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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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철학자,Germany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Schopenhauer, Arthur ]

[출생] 1788년 2월 22일
서프로이센 단치히(그단스크)

[사망] 1860년 9월 21일 (72세)
독일 연방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직업] 철학자
[분야] 허무주의
[국적] 독일

[거주지]
단치히, 함부르크, 르아브르, 바이마르, 베를
린, 뮌헨,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등


[분야]
인식론, 형이상학, 미학, 윤리학, 논리학, 고전
문헌, 수학 등

[영향받음]
인도철학(베단타철학 등), 플라톤(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유베날리스, 단테, 조르다노 브
루노, 니콜라 말브랑슈, 셰익스피어, 볼테르,
장 자크 루소, 요하네스 케플러, 임마누엘 칸
트,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괴테, 데
이비드 흄, 조지 버클리, 마티아스 클라우디우
스, 존 로크, 프랜시스 베이컨 등.


[영향줌]
프리드리히 니체, 야콥 부르크하르트, 칼 포퍼,
비트겐슈타인, 막스 호르크하이머, 게오르그 짐
멜, 막스 셸러, 길버트 라일, 프레게, 조지 산타
야나, 윌리엄 제임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오토
바이닝거, 앙리 베르그송, 카를 융, 빌헬름 분
트, 샤를 보들레르, 앙드레 지드, 조지 기싱, 헨
릭 입센, 허먼 멜빌, 토마스 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톨스토이, 키에르케고르, 사르트르,
존 롤스, 요하네스 브람스, 아놀드 쇤베르크, 안
톤 드보르작, 구스타브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
스, 리하르트 바그너, 알버트 아인슈타인, 에르
빈 슈뢰딩거, 조지프 캠벨, 존 그레이, 카를 오
이겐 노이만, 카를 크라우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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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교단에 서지 않고, 주로 민간
문필가로서 지냈다. 그는 칸트와 같이 현상과
물자체(物自體)를 구별하지만, 경험적 현상의
세계는 주관의 여러 형식(시간, 공간 및 인과의
법칙)에 의존하는 단순한 표상에 불과하고
물자체에 해당하는 것은 의지, '맹목적인 생존의
지'라고 본다. 무기적 자연에서 동식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전체는 이러한 의지의 객체화ㆍ개별
화의 여러 단계이기 때문에 세계는 보편적으로
무근거, 무원리이고, 부단한 욕망에 쫓기어
만족할 수 없는데 이러한 생은 고통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최악의 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술적 관조에 의해 세계를 망각하거나, 욕구를
단멸(斷滅)하고, 인도 종교사상의 우파니샤드에
서 말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1848년의 혁명 후, 사람들에게 주목되었다가
혁명이 좌절된 후 실망한 독일의 중간층에서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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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독일의
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
게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에 대해서는 칸트의 사상
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
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철학(인식
론)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에 출간하였다. 대학강의에서
헤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
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
서 줄곧 독자적인 연구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
아 있음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
서 주장했다.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
간하였다. 이후 <여록과 보유>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
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1820년 대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에 관해 알게 되었
다. 이 종교들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과 칸트가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
다. 먼 과거의 동양 사상가들이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환경, 언어,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
학의 과제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철학의 세련된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간의 유사성
을 말한 철학자이자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노골적
으로 표명한 독창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
19세기 말에 유행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
을 끼쳤다.


[연보]
1788년 2월 22일 유럽의 항구 도시인 단치히에
서 상인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쇼펜하우어와 소
설가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남으로 출
생했다.
1793년(5세)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합병되자 가족
이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1797년(9세) 여동생 아델레가 출생했다. 아버지
가 프랑스 르아브르에 있는 친구 집에 쇼펜하우
어를 맡겼고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2년 간 지내
며 프랑스어를 익혔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프랑스어를 확실히 익히길 원했고 결과에 만족스
러워했다.
1799년(11세) 프랑스에서 돌아와 상인 양성기관
인 룽게 박사의 사립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4
년 간 공부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1800년(12세) 아버지와 함께 하노버, 칼스바트,
프라하, 드레스덴을 여행했다.
1803년(15세) 상인이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온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했다. 이 여행은 상
인이 되기 싫어하는 쇼펜하우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런던에 도착하여 신부 랭카스터의 집
에서 머물며 영어를 익혔다.
1804년(16세) 프랑스를 여행했으며 다시 스위
스, 빈,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돌아왔다. 쇼
펜하우어는 여행 도중에 사색하며 많은 일기를
썼는데 진지한 고민이 많았다. 단치히에서 상인
실습을 시작했으나 무관심했다. 이 시기에는 아
버지의 서재에 드나들며 문학, 수학, 역사 등을
독학했다.
1805년(17세) 아버지가 창고 통풍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자살한 걸로 추정됨.
1806년(18세) 아버지 사망 후, 가족이 바이마르
로 이주했다. 쇼펜하우어만 함부르크에 남아서
상인 실습을 지속했다. 쇼펜하우어는 몰래 근무
지를 이탈하여 골상학으로 유명한 프란츠 요제
프 갈의 공개강연을 들으러 가기도 했고 아버지
의 희망대로 상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1807년(19세) 어머니의 권유로 상인 실습을 중단
한 후에 고타에 있는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라틴
어와 그리스어를 엄청난 열정으로 학습했다. 고
전어를 가르친 교사들은 쇼펜하우어가 미래에 뛰
어난 고전학자가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쇼펜하
우어는 1년도 못가 김나지움을 자퇴했다.


