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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Moliere, 배우, 극작가, Actor, France
몰리에르 (Moliere, Jean Baptiste Poquelin)
배우, 극작가



[출생-사망] 1622년 1월 15일, 프랑스 ~
1673년 2월 17일 (51세)

[요약] 17세기 프랑스의 극작가·배우.
《타르튀프》,《동 쥐앙(돈 후안)》과 최고작
《인간 혐오자》등 성격희극으로 유명하다.
이는 프랑스, 이탈리아의 희극에 뿌리 내리고 있다.
인간을 모랄리스트적으로 고찰한 함축성 있는 희극을 이루었다.

한국.net

[본명]
장 밥티스트 포클랭(Jean Baptiste Poquelin)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작품]
《스가나레르》(1660) 《남편학교》(1661)
《인간 혐오자》(1666)



본명은 장 밥티스트 포클랭(Jean Baptiste Poquelin).
파리 출생. 예수회의 클레르몽학원에서 배우고
오를레앙대학에서 법학사의 학위를 받았으나,
이 무렵부터 연극에 열중하여 마드렌 베자르 집안의
형제 ·자매들과 ‘성명극단(盛名劇團)’을 결성하였다.

1644년 1월에 처녀공연을 하였으나 관객유치에
실패, 빚이 늘어나 채권자의 고소로 투옥될 처지에까지 몰려,
파리를 떠난 후 1613년 동안 남프랑스의 여러 곳을 순회하였다.
1653년 무렵부터 본거지를 리옹에 두고 극작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쓴 것은 줄거리만 있고 대본 없는 희극이라고 여겨진다.
이어 이탈리아 번안 희극 두 작품을 만들어 남프랑스 지방에서
명성을 얻어 왕제(王弟)가 비호하는 극단의 타이틀을 얻고,
1658년 파리로 돌아와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하자
그의 마음에 들어 왕실 소유의 프티 부르봉 극장의
사용을 허락받았다.



1659년 희극 《웃음거리 재녀(才女)들》로 성공하여
파리에서 발판을 굳혔다. 이어 《스가나레르》(1660)
《남편학교》(1661) 《여인학교》(1662) 등으로
더욱 명성을 떨쳤으나, 경쟁 상대인 부르고뉴 극장의
질투와 그가 비웃은 귀족사교계의 반감을 사서
프티 부르봉 극장을 쫓겨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후원으로 역시 왕실소유인
팔레 루아얄 극장의 사용을 허락받고 자주 궁정에도
초청되어 연극을 하였다.



1664년 베르사유궁에서 향연이 있었을 때 위선자를 풍자한
《타르튀프》를 상연하여 교회 신자들의 노여움을 사서
시중에서의 공연은 중지당하였다.
그래서 급히 《동 쥐앙(돈 후안)》(1665)을 써서
공연하였으나 이것도 대담한 희극이었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뜻에 따라 15회 공연 후에 자발적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이 14세는 그 보상으로 그를 ‘국왕 전속극단’으로 하여
1만 5,000리브르의 연금을 주었다.
1666년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 혐오자 Le Misanthrope》를 발표하였으나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그 후 《마음에도 없이 의사가 되어》(1666)와
모두 1668년에 발표된 《앙피트리온》 《조르주 당댕》
《수전노》 등을 썼으나, 1669년 《타르튀프》의 공개가
허용되어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 후 《평민귀족》(1670) 《스카팽의 간계》
(1671) 《여학자들》(1672) 등을 썼으나, 1673년 2월
《상상으로 앓는 사나이》를 상연하던 중 무대에서
기분이 언짢다며 연극이 끝난 후 자택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밤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1662년 같은 극단의 여배우로서 20세나 손아래인
아르망드 베자르(처음의 애인이던 마드렌 베자르의 동생
또는 딸이라는 설도 있다)와 결혼하였다.
가정생활은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바쁜 생활로 건강도 해쳐, 한때 교외에서 별거를 하였으나
만년에는 화해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1막 또는 3막 희극, 5막의 성격희극(性格喜劇),
줄거리의 재미를 위주로 한 갈등희극,
궁정 오락용 전원희극 등 여러 가지 것이 있으나,
그의 본령(本領)은 《타르튀프》 《동 쥐앙》
《인간 혐오자》 《수전노》 《여학자들》 등의
성격희극에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성격희극은 프랑스의 희극,
이탈리아의 희극(코메디아 델 아르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성격희극이란 것은 나면서부터
그 어떤 괴팍한 성격을 가진 인물을 그린 희극이 아니다.
몰리에르가 그린 성격은 당시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어느 특정한 폐단을 집약한 상징적인 인물로서,
그는 《타르튀프》 《동 쥐앙》 《세리멘》 등을 통해서
17세기 프랑스의 상류사회에 파고든 가짜 신앙,
대귀족들의 퇴폐상, 경박한 사교생활 등과 같은 것을
착실한 시민의 양식(良識)으로 비판적으로 그렸다.

