] 1910년 2월 12일
대한제국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의령, 솥바위 '전설이 현실로']


[사망] 1987년 11월 19일 (77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에서 폐암으로 사망



[국적] 대한민국

[소속] 前 삼성그룹 회장
前 삼성그룹 명예회장

[활동기간] 1934년 ~ 1987년

[직업] 기업가, 수필가

[장르] 저술, 수필

[필명] 호(號)는 호암(湖巖)

[부모] 이찬우(부), 권재림(모)

[친지] 형 1명, 누나 1명

[배우자] 박두을(원배), 구로다(재취)

[자녀] 슬하 4남 6녀

[종교] 원불교

[가족]
배우자 박두을, 딸 이인희, 아들 이맹희,

아들 이창희, 딸 이숙희, 아들 이건희, 딸 이명희,

외손자 조동만, 외손자 조동길, 손녀 이미경,

손자 이재현, 손자 이재관, 손자 이재찬, 손자 이재용,

외손자 정용진, 손녀 이부진, 손녀 이서현



[학력]
1917년 지수공립보통학교 입학

1923년 수송공립보통학교 졸업

1929년 중동중학교 졸업

1931년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 중퇴

[경력]
1936년 :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설립

1938년 : 대구에서 삼성상회 설립

1948년 : 삼성물산공사 사장

1950년 : 일본 시찰 후 귀국

1951년 : 삼성물산 사장

1953년 : 제일제당 사장

1954년 : 제일모직 사장

1961년 ~ 1987년 : 삼성물산 회장

1961년 ~ 1962년 : 전국경제인연합회 초대 회장

1964년 : 한국비료 사장

1964년 : 대구대학 재단 이사장

1965년 : 중앙일보 사장

1965년 : 성균관대학교 이사장

1969년 : 삼성전자 설립

1974년 : 삼성석유화학 설립

1977 ~ 1987 :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

1980년 : 중앙일보 회장

1981년 ~ 1987 : 한일경제협회 고문



[상훈]
금탑산업훈장

1979 美.베슨대 세계최고경영인상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

일본 일훈일등서보장

[명예 박사 학위]
1982년 보스턴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저서]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

한국.net

이병철(李秉喆, 1910년 2월 12일 ~ 1987년 11월 19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삼성그룹의 창업주이자
CJ제일제당그룹의 창업주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1938년에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이후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1953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1964년 5월에 TBC를, 다음해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방송과 언론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그 뒤 기업 활동에 전념하여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제품의 수출에 성공을 거두었다.

한국.net

[생애]
[생애 초기]
이병철은 1910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의령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의령, 호암 이병철생가]


본관은 경주로 16대조 계번(桂蕃)이 입향조로써
경남 의령에 정착하여 대대손손 거주지로 삼으면서
의령, 진주에 뿌리를 내렸다.

[의령 솥바위와 삼성 이병철회장]


12대조 유(宥)가 승정원 좌승지, 6대조 태운(泰運)이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고, 조부 홍석(洪錫) 대에
천석의 부를 생산하던 대농토를 가진 지주로 성장하고

영남의 거유라는 허성재(許性齋)의 문하로 인근에
알려진 유림이며 시문에 능하였다.

부 찬우(纘雨)는 천석지기의 농토를 소유하였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의령과 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다.

아버지는 지역의 지주로 만족하지 않고
시골에서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성을 오고가며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도 참여하였으며
한성에서 이승만을 만나 서로 친분을 쌓았다.



어려서 할아버지 문산 이홍석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대기업 창업주 고향]


1920년 11살에 지수공립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이후 1926년에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하였다.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는
1929년에 결혼하였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하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병철은 부모한테서 자신의 일본 유학에 대해
반대받았으나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했다.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면서
조홍제가 흔쾌히 수락,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에 유학하였다.