1808년(20세) 쇼펜하우어는 에르푸르트를 방문했
다. 마침 프랑스 황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국
제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어느 극
장에서 나폴레옹이 주최한 연극들이 공연되었는
데 쇼펜하우어는 관람할 기회를 얻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는 나폴레옹에게 욕설을 해대더니
연극이 끝난 후에는 나폴레옹에게 극찬을 해대느
라 호들갑떠는 여성관객들(지위 높은 귀족여성
들)을 쇼펜하우어는 신랄하게 비난했다.
1809년(21세)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함.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더 흥미
를 두었다. 대학에서 화학, 물리학, 천문학, 수
학, 언어학, 법학, 역사 등 여러 강의에 적극 참
여해서 공부함. 집에 돌아와서도 사색하며 꼼꼼
히 공부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학교의 몇몇
천박한 교수들의 강의보다도 이미 죽고없는 과거
의 위인들이 남긴 작품들이 더 가치있을 때가 많
다고 생각했다. 강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과
논평을 많이 썼으며 몇몇 교수들의 의견을 비판
하고 논리적으로 박살내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
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습득한 당대의 자연과
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철학적인 생각을 하는 것
을 자랑스러워했다.

1810년(22세) 철학자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
(Gottlob Ernst Schulze)의 강의를 들었다. 슐체
에게 특히 플라톤과 칸트를 깊이 연구해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스승 슐체의 진지한 조언은 쇼펜
하우어에게 큰 영향을 끼침.
1811년(23세) 어머니가 당시 독일 문학계의 거장
인 크리스토프 빌란트에게 쇼펜하우어가 철학 전
공을 못하도록 설득해줄 것을 부탁함. 78세인 빌
란트는 23세의 쇼펜하우어와 만나서 설득은커녕
쇼펜하우어의 태도에 감명받아 자상한 조언과 격
려를 해주었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철학
을 공부하기로 결심함. 가을에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했다. 베를린
대학에서는 동물학, 지리학, 천문학, 생리학, 시
학, 어류학, 식물학, 조류학 등 여러 강의를 들
음.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당대의 유
명 학자였던 셸링, 피히테의 사상을 공부했으나
회의를 품고 이들을 혐오하게 되었으며 후에 자
신의 저서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내었고 일기에
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특히 피히테에 대해서
는 "대중 앞에서 웅변을 토해내며 진지한 표정으
로 심오한 사상가인 척하는 사기꾼" 정도로 평가
했다. 반면에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 잘 통한 일
도 있었는데 바로 고전학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
트 볼프의 강의였다. 볼프가 주도하는 고대 그리
스 역사와 철학 강의에 쇼펜하우어는 존경심을
표했다.

1812년(24세) 플라톤, 임마누엘 칸트 등 여러 사
상가를 본격적으로 탐구함. 베이컨, 존 로크, 데
이비드 흄 등의 영국 사상가를 깊이 탐구함. 슐
라이어마허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지만 매우 실망
하고 말았다.
1813년(25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연
합군과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사이에 전쟁이 재
발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을 떠나서 루돌슈타
트에서 학위 논문인 <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
리에 관하여>를 완성했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기초가 되는 책이다. 이 논문을 예나의
튀링겐 주립대학교에 제출하여 철학 박사학위를
얻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에게 자신의 박사학
위 논문을 증정했다. 괴테는 이 논문을 보고나서
부터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지지하였다. 수개월
동안 괴테와 교제하며 색채론에 관해서 연구하
고 토론했고 괴테는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많이
해주었다. 괴테는 가끔 쇼펜하우어를 자기 집에
초대해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바
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아시아 관련 잡지를 읽
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1814년(26세) 바이마르의 공공도서관에서 <우파
니샤드>의 라틴어 번역본 <우프네카트>를 읽고
탐구했다. 어머니와 쇼펜하우어는 심각한 갈등
을 겪었고 이 일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
나 편지교류는 가끔했다.
1816년(28세) 괴테와 색채론에 관해 교류하여 얻
은 결실인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가 발표되었
다. 이 논문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실험을 토
대로 뉴턴의 색채론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판하기
도 했다. 괴테는 제자에게 비판받은 이 일을 베
를린의 친구 슐츠에게 편지로 알렸고 약간 언짢
았으나 쇼펜하우어를 대견스러워했다.