더욱이 그는 이들 인물의 표면에 나타난 풍속뿐만 아니라,
그 심리까지 깊이 파고 들었기 때문에, 그것은 가벼운
풍속극이 아니라 인간을 모랄리스트적으로 고찰한
함축성 있는 희극을 이루었다.
이리하여 풍속이 전혀 변해버린 오늘날에도
그의 희극이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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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Moliere, 1622년 1월 15일 ~
1673년 2월 17일),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작가이다. 본명은 장바티스트 포클랭(Jean-
Baptiste Poquelin)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초기]
1622년 1월 15일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난
몰리에르의 본명은 장바티스트 포클랭(Jean-
Baptiste Poquelin)이다. 궁정 어용 옥내 장식가의 집에서
태어나 일찍이 모친을 잃었다.
대표적인 몰리에르 전기 작가 그리마레에 따르면 소년기의
장 바티스트는 당시 파리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클레르몽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으며 에피쿠로스 철학에
동조하는 가상디(Gassendi)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가업을 계승하든가 법률로 입신하라는
부친의 요구에 반항하여 피에르 가상디나 시라노 등
자유사상가와 교섭을 가졌다고 한다.
결국 대학에서 법률을 배워 1640년 오를레앙에서
법학사의 자격을 받았다.

이즈음 연상의 여자 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그 일가와 교제하여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극계에 투신한다.
1643년 '일뤼스트르 테아트르(l'Illustre Theatre, 유명 극단)'을
결성하여 애인인 베자르를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파리 상연에 실패, 채무로 투옥되는 등의 일을 겪은 뒤
베자르 자매와 함께 리옹을 비롯하여 남프랑스 각지를
약 12년 동안에 걸쳐 순회공연했다.
한편으로 샤페르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와의 교류를 갖고,
가산디의 유물론 철학을 접하게 되며,
새로운 문학이론을 연구한다.
1645년 지방공연을 떠난 기간에 이탈리아 희극을 배워
극작을 시작하였다.
몰리에르라는 예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1643년부터다.



파리를 떠난 몰리에르 일행은 에페르농 공작의 후원을
받고 있던 뒤프렌(Dufresne)의 극단과 합류한다.
그의 초기 연극 활동은 지방에서 이뤄졌다.
그는 이 고난시대에 배우 및 작가로서 비극보다는
희극에서 그 특성을 발휘했다.
지방에 잔존하고 있던 중세 파르스(笑劇)의 서민적인 웃음,
당시 유행했던 이탈리아 희극의 경묘한 움직임을 연구하고
청년시대의 교양으로 고대 라틴 희극에서도
배운 바가 많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희극으로 유명해진 그는
콩티 공(公)의 보호를 받아, 1652년부터 리옹을 본거지로
삼게 되었으며, 1655년 최초의 문학적 희극 <경솔한 자>를
상연했으며 다음해에 <사랑의 유한>을 발표,
작가 겸 극단장으로서의 명성으로 루앙을 방문,
코르네유와 교분을 맺었다.

