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G Create&Conscience: C
Edit 2023-03-13 오후 6:26:57
PIG C+
Home http://bit.ly/2sb5Iqf
SNS1 http://bit.ly/2s8Kjhn
SNS2 https://en.wikipedia.org/wiki/Joseph_Priestley
SNS3 http://bit.ly/2BbQkNe
 related < HOME > < EDIT>
Rname
      
프리스틀리-J. Priestley,신학자,과학자,England
조지프 프리스틀리 [Joseph Priestley]



[출생-사망] 1733년 3월 13일~1804년 2월 6일 (70세)

[국적] 영국

[활동분야] 종교, 화학

[출생지] 영국 잉글랜드 웨스트요크셔쥬 리즈 근교의 필드헤드

[주요저서]
《전기의 역사: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Electricity》(1767년)

[주요작품]
《그리스도 교회사:A General Histroy of
the Christian Church》(4권, 1790∼1802)

[요약]
영국의 신학자·철학자·화학자이다.

1771년 물의 조성을 처음으로 발견하였고,
1774년 집광렌즈를 이용하여 산소를 발견하였지만
산소의 정체를 밝혀내지는 못하였다.



리즈 근교의 필드헤드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다벤트리의 비국교파(非國敎派) 신학교에 입학하여
광범한 신학적 지식을 얻고,

1755년 니덤마켓의 독립파 교회와 난드위치 교회 등에서
목사로 있었다.

이후 1761년 워링턴의 비국교파 신학교에서 문학교수로 있었다.

신학자로서는 유니테리언의 입장에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교의 신성(神性)을 부정하였다.

자연권의 도그마를 부정하고,
사회의 다수 성원의 상호이익이라는 공리주의적 원리에
기초를 두어 J.벤담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767∼1772년 리즈의 목사,
1772∼1780년 셀번경(卿)의 도서실 관리인,

1780∼1791년 버밍엄의 목사로 있었는데,
폭도들이 그가 프랑스혁명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방화를 저질렀다.

그리하여 집과 서적·원고 등이 불태워지자
1794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펜실베이니아주 노섬벌랜드에 정착하였다.

한편, 런던에서 B.프랭클린을 만나
그의 영향으로 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1767년에 《전기의 역사: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Electricity》를 저술하였다.

프리스틀리는 1771년 물의 조성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수소 기체와 산소 기체를 혼합하고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면
물이 생성되는 것을 알아내었다.



1772년 탄산가스를 이용하여 소다수를 발명하고,
뒤이어 기체를 물 또는 수은 위에서 포집(捕集)하는
장치를 고안하였으며,

일산화이질소·암모니아·염화수소·이산화황·
플루오르화규소 등을 발견하였다.

1774년 집광렌즈를 이용하여 산화수은에 태양광선을 쬐어
산소와 수은으로 분리하였지만,

플로지스톤설을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체인 산소를 발견하고도
산소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하였다.

이후 산소의 정확한 규명은 프리스틀리의 실험결과를
토대로 라부아지에가 밝혀내었다.





또한 그는 식물의 호흡(1779), 동화작용(1781) 등도 연구하였다.

그의 주요저서에는
《그리스도 교회사:A General Histroy of
the Christian Church》(4권, 1790∼1802)

《Notes on All the Book of Scripture》(4권, 1803∼1804)
《Essay on the First Principles of Government》(1768)
등이 있다.



[찬조 동영상]


-------------------------------------------

조지프 프리스틀리

[출생] 1733년 3월 13일
영국 필드헤드

[사망] 1804년 2월 6일 (70세)
미국 노섬벌랜드

[국적] 영국

[분야] 화학

[주요 업적] 산소 발견

[종교] 유니테리언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FRS,
1733년 3월 13일 ~ 1804년 2월 6일)는 영국의 화학자,

성직자, 신학자, 교육학자, 정치학자, 자연철학자
(natural philosopher)였다.

그는 자유주의 정치학, 종교, 실험 과학 등 다방면에 기여했다.



산소의 발견자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스스로는 자신을 과학자라기보다는 성직자로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신학적으로는 유니테리언,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
철학적으로는 유물론을 표방했다.



[생애]
[초년 (1733~1755)]
프리스틀리는 1733년 영국 잉글랜드 북부 리즈 근방
버스털에 있는 마을인 필드헤드의 부유한 의류 제작자이자

개신교도인 조너스 프리스틀리와 그의 아내 메리 프리스틀리
사이에서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필드헤드에서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샤프톤에 사는 농부인
할아버지에게 맡겨졌다.

어머니는 1739년 12월 28일 출산 직후 세상을 떴고,
그 후 프리스틀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버지가 1741년에 재혼한 후,
프리스틀리는 필드헤드 인근 헤크몬드와이크에 사는
고모 사라 케일리와 고모부 존 케일리에게 맡겨졌다.