1818년(30세) 일생의 역작 <의지와 표상으로서
의 세계>를 완성했다. 자신의 책이 역사적 의의
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던 쇼펜하우어는 1년 동
안 100권밖에 팔리지 않자 자신의 책을 몰라보
고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동시대 교수들에 대
한 증오심이 차올랐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며
느리(오틸리에)와 친분이 있던 자기 여동생의 편
지를 통해 괴테가 이 책을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직접적으로
칭찬하지는 않았다. 책 출판을 기념삼아 이탈리
아로 여행했다. 1819년 봄에는 나폴리를 방문했
다. 나폴리에서는 영국 청년들과 교류했다. 쇼펜
하우어는 영국을 평생 동안 동경했으며 영국인들
조차 쇼펜하우어가 영국인인 줄 알 정도로 완벽
한 영어발음을 구사했다. 어머니가 파산위기에
처하자 속히 귀국하여 도와주웠으나 어머니는 쇼
펜하우어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낭패를 겪고 말았다.
1819년(31세) 베를린대학교 (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강사직을 지원했다. 헤겔의 강의 시간
과 같은 시간에 강의할 것을 희망했다.

1820년(32세) 채용 여부가 결정되는 시범 강의에
서 통과함. 당시 50살이었던 노련한 헤겔이 쇼펜
하우어와 강의 중에 약간 논쟁했다. 강의 계획
은 1820~1822, 1826~1831년까지 수립돼 있었지
만 인기가 없어서 한 학기만에 끝남. 이후 쇼펜
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
은 강단학자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고 몽상적인
이론을 퍼트려서 대중을 속여먹는 저열한 사기
꾼, 대중들의 두뇌를 해치는 넌센스 삼류작
가, '철저히 무능하고 간사한 대학교수 패거
리'의 두목이라며 비난했다. 예를 들면 쇼펜하우
어는 자기 책에서 독일 젊은이들과 자기 세대 사
람들이 헤겔의 이론을 공부하느라 두뇌를 손상시
켰고 인생을 허비했다며 매우 한탄하고 있다. 더
군다나 헤겔의 이론은 당대의 지배이념으로 군림
하며 정치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결국 쇼펜하
우어는 철학이라는 것을 대학교에서 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고 여겼고 교수들의 파벌
자체를 증오했다.

1822년(34세)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이탈리아의
문화, 예술, 환경을 경험하고 이에 대해서 배우
고 기록했다.
1823년(35세) 여행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옴. 여
러 질병과 청각장애를 겪었는데 가장 울적한 시
기를 보냈다. 뮌헨에서 겨울을 보냈다.
1824년(36세) 가슈타인(스위스), 만하임, 드레스
덴에서 체류함. 쇼펜하우어는 "멀쩡히 잘 걷는다
는 사실만으로 나와 수준이 대등하다고 여기는
인간들과 가급적 사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일
기에 쓰며 고독한 심정을 드러냈다. 겨울에 데이
비드 흄의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등을 번역할 계획이었으나 도와줄 출판사
를 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
의 세계>에 대한 악평이 좀 나오기도 했으나 작
가 장 파울은 호평했다.

1825년(37세) 베를린으로 돌아와 우울한 나날 속
에서 스페인어를 열심히 학습해나갔다. 번역가로
서 스페인어책을 번역하기도 함. 언어능력만큼
은 나날이 좋아졌는데 예전에 익힌 그리스어, 라
틴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외에 스페인
어에도 매우 익숙해졌다.

1831년(43세) 이 해에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
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1833년(45세)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정착함. 유
행이 지난 옷을 항상 입고 다녔으며 애완견을 데
리고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했고 혼잣말로 이상
한 소리를 하기도 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민들의
희한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저서가 사
람들의 관심을 받고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 쇼펜
하우어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쯤에 쇼펜하
우어는 여동생과 어머니와 편지교류를 했고 작품
활동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
는 편지를 보냈다.