1658년에 파리로 돌아와 루이 14세의 앞에서
<사랑에 들린 의사>를 상연함으로써 데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으로 극단은 국왕의 전속이 되었고
프티 부르봉 극장에서 이탈리아 극단과 교체로
출연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도 했다.
1659년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은 재원인 척하는
지방귀족의 딸을 풍자한 풍속희극의 소극(笑劇)으로서
대성공을 거두어 희극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파문]
1661년부터는 극단을 데리고 파리 '팔레 루아얄
(Palais-Royal) 극장'에 정착하여 이후 65년에 국왕의
전속극단이 되어 몰리에르 일생을 통한 본거지가 된다.
궁정사교계의 일부나 그가 공격한 부자연스런 낭송법에
의존하고 있던 부르고뉴 극단인 왕립극단 일파를
적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1662년에 <아내들의 학교>에서 노인 아르노르프의 딸에
대한 사랑을 통해 당시의 도덕이나 교육의 위선을 풍자,
성공과 동시에 엄청난 반대도 불러일으켰다.
이에 몰리에르는<아내학교 비판> <베르사유 즉흥극>으로
반론하며, 경희극은 비극과 같은 가치가 있고,
법칙은 경험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지켜야 하나
구애받을 필요는 없으며, 문제는 관객의 즐거움이라고 논했다.
그 해 마들렌의 동생 아르망드와 결혼하여 그 관계에
수수께끼를 남겼다. 부부 사이의 두 아들은 일찍 죽었다.

그 후 <타르튀프>(1664)에서 가짜 신앙가 타르튀프를
둘러싸고 오르곤 일가(一家)가 둘로 갈라져 다투어
위선의 가면을 벗긴다는 극을 썼으나 교회 일부의
반감을 사게 되어 상연금지를 당했으며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1669년에 상연의 금지령이
해제되어 일반 대중에게 공개했고 대성공을 얻었다.

1665년에 '국왕의 극단'이란 칭호를 얻은 극단을 위하여
쓴 <돈 주앙>(1665)도 괴이성이 등장하는 소극(笑劇) 형식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나 작가는 양식(良識)의 신앙을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혐세자(嫌世者)>(1666)는 교만하나 고결한 인격의
아르세스트를 둘러싼 성격대립에 기초를 둔 걸작이라 하겠다.
이어서 코믹풍의 <억지로 의사가 되어>(1666)와
그리스의 신화를 소재로 한 <앙피트리옹>(1668) 후에
구두쇠 알파곤의 좌절을 묘사한 <수전노>(1668),
지나치게 재치가 있는 여인의 기질을 풍자한 <여학자>(1672) 등
모두가 성격 묘사에 의해서 풍속희극을 심리적으로
본격화한 걸작을 발표했다.



이 사이에 무용극이나 오페라로 인기가 옮아 갔기 때문에
음악가 륄리와 협력하여 이 분야의 작품도 썼다.
<서민 귀족>(1670)은 그 대표작이라 하겠다.
1665년경부터 그는 과로로 인해 폐결핵이 발병,
67년부터 오토유에서 정양하면서 연극활동을 계속했다.
1671년에는 <스카팽의 간계>, 1672년에 <여학자들> 등을 상연하였다.

1672년에 마들렌 베자르의 사망, 이어 둘째 아들까지
요절하고 륄리에게 국왕의 총애를 빼앗기는
불운한 해가 거듭되었으며, 1673년에 <상상병 환자>를
상연 중 무대에서 쓰러져 각혈한 끝에 그날 밤 사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배우직은 파문을 당했었으나 국왕의 배려로 장의(葬儀)를
허가받았다.

[죽음]
몰리에르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순간 중 하나는 바로
그의 마지막으로 이는 전설이 되었다.
몰리에르는 《상상병 환자》를 공연 하던 중,
무대에서 사망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무대에서 쓰러져서,
그의 집에서 몇 시간 뒤에 조병성사없이 사망하였다.
두 명의 가톨릭 성직자는 그를 방문하는 것을 거절했고,
세 번째 성직자는 너무 늦게 도착하였다.
마지막에 그는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초록색이 배우들에게 불운을 몰고 온다는
미신이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의 법례로는 연극 배우를 신성한 성지에
'일반적인 의식'으로 매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몰리에르의 아내 아르망드는 루이 14세에게 정상적인
장례식을 밤에 치를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1792년 그의 유해는 프랑스 기념 박물관에 옮겨졌고,
1817년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Cimtiere du Pere Lachaise)로
이장되어 라 퐁텐 근처에 묻혔다.