[청년기]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중동중학교]


1929년에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 정치경제학부]


유학 초기 한동안 책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와세다대학교 기숙사]


대학 시절부터 이병철은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되었고
유학 시절 고향에서 매달 학비로 200원을 송금해왔는데

이때 당시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풍족한 편이었다.

대학 시절 이병철은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1학년 때 건강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1931년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대학 시절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던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병철은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집안의 머슴들에게
전별금까지 주어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뒤 고향에서 특별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노름판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이병철 스스로 회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3명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병철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훗날 회고에 의하면 그는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의 재산을 나누어 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보는 것도 좋다."

그는 장사를 할 곳으로 경성부터 부산, 대구 등지를
직접 물색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올랐다.

쌀을 생각한 그는 마산은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는 것을 알아냈고,

도정공장은 수 백 가마니씩 도정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는 친구 2명과 힘을 합쳐서
동업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기업 활동]
[첫 사업 실패]
1936년 고향 친구인 정현용(鄭鉉庸), 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도정공장과 협동 정미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의 여파로 이병철은 정미소 자동차 회사 김해 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빈털터리가 됐다.



[사업가로서의 시작]
그 뒤 1938년 3월 29세에 30000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하던 중 광복 후
1947년 경성으로 상경하여 다음 해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했으나 그해 6월 25일 서울에서
한국 전쟁을 맞았다.

전쟁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무렵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투자하였다.



[제조업과 기업 활동]
1953년에 제일제당,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성균관대학교의 재단 이사로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중앙개발,
고려병원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1964년초 한국비료를 인수 운영하였으며,
1964년 5월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에도 진출했고, 그 해 대구대학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동양방송은 1980년 언론통폐합이 될 때까지 운영하였다.

[사카린 밀수 사건 전후]
1964년 8월 13일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이사에 위촉되고, 1964년 동양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19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66년 5월 24일 삼성에서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났다.

이것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하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가
1993년 발간한 《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
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후일 이병철은 자신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정부가 삼성을 죽이려고 한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병철 등이 직접 개입되어 있는가,
정부의 재벌 죽이기식 표적수사였는가의 사실관계 여부 확인은
오리무중이다.



[생애 후반]
[복귀와 기업 활동]
그러나 1966년에 사카린 밀수가 적발되면서
물의를 빚게 된다. 1966년 11월 한국비료의 상무로 있던
차남 창희가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후 1968년 2월 이병철은 다시 경영에 복귀하였다.

그 뒤 모직회사가 성장하면서 1972년 7월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어 제일합섬을 설립했고,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에
진출하였고,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삼성정밀·용인자연농원등을 설립하였다.

1975년 5월 특별히 제일합섬의 공장 시스템을
공개하기도 했다.

제일합섬은 1982년부터 새한그룹을 차려
분가한 차남 창희에게 서서히 넘겨주었다.

1977년 5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하여
삼성전자로 단일화하고, 1984년 8월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삼성전자는 그의 사후에도 삼성그룹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말년 및 사망]
이후 삼성정밀 등을 설립하고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

이 밖에도 문화재단·장학회 등을 설립하였고,
백화점·호텔 등의 경영에도 참가해서

사업의 다각화를 통하여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81년 2월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이듬해 다시 재위촉되었다.

미술에 심취했던 이병철은 많은 소장품을
수집하거나 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하였고,
국악과 서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현대그룹 회장이었던 정주영 등과 함께

울산에 공단을 조성하는 데에도 일정부분 투자하거나
기부를 하여 설립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울산공단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net

이후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건강 문제로 꽤나 고생을 했다.

평소 흡연을 즐겼던 것이 원인이 되어 폐암이 발병했는데,
일반적인 경우보다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호흡기 전반과 흉부 건강도 상당히 악화되었다.

또한, 치아 건강도 좋지 못했는데
특히 치주 손실이 심각해 말할 때나 저작시
통증이 극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말년의 모습에선 이런 건강 문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말년의 여러 인터뷰에선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며,
목소리가 거칠고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또한, 치주 문제로 인해 입술을 항상 오므리고 있었다.