1835년(47세)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세상을 떠난
괴테를 위해 기념비 건립 계획을 세웠다. 쇼펜하
우어는 당국에 괴테 기념비에 관한 건의서를 제
출했다. 인류를 위해 온몸으로 활동한 정치인
들, 군인들, 개혁자들같은 위인들을 기념하려면
전신상으로 해야하지만 머리를 써서 기여한 문학
가, 철학자, 과학자들을 기념하려면 흉상을 제작
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 의견
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완성된 괴테의 전신상
기념비는 매우 볼품없었고 훗날 미술사학자 프란
츠는 이 기념비에 대해 '국가적 재앙'이라는 혹
평을 내렸다.

1836년(48세) 자연과학이 증명해낸 것과 자신의
학설이 일치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출판. 매우 꾸준히 학문에 매
진했다.
1837년(49세) 쇼펜하우어는 <순수이성비판> A판
(1판)을 B(2판)판보다 중시하여 칸트전집 출판
에 개입했다. 칸트전집 출판에 관여한 로젠크란
츠 교수는 쇼펜하우어의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1
판 원고를 실어 출판했다.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
의 현상논문 모집에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8년(50세) 모친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72살의
나이로 사망함.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논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하기로 결정함.
1839년(51세) 현상논문 <인간의지의 자유에 관하
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수상함.
1840년(52세) 현상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를 가지고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 단독으로 지원
했지만, 학술원은 '이 시대의 대단한 철학자
들'인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등의 이유
로 부당한 판정을 했고 수상하지 못함. 이후 쇼
펜하우어는 '하찮은 판정'이라 취급했고 이 판정
에 반론하는 글을 추가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헤
겔을 심각하게 비난한 것은 인정하지만 헤겔
이 '대단한' 철학자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
고 주장했다.

1841년(53세) 두 현상논문을 묶어서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를 출판함.
1842년(54세) 여동생 아델레를 20년만에 만남.
1844년(56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판
이 완성됨. 제1판의 재판과 함께 출판함.
1845년(57세)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쓰기 시작함.
1846년(58세)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가 쇼펜하
우어를 만나 제자로 지냈는데 이 사람은 쇼펜하
우어의 열혈 추종자다. 특히 법조인들이 열혈팬
이 되었는데 이들은 <관념론의 잘못된 근거>
에 "세계가 후회의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번 쇼
펜하우어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올 것"라고 썼다.
쇼펜하우어는 판사 요하네스 베카라는 사람이 자
신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나 그것을 글로
쓰지 않았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냄.
1847년(59세)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
하여>의 개정판을 출간. 이 책에서 번역을 비판
하며 가급적 해설서도 참고하지말고 그 나라 언
어를 배워서 원서를 볼 것을 강조한다.
1849년(61세)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남. 여동
생 아델레가 사망함.

1851년(63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부
록'이라 할 수 있는 <여록과 보유>(Parerga und
Paralipomena)를 수 년간 집필한 끝에 출간함.
출판사의 암울한 예상과는 달리 이 작품은 얼마
못가 쇼펜하우어의 책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
었고 많이 팔려나갔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1853년(65세) 영국의 독일어책 번역가인 존 옥센
포드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웨스트 민스터 리
뷰'에 소개하여 최초로 영국에 쇼펜하우어를 알
림. 독일의 여성 언론인 린트나가 이를 다시 독
일어로 번역하여 베를린의 포스신문에 발표하였다
.
1854년(66세)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개정
판을 출간. 이 책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헤
겔의 '교수 파벌' 때문에 독일 철학계가 오염되
었다고 엄청난 비판을 하며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려는 것은 인생낭비에 불과하니 자신의 사상
과 칸트의 사상을 공부하라는 충고를 한다. 이
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 40여년 간
독일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기극을
사람들이 눈치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칸트 이후에 등장한 간사한 사기꾼들이 써낸 철
학서적들과 한심한 논쟁들을 통해 하나의 진리라
도 밝혀졌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하찮은 철학교수라 불렀던 셸링이 사망했
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니벨룽
겐의 반지'의 헌정본을 보냈다. 쇼펜하우어가 바
그너를 알게 됨.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에게 혹평
을 받고 냉대받았으나 개의치않고 기뻐했다.
1855년(67세)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과가 '쇼펜
하우어 철학 원리에 대한 해명과 비판'이라는 현
상 과제를 제시함. 여러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 관련 강의가 개설되기 시작함.