고모와 고무부는 결혼한지 17년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없었다.

프리스틀리는 자주 병에 걸리곤 하였지만,
배우는 데에는 상당한 열정이 있었고 능력이 뛰어나서

네 살 때 이미 장로교회와 개혁 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교리문답의 107개 질문과
답을 모두 외울 정도였다.

그는 부유한 사라 고모의 보호 아래 독실한
칼뱅주의적인 개신교 신자로 길러졌지만,

이와 동시에 고모는 다양한 종파의 개신교도와 심지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과도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프리스틀리는 열두 살이 되자 문법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휴일이면 개신교 목사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우곤 했다.

1749년 무렵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학교에
나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는 계속해서 아람어 및 시리아어, 아랍어 등을 공부하였고,
이와 동시에 자연철학을 비롯한 형이상학,
논리학 관련 책들을 공부했다.

리스본에서 무역을 하던 그의 친척의 일을 돕기 위해서
프랑스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사라 고모는 그가 장로교나 독립교회와 같은
개신교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고, 프리스틀리도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1752년 그는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노샘프턴셔 주의 데번트리에 있는 18세기에
비국교도들이 설립한 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비국교도들은 케임브리지 대학교나 옥스퍼드 대학교와
같은 곳에 입학할 수 없었고, 따라서 많은 비국교도들은
비국교도들을 위해 세워진 학교에 입학하여야 했다.

그 중 일부는 교육 수준이 정규 대학교보다 더 뛰어나
많은 뛰어난 선생과 학생이 몰리기도 하였는데,
프리스틀리가 간 신학교도 이러한 경우 중 하나였다.

그는 신학교에서 3년에 걸쳐 정규 교육 과정 이외에도
따로 역사와 철학, 과학 등을 공부하였는데,
이는 그의 비정통적 견해를 더욱 발전시켰다.

데번트리의 신학교는 자유교육과 자유토론을 중시하였으며,
그는 이곳에서 데이비드 하트리나 앤서니 콜린스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유의지를 거부하고 결정론과 유물론을 신봉하게 되었다.



[사상]
[철학과 종교]
프리스틀리는 인간은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이며
이를 위해서는 지식의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식을 탐구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기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리스틀리에게 모든 진리는 종교적 가치와 연관되었다.

그에게 과학적 진리는 종교적 진리와 동일시되었고,
따라서 그의 종교관 역시 일종의 합리성을 지니게 되었다.

프리스틀리는 유물론을 신봉하였고,
이는 그의 종교관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물질의 고체성, 불활성, 무감각성 등은
물질의 본성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힘이 물질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물질이 존재하는 것과 정신적 힘을 소유하는 것은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물질과 정신이 독립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프리스틀리는 기독교가 타락하게 된 이유를 정신과
물질을 독립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예수가 성육신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교리인 선재설, 속죄,

영혼에 의한 육체의 부활 등의 복잡한 교리들을
도입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본질적인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이교도들의 철학이 도입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수마저도 단지 가장 선량하고 현명한 인간으로 보았다.

프리스틀리는 성부, 성자, 성령 중 성령조차 배격하였으며,
성부만을 인정했다.

그러나 프리스틀리는 신은
물질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신의 본성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의 존재나 권능에 대한 증거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프리스틀리의 유물론은 곧 결정론으로도 이어진다.

그는 결정론이 물질계와 정신계를 모두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프리스틀리에게 결정론은 신이 인간에게 노력을 통해서
최대의 행복을 쟁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동기를 따른다면, 신의 뜻을 따라
선한 동기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
프리스틀리는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으며,
상호 협동을 통해 무한한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지식과 사회성을 인간의 발전에서
중요한 기초로 생각했다.

또한 프리스틀리는 정치에서 다수의 이익과 행복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공리주의와 일맥상통한다.

프리스틀리는 인간들이 이익을 위해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유를 포기해야 하고,
행동을 전체 사회의 방향에 순응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서 군중들은 공직자들에게
자신들의 권한을 위임하여야 하고,
이것이 정치의 성립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부는 사회의 이익을 통해서
강압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군중도 침해받아서는 안 될 최소한의 기본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스틀리에게 자유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에게 정치적 자유는 모든 국민이 정치에 발언권을 가지고,
공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확보되며,
공직자의 임명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국민이 출생이나 재산의 유무에 따라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것에 차별을 받게 되면
정치적 자유가 흔들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프리스틀리는 혁명권을 인정하였으며,
위정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악용하여 다수의 행복을 파괴한다면
국민은 그들을 축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을 미국 혁명과 더불어
자유의 교리를 가르쳐 준 규범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이 혁명주의자들을 억압하기 시작하자,
그에 따라 그의 사상도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프리스틀리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고
국왕, 귀족, 평민의 정치적 삼위일체를 인정하였으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진정한 존경의 대상은
오직 국민과 법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적으로도 일종의 유니테리언이 된 것이다.