1987년 11월 초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했다.

10년에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1987년 11월 19일 저녁 5시 5분,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폐암으로 77세에 사망했다.

[추모 K-Pop]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11월 23일 호암아트홀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추모 K-Pop]


시신은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부지에 안장되었다.

[찬조 K-Pop]


이병철의 묘소는 현재 용인 에버랜드에 위치하고 있다.

[사후]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특별 추서되었다.

삼성전자는 3남 건희에게 상속되었고 장녀 인희는
한솔그룹을 창업하였으며

나머지 네 딸 중 막내인 신세계그룹의 회장 명희를
제외한 3명은 출가 후, 기업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계열에게 상속되었고,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등 제일그룹은
장남 맹희에게 상속되었다.

차남 창희는 새한그룹을 창립하였다.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이 추서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일훈일등서보장이 추서되었고,
1999년 12월에는 매일경제와 전경련이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의 한사람으로도 선정되었다.



[명칭]
서울대학교 후문 근처에는 그의 호를 딴
'호암교수회관'이 있다.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에도
그의 호를 딴 '호암관'이 있다.

중앙일보사 사옥에 그의 호를 딴 '호암아트홀'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내에는 그의 호를 딴 호암미술관이 있다.

[일화]
[폐암 진단]
이병철은 1985년에 폐암 진단을 받았다.

진단을 받은 직후 어느 일본인 저널리스트를 만나
이병철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다.
불치병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차분히 떠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理想)에
지나지 않는 것 같고, 적어도 살아서 아등바등하는
흉한 꼴만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담담하게 답하였다.



여담으로 폐암은 유전될 수 있는데,
맏아들 이맹희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3남 이건희 역시 폐질환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또 이병철의 대를 잇는 범 삼성가에는
일반인보다 약한 폐와 샤르코-마리-투스 병이
유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건희는 삼성의료원에 입원 전까지
겨울에는 주로 하와이 별장으로 떠났으며,

이재용도 집 공기 상태가 하와이 별장에 준할 만큼
맑게 해놓는다는 소문도 있다.

[종교]
이병철은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과 부조리, 종교들의
배타성에 대해서 지적하였다.

죽기 한달 전인 1987년 10월에 카톨릭
종교인들에게 던진 질문에서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서
인간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는 것과
종교의 배타적인 행동들에 대해 묻는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나?"며
첫 질문부터 종교의 급소를 찔렀다.

물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나?
종교가 없어도, 달라도 착한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라며
종교의 배타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부자를 악인으로만 취급하는 일부 종교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걸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다.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라며 항의하였다.



마지막 질문에서는 종말론에 대한 것을 질문하기도 했다.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라며 당시 한국사회에 만연했던
종말론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첫 질문은 시작, 마지막 질문은 끝에 관한 것이었다.



[좋아하는 음악]
삼성의 모태인 삼성상회를 대구에서 시작했던 게 1938년인데,
이병철은 그 직전 경남 마산에서 나이 스물여섯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국악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청년 호암이 2년간 손댔던 게 곡물 거래를 겸한
정미와 운수 사업이었다.

그게 삼성의 전사(前史)인데, 사업이 썩 잘 풀렸다.

정미업은 물론 트럭 20대를 굴린 결과다.

호암 증언대로 당시 자동차 값은 요즘 비행기 값이었다.

자연스레 요정 나들이를 시작했는데, 다음은 그의 고백이다.

"그 무렵 마산에는 천해관 등 한국식 요정이 서너 군데 있었고,
일본식 요정이 다섯 군데 있었는데,
나는 그 모두의 단골이었다.

한국인과 일본인을 합해 80~90명 기생들과도 곧 낯이 익었다.