1857년(69세)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가 본대학
교와 브레슬라우대학교에 개설됨. 쇼펜하우어의
몇몇 책이 영국, 프랑스에 번역됨. 쇼펜하우어
는 이 시절의 심정을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했
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
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
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프리드
리히 니체는 1888년에 이 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
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
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 프랑크푸르트의 어
느 박람회를 구경했다. 유럽에는 매우 드문 오랑
우탄 한 마리가 전시되었다. 자주 찾아가서 관찰
했으나 관찰할 기회를 너무 늦게 만났다며 한탄
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오랑우탄
을 볼 기회를 꼭 잡으라고 촉구했다.
1858년(70세) 쇼펜하우어 70살 생일 파티가 열렸
고 신문 기사에도 생일파티 소식이 실렸다. 유
럽 각지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
이 찾아왔다. 베를린 왕립학술원에서 쇼펜하우어
를 뒤늦게 회원으로 추대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
어는 나이가 많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1859년(71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
이 출간됨.
1860년(72세) 9월 21일 금요일 아침, 폐렴 증상
을 겪었고 프랑크푸르트 자택에서 사망했다.


[영향]
쇼펜하우어는 철학분야 보다도 그 외의 과학분
야, 예술분야에 더욱 큰 영향을 끼쳤다. 1852년
에 영국의 존 옥센포드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
터 리뷰> 4월호에 쇼펜하우어 사상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존 옥센포드는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 등을 영어로 번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이후 영국에 쇼펜하우어가 알려졌고, 영국의
토마스 칼라일, 찰스 다윈같은 영어권 지식인들
이 쇼펜하우어를 탐구했다. 쇼펜하우어가 노년기
에 읽은 글 중에는 <타임스>에 실린 <종의 기원>
에 관한 서평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다비트
아셔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글을 써서 쇼펜하우어
를 감동시켰다. 아셔는 쇼펜하우어와 편지교환
을 자주 했는데 쇼펜하우어로부터 30여통의 편지
를 받았다. 아셔는 <쇼펜하우어와 다윈주의>라
는 논고도 발표했었다. 찰스 다윈은 이 논고를
읽다가 아셔가 인용한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자신의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 인용하기
도 했다. 다비트 아셔는 쇼펜하우어가 주장
한 '의지'이론과 유사한 다윈의 '자연선택' 등
의 개념이 결국엔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
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투어'는 영어로는 '아서'(Arthur)가 되는
데 이것은 사업가였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아들을 사업가로 키우고자 영국친화적인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에까지 전파되어 고독
한 생활을 추구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나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신의 저서에 쇼펜하우어의
글을 인용했고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틀에 박힌
것을 혐오하는 개성이 중요하다고 강변했고
에머슨은 불교와 우파니샤드에 관심이 많아졌다.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는 자신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1859년에 나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게 무관심했으므로 바그너
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1854년에 친구이자 시인인 게오르그 헤르
베크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들고
바그너를 찾아갔다. 헤르베크는 바그너에게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추천해주었
다. 바그너는 이것을 한 번 읽었고 감동받았다.
바그너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1년 동안
4번이나 통독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 니벨룽겐의 반지와 '존경
하는 마음과 함께'라는 자필 헌사를 보냈으나
쇼펜하우어는 어떤 답장도 바그너에게 보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의 작품인 방황하
는 네덜란드인을 바그너와 함께 관람한 적도 있
는데 쇼펜하우어는 흥미를 잃고 말았다. 쇼펜하
우어는 바그너에 대해서 '바그너는 음악이 뭔지
잘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이
후로도 평생 동안 쇼펜하우어를 존경했다.


쇼펜하우어 찬미자였던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에두아르트 하르트만은 자신의 저서 <무의식의
철학>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심리학적인 주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
의 기초에 해당하는 '억압'에 대해서 자신보다
먼저 쇼펜하우어가 잘 설명했다는 것을 인정했
다. 근대 심리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선사했으며
심리학이 정식 학문으로서 자리잡기 전에 심리학
적인 주장을 철학서적에서 펼쳤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해한
라부아지에의 작업이 화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면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분석되기 어려웠던 "자아
혹은 영혼"이라 불리는 것을 이질적인 두 가지
성분[의지와 지성]으로 분해하는 작업은 철학의
발전에 기여한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융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헤겔의 거만한 문체보다
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탐구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헤겔은 난해하고 거만한 문체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노골적인 불신감으로 헤겔을 대했다
헤겔은 마치 자신의 언어구조 속에 갇혀 그 감옥
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
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탐구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
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처
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
은 이것을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다."
— 카를 융 자서전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
야는 문학계일 것이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톨스
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그리고 독일
작가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영미권 작가인 토마스 하디, 조지프 콘래드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창작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보면 불교적 색채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사상
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쇼펜하우
어의 이름이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와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의 소설에서 나타나기
도 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는 자서
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자세히 읽어나갔고 자주 읽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주의를 뺏지 못할 정도
로 집중해서 읽었다. 스피노자나 니체같은 철학
자들의 책도 읽었다. 내가 철학에 빠진 계기는
쇼펜하우어 덕분이며 오로지 쇼펜하우어 덕분이
었다. 쇼펜하우어보다 헤겔을 더 좋아하는 인간
이 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톨스토이는 유일하게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를 탈고하기 직전인 1869년 여름
에 자신의 친구이자 쇼펜하우어 책을 번역한
아파나시 페트(본명:페트 센신)에게 다음과 같
은 편지를 보냈다.