또한 프리스틀리는 개인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신의 섭리가 인간을 진보와 행복으로 이끌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지나친 구속이나 제도는 이에 방해가 된다고 설명했다.

즉, 정부는 국민에게 지나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관제 교육에도 반대했다.



[교육]
프리스틀리의 교육 사상의 기초는 데이비드 하트리의
관념 연상설과 유니테리언이다.

이에 기반을 두어 그는 새로운 교육 과정을 제시하였으며,
여성과 하위 계층의 교육 역시 고려했다.

또한 국가에 의한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민간 주도의 다원적 교육을 지지했다.

프리스틀리는 워링턴 아카데미에서 영어, 근대사, 과학 등
실용적인 교과목을 교과 과정에 편입시키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교육 과정을 주장했다.

그는 교육 방법 역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학생 스스로 의문을 품고 탐구해 나가는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교육 철학은 데이비드 하트리의 관념 연상설에
기초한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하트리의 주장을
인간 생활에서 외부환경의 중요성의 강조라고 이해했다.

따라서 훌륭한 교육이야말로 인간의 완전성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또한 프리스틀리는 교육은 단순한 지식 연마가 아닌,
올바른 마음가짐과 올바른 행동을 위한 교육이 따라야
한다고 설명했다.

올바른 마음가짐은 본성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길러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지적·도덕적 발전을 위해서는 육체의 연마 역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연마라고 생각했다.

종교적 교육의 측면에서 프리스틀리는 유니테리언에
기초하여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부분,

예컨대 삼위일체나 예수의 속죄설 등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합리적 사상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통해서
합리적인 종교관을 심어줌으로써,

기존 종교의 신비주의나 비합리적인 부분을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프리스틀리는 중간계급을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에게 실용적인 교육을 제공했다.

또한 여성 교육에서도 여성이 평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이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서라도
교육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리스틀리는 정부 주도의 교육은
인간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며,

지배 세력에 영합하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여
이를 배격했다.

국가가 교육을 지배하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대신 그는 민간 주도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서]
프리스틀리는 평생 매우 많은 글을 썼다.

과학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친구인 존 루트가
1817년부터 1832년에 걸쳐 스물다섯 권으로 정리했다.

1761년 첫 책을 펴낸 그는
워링턴 아카데미의 강사로 있을 때

교육 관련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는데,
그가 쓴 교육 관련 저서는 다음과 같다.

Rudiments of English Grammar (1761년)
Theory of Language and Universal Grammar (1762년)
Chart of Biography (1765년)

Essay on a Course of Liberal Education for Civil
and Active Life (1765년)
Lectures on History and General Policy (1765년, 1788년)

프리스틀리는 신학이나 철학 관련 저서도 많이 저술했다.

그가 쓴 가장 대표적인 신학·철학서는 다음과 같다.

Institutes of Natural and Revealed Religion (1772년~1774년)
History of the Corruption of Christianity (1782년)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o the Fall
of the Western Empire (1790년, 1802년~1803년)
Disquisitions relationg to Matter and Spirit (1777년)

또한 그는 결정론에 대한 몇 편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신학·철학 저서는 대부분 그가 과학 분야에
남긴 업적, 특히 기체 연구의 저서들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다.

화학 분야에서 그가 남긴 대표적인 저서는 다음과 같다.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 (1774년~1786년)
Experiments on the Generation of Air from Water (1793년)

Experimenst and Observations relating to the Analysis
of Atmospheric Air(1800년)

Considerations on the Doctrine of Phlogiston established
and that of the Composition of Water refuted (1800년)

그는 전기와 광학에 대한 책도 저술했다.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Electricity (1767년)
History of Discoveries relating to Vision,
Light and Colours (1772년)

이밖에도 그는 수많은 종교 및 철학, 정치,
과학 관련 저서를 남겼다.

[찬조 음악]


---------------------------------------

[챗 GPT 답변] (답변에 오류가 많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from https://chat.openai.com/chat)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FRS, 신학자, 과학자)가
제일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은?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많은 인물들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가장 좋아했던 인물 중 하나는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였습니다.

프리스틀리는 스미스의 저서 "국부론(Wealth of Nations)"을 읽고,
이 책에서 제시된 경제학적 개념들을 매우 인상 깊게 받았습니다.
프리스틀리는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 이론과
경제의 규제와 개혁에 대한 논의를 존경하며 지지했습니다.

이 외에도 프리스틀리는 이순신, 블레즈 파스칼,
이자벨라 베이어(Isabella Baeyer)와 같은 인물들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FRS, 신학자, 과학자)가
좋아할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신학자이자 과학자였으며,
음악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분야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가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를
들어볼 기회가 있다면, "사랑의 콜링"이나

"이 밤이 지나가면"과 같은 고전적인 발라드 노래를
좋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찬조 음악]


이 노래들은 감성적이고 청자의 마음에 잘 울릴 수 있는
가사와 멜로디가 특징적입니다.