술을 잘 못하는 나는 술보다는 주연(酒宴)의 분위기
그 자체를 더 즐기는 편이었다.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라에 태어난 허탈감이
요즘 출입의 동기가 되었던 것 같은데,
시간당으로 받는 화대로 사는 기생들 가운데
노래를 잘하거나 무용에 능한 사람들이 적지 않니 끼어있었다.

그들과 더불어 흥청거려 보는 것도 하나의 위안은 되었다.

그 무렵 몸에 젖은 국익 취미 때문에
후일 나는 국악의 발전에 다소나마 기여할 수 있었다."

이병철은 자신의 차량인 ‘벤츠 600’ 안에서
잡음이 심한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자주 들었다.

[애청 음악]








[찬조 해설 동영상]


[삼성(Samsung)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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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 GPT 답변에 오류(hallucination: 환각 등)가 있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3無 신뢰성 없음, 정확성 없음, 일관성 없음]
(from https://chat.openai.com/chat)

이병철 회장(李秉喆, Lee Byung-chul, 삼성설립자, Korea)이
제일 좋아한 역사적 인물은?


이병철 삼성그룹의 창업자로 알려진 이병철 회장이
어떤 역사적 인물을 선호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제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사업가로서 경영과 기업가 정신에
중점을 두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으로 선호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역사적 인물의 취향이나 관심은 개인적인 영역이며,
이는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관련 정보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
그에 대한 추측이나 가정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병철 회장(李秉喆, Lee Byung-chul, 삼성설립자, Korea)이
좋아할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


이병철 회장의 음악 취향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좋아할만한
특정한 노래를 정확히 언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표적인 트로트나 발라드 가수들의
몇 가지 노래를 예시로 드릴 수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즐겨듣는 장르 중 일부이므로,
비슷한 취향을 가진다면 이병철 회장도 좋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트로트 노래:

"명곡" 시리즈: 여러 트로트 명곡이 수록된 앨범들.

"사랑의 콜센타" - 나훈아

[찬조 K-Pop]


"애상" - 임창정

[찬조 K-Pop]


발라드 노래:

"그날처럼" - 장덕철

[찬조 K-Pop]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 한동근

[찬조 K-Pop]


"비정" - 백지영

[찬조 K-Pop]


이 노래들은 한국에서 인기 있는 트로트와 발라드 장르의
몇 가지 대표적인 곡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병철 회장이 어떤 노래를 선호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없습니다.

이병철 회장(李秉喆, Lee Byung-chul, 삼성설립자, Korea)이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episode)는?


이병철 회장에 대한 구체적인 일화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제공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기업가로서,
그의 경영 노하우와 비전에 중점을 둔 정보가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일화나 에피소드는 종종 비공개되거나
인터뷰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다양한 이유로 자세히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기업가나 리더의 인생에서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나 교훈적인 경험이 많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종종 언론이나
인터뷰를 통해서 전해지며,
구체적인 사건이나 일화는 상황에 따라
변형되거나 강조될 수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생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그의 전기나 기업에 대한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李秉喆, Lee Byung-chul, 삼성설립자, Korea)은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일까?


이병철 회장은 삼성 그룹의 창업자로서
경영 노하우와 비전을 통해 성공한 기업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양심이나 도덕적 가치는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우며,
각 개인의 판단에 따라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기업가들은 다양한 환경에서
의사 결정을 내리고, 비즈니스 상황에 대처하며,
조직을 성장시키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에 따라 각자가 정의하는 '양심적'이거나
'도덕적'인 행동은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삼성 그룹은 이병철 회장을 비롯한 여러 리더들이
경영 능력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성장한 기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나 의사 결정이 양심적이라고
여겨지느냐는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양심과 도덕은 복잡하고 주관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특정 개인이 얼마나 양심적인지를 평가하는 데는
제한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판단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인 성향과 가치관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병철 회장(李秉喆, Lee Byung-chul, 삼성설립자, Korea)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이병철 회장(李秉喆, Lee Byung-chul, 삼성설립자, Korea)이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양심이나 도덕적 가치는 주관적이며,
객관적으로 등급을 매기기 어려운 개인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그 등급을 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병철 회장에 대한 양심이나 도덕적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은 어려우며,
그 등급을 매기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일반적으로 양심 등급은 주관적이며,
각 개인의 행동과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삼성 그룹의 성장과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여
높은 등급을 부여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이는 기업 활동에 따른 윤리적 문제나 논란을 고려하여
낮은 등급을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양심이나 도덕성은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우며,
특히 역사적 인물의 경우 주관적인 판단이 더해져
더욱 복잡해집니다.