"이번 여름에 내가 뭘 했는지 알고계십니까?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강력한 기쁨을,
여태껏 한 번도 몰랐던 감동을 만끽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책을 모조리 구해서
읽었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강의
를 수강한 여느 학생도 내가 이번 여름에 발견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지 못했으
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앞으로 나의 이런 의견
이 언제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쇼펜하
우어야말로 모든 인간들 중에 위대한 천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당신은 쇼펜하우어
가 철학적 주제들을 다룬 무언가를 썼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것은 경이롭고
도 생생하게 성찰되는 온전한 세계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쇼펜하우어의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함께 번역에 참여하시겠습니
까? 쇼펜하우어의 책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세상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 이유란 아마
도, 쇼펜하우어가 토로했듯이 세계에는 하찮은
인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단편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모파상,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영국의 윌리엄 서머싯 몸, 아르헨
티나의 보르헤스 등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
다. 문학가들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20세
기에도 지속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희곡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이후
에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은 조지 버나드 쇼, 루이
지 피란델로, 사무엘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에
서 나타나기도 했다. 예술 분야에서 이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는 철학자는 별로 없다. 예술, 예
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칼 마르크스조차
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당연히 쇼펜하
우어는 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
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는 쇼펜하우
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쇼펜하우
어를 평가한다.

"오늘날 문화가 이토록 천박하지고 황폐해지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
을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비옥하고 건강한 토양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도처에는 먼지와 모래뿐
이니 모든 것은 마비되고 탈진해서 죽어간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 한 자락 둘데 없이 고독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상징은 뒤러
가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죽음과 악마와
동행하는 무장 기사'이다. 무쇠처럼 굳센 눈빛
과 철갑옷으로 무장한 이 기사는 자신의 끔찍한
동행자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희망도 품지
않으면서 자신의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르는
개와 함께 험난한 길을 혼자서 고독하게 걸을
줄 안다. 뒤러가 묘사한 이 기사가 바로 우리의
쇼펜하우어와 같다. 그는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했다."

20세기 전반부에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
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했다.

독일 철학자 파울 도이센(Paul Deussen)은 프리
드리히 니체의 친구로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
은 쇼펜하우어 전집 출판에 힘을 썼고,
쇼펜하우어학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인도철학과
우파니샤드에 대한 연구자로서 큰 평가를 받고
있다. 도이젠은 직접 인도로 여행을 갔고 이에
대한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도이젠은 플라
톤, 칸트, 인도철학, 쇼펜하우어에 대한 저서를
남겼고 학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했다.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 속하는 19세기 전반
에 쇼펜하우어는 무시 당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에는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 있는 철학자
가 되었다. 20세기 전반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
이 난해하다고 무시되기도 했고, 일부 철학 교사
들조차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탐구하려 하지 않았
다. 그러나 오늘날 쇼펜하우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20세기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에게 명백
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례적으로 국가주의에
얽매이지 않았고 독일의 작가들을 훤히 잘 알았
던 만큼이나 영국과 프랑스의 작가들에 대해서
도 능통했다. 여타 철학자들보다도 믿음직한
철학을 추구한 예술가와 문학가들에게 쇼펜하우
어가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철학을 전개했
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비록 의지를 메타자연
학의 토대로 삼았어도 윤리적으로는 악으로 간주
했다. 그렇게 악한 의지는 염세주의자에게는
적대적인 것을 수밖에 없었다. (중략) 쇼펜하우
어의 의지 이론은 많은 철학자들에게 수용되었는
데 특히 독일의 니체나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 미국 심리학
자 윌리엄 제임스 등에게 적극적으로 수용되었
다. 루소와 칸트가 그와 유사한 의지이론을 준비
했지만 그토록 순수한 의지이론을 가장 먼저 설
파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였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
쇼펜하우어와 찰스 다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고 회고했다. 칼 포퍼는 에르빈 슈뢰딩거를 언급
하기도 하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수용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책 이름을 짓는 일에 쇼펜하우
어가 지은 이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자신의 아버지 서재에는 웬만한 철학
서적은 대부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
게 여러 책을 읽다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만났는데 칸트의 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쇼펜하우어의 여러 저서들
을 읽었고 그 덕분에 칸트의 책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
는 책은 자신이 태어나서 최초로 진지하게 읽고
공부한 두꺼운 철학서적이라고 말했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독일어: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철학 주저다.