[찬조 음악]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FRS, 신학자, 과학자)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episode)는?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많은 독특한 경험을 했지만,
그 중 하나는 1774년 8월 1일 오후 발생한 일입니다.

당시 프리스틀리는 신학자로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었고, 자신의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대량의 가스가 방에 채워졌고,
프리스틀리는 이 가스가 유독가스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즉시
대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연구실에서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는 동시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상황판단을 하고 대처하는 자신의 능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프리스틀리가 실험 중인 화학 반응에서 발생한 이 가스는,
나중에 산소라는 것을 밝혀내는데 기여한 가스였습니다.
이 경험은 프리스틀리가 과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향상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과학 연구와 실험을 보다 안전하게 수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FRS, 신학자, 과학자)는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일까?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양심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개성적인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양심적인 사람으로 알려진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신앙에 대한 표현에 대해
용감하게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프리스틀리는 신학, 과학, 정치 등의 분야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며,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대립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프리스틀리는 개혁주의자이며,
미국에서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운동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했으며, 이로 인해 자신의 생활과 연구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프리스틀리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용감하게 밝히고 지지했습니다.

그는 유달리 개혁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중요시하며,
종교적 자유와 평등을 옹호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모습으로 인해,
그는 다른 종교적 관습을 준수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옹호하고 용감하게 행동했던 양심적인 인물로 평가됩니다.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FRS, 신학자, 과학자)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FRS, 신학자, 과학자)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제가 답변드릴 수 있는 것은 사실적인 역사적 사실이 아닌
가상의 가치 판단이므로, 이에 대한 답변은 제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양심은 각 개인의 주관적인 가치 판단과 규범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으므로, 저는 이에 대해 평가를 내릴 권한이 없습니다.

============================================

Joseph Priestley FRS
(24 March [O.S. 13 March] 1733 ~
6 February 1804) was an 18th-century English
Separatist theologian, natural philosopher, chemist,
innovative grammarian, multi-subject educator,
and liberal political theorist
who published over 150 works.

He has historically been credited with
the discovery of oxygen, having isolated it
in its gaseous state, although Carl Wilhelm Scheele
and Antoine Lavoisier also have strong claims
to the discovery.



During his lifetime, Priestley's considerable
scientific reputation rested on his invention
of soda water, his writings on electricity,
and his discovery of several "airs" (gases),
the most famous being what Priestley dubbed
"dephlogisticated air" (oxygen).

However, Priestley's determination to
defend phlogiston theory
and to reject what would become the chemical
revolution eventually left him
isolated within the scientific community.

Priestley's science was integral to his theology,
and he consistently tried to fuse Enlightenment
rationalism with Christian theism.

In his metaphysical texts, Priestley attempted
to combine theism, materialism, and determinism,
a project that has been called "audacious
and original". He believed that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natural world would promote
human progress and eventually bring about
the Christian Millennium.

Priestley, who strongly believed in the free and
open exchange of ideas, advocated
toleration and equal rights for religious Dissenters,
which also led him to help found Unitarianism in England.

The controversial nature of Priestley's publications,
combined with his outspoken support of
the French Revolution, aroused public and
governmental suspicion; he was eventually forced
to flee in 1791, first to London and then to
the United States, after a mob burned down
his Birmingham home and church.
He spent his last ten years in Northumberland County,
Pennsylvania.

A scholar and teacher throughout his life,
Priestley also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pedagogy,
including the publication of a seminal work on
English grammar and books on history,
and he prepared some of the most influential early timelines.

These educational writings were among Priestley's
most popular works. It was his metaphysical works,
however, that had the most lasting influence:
leading philosophers including Jeremy Bentham,
John Stuart Mill, and Herbert Spencer credit them
among the primary sources for utilitarianism.

(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wikipedia.org)


Chemist, Carbonation, influence(+)~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C+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0 1 2 3 4 5 6 7 8 9

Social Name Portal 한글 세계이름 포털: 한국.net   Wopen.net   yungbkim@nate.com
Selected/Recommended Youtube Videos/Images are shown.
Joint R&D: If you (major Portal) are interested in
the new Worldwide Phonetic Service using Korean Alphabet Domains
(ㄱ.com .. ㅎ.com ㅏ.com .. ㅔ.com 김.net 이.net 박.net ..), Please let us know.
shared by link
웹프로그래밍(한국.net 사례기반) & 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한국.net 사례기반)&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롤모델100명-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한국.net 사례기반)&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롤모델100명-김영복 저
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 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 (한국.net 사례기반) - 김영복 저, 실습 사이트: w3schools.com
Role Model 100명 from 한국.net
한국.net
Name Por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