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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가니니-Niccolo Paganini,작곡가,Violinist,Italy


[출생-사망] 1782년 10월 27일~1840년 5월 27일 (57세)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년 10월 27일~1840년 5월 27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이다.

[주요작품]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D장조 Op.6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라 캄파넬라」 b단조 Op.7
바이올린 협주곡 제3번 E장조
24개의 카프리치오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
나,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웠으며,
9세 때 공개 무대에서 자작의 캄파넬라 변주곡
을 연주했다. 13세 때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방을 연주 여행했으며, 파르마에서 롤라에게
사사했는데, 쉽게 스승을 능가하는 실력이어서
그 후에는 혼자 이탈리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명성을 높였다. 1828년 이후 빈, 베를린, 런던,
파리 등지를 여행하며, 그 천재다운 솜씨로 유
럽 일대를 놀라게 했다. 그는 많은 재산을 활 하
나로써 거두어 들였으며, 한편 베를리오즈가 빈
궁하다는 것을 알자 많은 액수의 돈을 보내어 연
주회의 적자를 메우게 하는 등 자비의 소유자이
기도 했는데, 1840년 5월 27일에 니스에서 타계했다.



소나타 21개 · 카프리치오 24개 · 4중주곡 3
개 · 협주곡 2개 등 많은 명곡이 남아 있는데,
특히 그 중의 카푸리치오는 가장 애주되고 있는
명곡이다. 그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프랑스
혁명의 여파를 받아 감옥생활을 했을 때 파가니
니는 사랑하는 바이올린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으
며 있었는데, 줄이 습기로 썩어서 한 줄만 남게
되었다. 간수에게 부탁했으나 줄은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시간이 지나자 유연한 소리
가 나기 시작했다. 이상히 여긴 간수가 가서 보
니 파가니니는 한 줄로 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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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
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
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
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
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
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
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 동안 연주회
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
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은 이 기간
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
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해
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
이 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
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
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
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
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
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
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
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
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
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
·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해 1829년 베를린
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
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
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
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만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
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
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
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
가 자기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
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
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
리에서 만나 자신의 비올라를 위한 비올라 협주
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
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
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좋지
않아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일생을 마쳤다.



[파가니니의 악기 연주기법]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
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
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
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
서 휘바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
릴 (떨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있고 '악
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
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
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
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
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
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
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
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
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
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
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
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
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
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
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
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
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바이올린 한 줄로만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모습
을 풍자한 삽화(1810년경) 왜 이런 헛소문이 그
토록 기세를 떨쳤던 것일까? ‘마법’이나 ‘악
마’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듯한 파가니
니의 실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
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
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당시의 언론
도 선정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 소문의 전파를
부추겼다. 나중에는 파가니니 본인이 해명에 나
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른트 비테의 말마따나
“소문이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파가니니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리라.



[평가]
작곡가서도 파가니니는 알려져있다. 작품에서 그
가 항상 사용한 중음주법, 프라지오레토, 스타카
토와 레가토의 극단적인 대비, 왼손으로 연주하
는 피치카토 등은 바이올린의 표현력을 한 층 빛
나는 것으로 높였다. 대표작으로는 <바이올린 협
주곡 제1번>, 무반주 <24의 카프리치오>를 들 수
가 있다. 파가니니의 초절적인 기교에 자극된 19
세기의 작곡가들, 예컨대 리스트, 브람스, 라흐
마니노프 등은 파가니니의 멜로디를 차용하여 많
은 피아노 난곡(難曲)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기교를 피아노로 전용하여 피아노의 새
로운 표현을 개척해야겠다는 의욕이 환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리어 이런 점에 파가니니
의 작곡가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이 있었다 하겠다.



==========================================

Niccolo (or Nicolo) Paganini
(27 October 1782 ~ 27 May 1840) was an Italian
violinist, violist, guitarist, and composer.
He was the most celebrated violin virtuoso
of his time, and left his mark as one of the
pillars of modern violin technique.
His 24 Caprices for Solo Violin Op. 1 are
among the best known of his compositions,
and have served as an inspiration
for many prominent composers.

[Biography]
[Childhood]
Niccolo Paganini was born in Genoa,
then capital of the Republic of Genoa, the
third of the six children of Antonio and
Teresa (nee Bocciardo) Paganini.
Paganini's father was an unsuccessful
trader, but he managed to supplement his
income through playing music on the
mandolin. At the age of five, Paganini
started learning the mandolin from his
father, and moved to the violin by the age
of seven. His musical talents were quickly
recognized, earning him numerous scholarships
for violin lessons.

The young Paganini studied under various local
violinists, including Giovanni Servetto and
Giacomo Costa, but his progress quickly
outpaced their abilities. Paganini and his
father then traveled to Parma to seek
further guidance from Alessandro Rolla. But
upon listening to Paganini's playing, Rolla
immediately referred him to his own teacher,
Ferdinando Paer and, later, Paer's own
teacher, Gasparo Ghiretti. Though Paganini
did not stay long with Paer or Ghiretti, the
two had considerable influence on
his composition style.

[Early career]
The French invaded northern Italy in March
1796, and Genoa was not spared. The
Paganinis sought refuge in their country
property in Romairone, near Bolzaneto. It
was in this period that Paganini is thought
to have developed his relationship with the
guitar. He became rather adept on this
instrument, but preferred to play it in
exclusively intimate, rather than public concerts.

He later described the guitar as
his "constant companion" on his concert
tours. By 1800, Paganini and his father
traveled to Livorno, where Paganini played
in concerts and his father resumed his
maritime work. In 1801, the 18-year-old
Paganini was appointed first violin of the
Republic of Lucca, but a substantial portion
of his income came from freelancing. His
fame as a violinist was matched only by his
reputation as a gambler and womanizer.

In 1805, Lucca was annexed by Napoleonic
France, and the region was ceded to
Napoleon's sister, Elisa Baciocchi. Paganini
became a violinist for the Baciocchi court,
while giving private lessons to Elisa's
husband, Felice. In 1807, Baciocchi became
the Grand Duchess of Tuscany and her court
was transferred to Florence. Paganini was
part of the entourage, but, towards the end
of 1809, he left Baciocchi to resume his
freelance career.
(.... omitted .....)

(from 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wikipedia.org)


not D (Devil), a Composer, Caprices inspired(+) Composers~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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