독일 관념론의 한 전제에서 출발하면서도 '이
성'에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 쇼펜하우어의 철학
은 그가 자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강단철학(講壇哲學)으로부터 전적으로
무시당했는데 이 책의 부록격인 《여록과 보유》
(한국에서 인생론이라 알려진 책)를 통해 '선각
자(先覺者)'로서 재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내용]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명제로 시작되는
데, 인식론적으로는 칸트의 주관주의를 계승한
다. 사물은 그것이 우리에게 현상(現象)하는
한에서만 인식된다. 때문에 "세계는 나의 표상이
다"라는 것 이상으로 확실한 진리는 없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단순화하여
여러가지 인식 형식을 오직 한가지 인과율(因果
律)의 범주로 환원하였다. 모두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현상이요, 그 현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어 인과율에 지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무엇인가 본질적인 것,
현상 이상인 것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는 꿈이나 환상과 같이 알맹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 본질의 인식은 우리들의
신체를 통하여 비로소 가능하다. 결국 우리들은
한편으로 인식의 주관(主觀)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하나의 수수께끼를 가지는 것이며 의지
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의지와 신체 관계는
인과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적인 것이며, 따라서
신체는 의지의 객관태(客觀態), 즉 객관화된
의지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에 적용된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의 곳곳에서 힘으로 작용하
고 있는 것은 외견상으로는 아무리 다르다고
하더라도 원리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원인도 없고 목적도 없
다. 의지의 개별적인 작용에는 원인과 목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근원적인 의지는 인과율의
밖에 선 '존재에의 무의식적 충동'이며 '살려고
하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마음의 편안함을 얻으려고 한다면 이러한
의지에서 자유로워져 이데아를 관조(觀照)해야
하는데, 이것은 미적 태도의 본질로 예술적 및
철학적 천재만이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 중에서도 특히 음악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이 미적 해탈(解脫)은 아직도 시
간 제약을 받아서 불충분한 것이다. 세계는 근원
적으로 악(惡)이기 때문에 어떠한 노력으로써도
향락은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염세적인 체념과,
모든 물질은 근본에 있어서 하나라고 하는 긍정
으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는 열반(涅槃)의 경지에
서 비로소 참다운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주요 개념]
[의지]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의지"(독일어: Wille)
란 개념은, 일반적인 의미의 뜻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다른 맹목적인 감성인, "욕망", "갈구
함", "추구", "노력", "고집" 까지 포괄하는 개
념이다.

[표상]
"표상"(독일어: Vorstellung) 이란 단어는,
영국 경험주의-칸트 등이 쓰고 있는 용어로서,
마음 밖에 있는 어떤 물체나 대상에 대해 가지
는 심상(Sensory Image)을 표현하는 말이다.
표상에는 신체가 포함된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마
다 가진 자기 자신의 몸을 "직접적 대상" 이라
고 불렀는데, 이는 뇌가 마음이 깃든 자리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생의 의지를 부정하여
인식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삶을 영위하라고
충고했다.
------------------------------------------
《여록과 보유》(Parerga and Paralipomena)는
쇼펜하우어가 1851년에 출판한 책이다.

두 권으로 된 이 철학적 수상집은 직관과 인상
(印象)이 분방 약동하는 그의 나이 30세 때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주석이
다. 1844년부터 6년간에 걸쳐 씌어진 것이었지
만 당시 불우하여 무명(無名)에 가깝던 그는
그것을 출판해 줄 출판사를 찾는 데 애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출판되자
국내외에서 점차 주목을 끌게 되어 1854년에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대악극(大樂劇) 《니벨룽겐
의 반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바쳤고,

70세의 탄생일에는 유럽 각국에서 축사가
쇄도하게 되었다.