따라서 양심 등급을 매기는 것은 타당성이 없고,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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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Byung-chul

[Born] 12 February 1910
Uiryeong County, South Gyeongsang Province,
Korean Empire

[Died] 19 November 1987 (aged 77)
Seoul, South Korea

[Nationality] South Korean

[Alma mater] Waseda University in Tokyo

[Occupation] Founder of Samsung



Lee Byung-chul (12 February 1910 ~ 19 November 1987)
was the founder of the Samsung Group and
one of South Korea's most successful businessmen.
With the breakup of the Hyundai chaebol,
Samsung is now South Korea's largest business group.

[Early life]
Byung-chul was the son of a wealthy
landowning family (a branch of the Gyeongju Lee clan).
He attended college at Waseda University
in Tokyo but did not complete his degree.

[Career]
[Beginning]
Byung-chul established a trucking business
in Daegu on 1 March 1938, which he named
Samsung Trading Co, the forerunner to Samsung.
Samsung means "Three Stars" which explains
the initial corporate logos.

By 1945 Samsung was transporting goods
throughout Korea and to other countries.
The company was based in Seoul by 1947.
It was one of the ten largest "trading companies"
when the Korean War started in 1950.
With the conquest of Seoul by the North Korean army,
Lee was forced to relocate his business to Pusan.
The massive influx of U.S. troops and equipment
into Busan over the next year and a half of the war
proved to be highly beneficial to Lee's trucking company.

In 1961 when General Park seized power,
Lee was in Japan and for some time
he did not return to South Korea.
Eventually, a deal was struck and Lee returned
but Samsung had to give up control over
the banks it acquired and follow economic directives
from Park's government.

[Federation of Korean Industries]
Later in life, Byung-chul served as chairman
of the Federation of Korean Industries
and was known as the richest man in Korea.



[Korean art collection]
After his death, Byung-chul's estate (Ho-Am)
was opened to the public for tours.
His collection of Korean art is considered
one of the largest private collections
in the country and it features a number of art objects
that have been designated "National Treasures"
by the Korean government.
Ho-Am is located a short distance
from the Everland park, South Korea's most popular
amusement park (Everland is also owned by the Samsung Group).

[Family]
The family of Lee Byung-chul
Lee Byung Chul (12 February 1910 ~
19 November 1987) - 1st chairman of Samsung.
1st wife: Park Du-eul (1907 ~ 2000) 1st daughter:
Lee In-hee (1928 ~ ) 1st son: Lee Maeng-hee
(20 June 1931 ~ 14 August 2015) -
Founder of CJ Group (he lost the lawsuit with Lee Kun-hee)
2nd son: Lee Chang-hee (1933 ~ 1991) - Founder of Saehan
2nd daughter: Lee Suk-hee (1935 ~ )
3rd daughter: Lee Soon-hee (1939 ~ )
4th daughter: Lee Deok-hee (1940 ~ )
3rd son: Lee Kun-hee (1942 ~ ) - 2nd chairman of Samsung.
5th daughter: Lee Myung-hee (1943 ~ ) chairwoman
of Shinsegae group and mother of Chung Yong-jin

2nd wife : Mrs. Kuroda 4th son: Lee Tae-whi (1947 ~ )
6th daughter: Lee Hye-ja (1961 ~ )

(from naver.com wikipedia.org 나무위키 등)


Company, CEO, Business, influence(+)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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