인생과 자연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박식하고(괴
테도 탄복했다고 한다), 더욱이 신랄한 기지와
풍자에 넘친 명쾌한 서술은 읽는 사람의 흥미를
끌 뿐만 아니라 마음의 바닥까지 흔들어서 온갖
편견을 타파해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우에 1848년 3월 혁명의
좌절에 의하여, 이상과 노력의 대상(代償)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당시 유럽 지식인의
갈 곳 없는 심정을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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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Schopenhauer

[Born] 22 February 1788
Danzig

[Died] 21 September 1860 (aged 72)
Frankfurt, German Confederation

[Residence] Danzig, Hamburg, Frankfurt

[Nationality] German

[Education]
Gymnasium illustre zu Gotha (de)

[Alma mater]
University of Gottingen
University of Jena (PhD, 1813)

[Era] 19th-century philosophy

[Region] Western philosophy

[School]
Antinatalism
Post-Kantian philosophy
German Idealism
Transcendental idealism
Metaphysical voluntarism
Philosophical pessimism

[Institutions] University of Berlin

[Main interests]
Metaphysics, aesthetics, ethics, morality,
psychology

[Notable ideas]
Will, fourfold root of reason, hedgehog's
dilemma, philosophical pessimism

Arthur Schopenhauer
(22 February 1788 – 21 September 1860) was a
German philosopher. He is best known for his
1818 work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expanded in 1844), wherein
he characterizes the phenomenal world as the
product of a blind and insatiable
metaphysical will. Proceeding from the
transcendental idealism of Immanuel Kant,
Schopenhauer developed an atheistic
metaphysical and ethical system that has
been described as an exemplary manifestation
of philosophical pessimism, rejecting the
contemporaneous post-Kantian philosophies of
German idealism. Schopenhauer was among the
first thinkers in Western philosophy to
share and affirm significant tenets of
Eastern philosophy (e.g., asceticism, the
world-as-appearance), having initially
arrived at similar conclusions as the result
of his own philosophical work.

Though his work failed to garner substantial
attention during his life, Schopenhauer has
had a posthumous impact across various
disciplines, including philosophy,
literature, and science. His writing on
aesthetics, morality, and psychology would
exert important influence on thinkers and
artists throughout the 19th and 20th
centuries. Those who have cited his
influence include Friedrich Nietzsche,
Richard Wagner, Leo Tolstoy, Ludwig
Wittgenstein, Erwin Schrodinger, Otto Rank,
Gustav Mahler, Joseph Campbell, Albert
Einstein, Carl Jung, Thomas Mann, Emile
Zola, Guy de Maupassant, Jorge Luis Borges
and Samuel Beckett, among others. (A
thinker who was widely believed to have been
influenced by Schopenhauer, but denied it,
was George Bernard Shaw.)
----------------------------------------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German: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s the central work of the German
philosopher Arthur Schopenhauer. The first
edition was published in 1818/19, the second
expanded edition in 1844, and the third
expanded edition in 1859. In 1948, an
abridged version was edited by Thomas Mann.

[Will]
Schopenhauer used the word "will" as a
human's most familiar designation for the
concept that can also be signified by other
words such as "desire," "striving," "wanting," "effort,"
and "urging."

Schopenhauer's philosophy holds that all
nature, including man, is the expression of
an insatiable will to life. It is through
the will that mankind finds all their
suffering. Desire for more is what causes
this suffering. He argues that only
aesthetic pleasure creates momentary escape
from the Will. Although the concept of
desire may be influenced by Buddhist
teachings, it should not be treated as
direct reference since desire is not thought
to be the fundamental nature of human beings
in Buddhism.

[English translations]
In the English language, this work is known
under three different titles. Although
English publications about Schopenhauer
played a role in the recognition of his fame
as a philosopher in later life (1851 until
his death in 1860) and a three volume
translation by R. B. Haldane and J. Kemp,
titled The World as Will and Idea, appeared
already in 1883–1886, the first English
translation of the expanded edition of this
work under this title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appeared by E. F. J. Payne
(who also translated several other works of
Schopenhauer) as late as in 1958 (paperback
editions in 1966 and 1969). A later English
translation by Richard E. Aquila in
collaboration with David Carus is titled The
World as Will and Presentation (2008).

Present day translator Richard Aquila argues
that the reader will not grasp the details
of the philosophy of Schopenhauer properly
without this new title: "The World as Will
and Presentation." According to
him, "Idea," "Representation,"
and "Presentation" are all acceptable
renderings of the word Vorstellung, but it
is the notion of a performance or a
theatrical presentation that is key in his
interpretation. The world that we perceive
is a "presentation" of objects in the
theatre of our own mind; the observers,
the "subject," each craft the show with
their own stage managers, stagehands, sets,
lighting, code of dress, pay scale, etc. The
other aspect of the world, the Will,
or "thing in itself," which is not
perceivable as a presentation, exists
outside time, space, and causality. Aquila
claims to make these distinctions as
linguistically precise as possible.

(form 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wikipedia.org)


Berlin, Buddhism, influence~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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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 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 (한국.net 사례기반) - 김영복 저, 실습 사이트: w3schoo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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