몰리에르가 죽은 뒤 그 극단은 다른 극단과 합병하여
1680년 국왕의 명에 의해 '코메디 프랑세즈
(Comedie Francaise)'가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의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가
'몰리에르의 집'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몰리에르는 완전한 연극인으로서 당대의 최고
희극 연기자로 대우를 받았으며, 죽은 후 프랑스 연극사상
최대의 희극작가로 평가되었다.



그는 종래의 단순한 희극에서 벗어나 예민한 관찰로
당시의 풍속을 무대 위에 재현시켰으며, 심리 발전을
토대로 하는 성격 묘사, 무대의 조화, 이성과 양식을 존중한
자연스럽고 힘찬 표현에 있어서 뛰어났다.

자연스러움을 존중하고 그에 반하는 것은 골계화하는
태도는 희극의 장르에 있어서 고전주의를 대표하지만,
휴머니스트로서의 몰리에르는 인간은 세상을 앎으로 인해
성장한다고 믿어 관용을 역설하였으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
건전한 분노를 터뜨렸다.
이 점에 몰리에르 작품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



[주요 작품 목록]
(초연 연도, 작품, 원어명)
1645년 날아다니는 의사 Le Medecin volant
1650년 바르부이에의 질투 La Jalousie du
barbouille
1655년 덤벙쟁이 L'Etourdi ou les Contretemps
1656년 12월 16일 사랑의 원한 Le Depit
amoureux
1658년 사랑에 빠진 박사 Le Docteur amoureux
1659년 11월 18일 우스꽝스러운 재녀들 Les
Precieuses ridicules
1660년 5월 28일 스가나렐 또는 상상 속에서 오
쟁이진 남자 Sganarelle ou le Cocu imaginaire
1661년 2월 4일 나바르의 동 가르시 Dom Garcie
de Navarre ou le Prince jaloux
1661년 6월 24일 남편들의 학교 L'Ecole des maris
1661년 8월 17일 훼방꾼들 Les Facheux
1662년 12월 26일 아내들의 학교 L'Ecole des femmes
1663년 4월 15일 큰 르네의 시기심 La Jalousie
du Gros-Rene
1663년 6월 1일 아내들의 학교 비판 La
Critique de l'ecole des femmes
1663년 10월 14일 베르사이유 즉흥극
L'Impromptu de Versailles
1664년 1월 29일 강제 결혼 Le Mariage force
1664년 4월 27일 큰 르네, 작은 아이 Gros-
Rene, petit enfant
1664년 5월 8일 엘리드의 공주 La Princesse d'Elide
1664년 5월 12일 타르튀프 Tartuffe ou l'Imposteur
1665년 2월 15일 동 쥐앙 또는 석상의 잔치 Dom
Juan ou le Festin de pierre
1665년 9월 15일 사랑이라는 의사 L'Amour medecin
1666년 6월 4일 인간혐오자 또는 사랑에 빠진 우
울증 환자 Le Misanthrope ou l'Atrabilaire amoureux
1666년 8월 6일 억지 의사 Le Medecin malgre lui
1666년 12월 2일 멜리세르트 Melicerte
1667년 1월 5일 전원 코미디 Pastorale comique
1667년 2월 14일 시칠리아인 또는 사랑이라는 화가
Le Sicilien ou l'Amour peintre
1668년 1월 13일 앙피트리옹 Amphitryon
1668년 7월 18일 조르주 당댕 또는 쩔쩔매는 남편
George Dandin ou le Mari confondu
1668년 9월 9일 수전노 L'Avare ou l'Ecole du mensonge
1669년 10월 6일 푸르소냐크 씨 Monsieur de Pourceaugnac
1670년 2월 4일 멋진 연인들 Les Amants magnifiques
1670년 10월 14일 서민 귀족 Le Bourgeois gentilhomme
1671년 1월 17일 프시케 Psyche
1671년 5월 24일 스카팽의 간계 Les Fourberies de Scapin
1671년 12월 2일 에스까르바냐스의 백작 부인
La Comtesse d'Escarbagnas
1672년 3월 11일 유식한 여자들 Les Femmes savantes
1673년 2월 10일 상상병 환자 Le Malade imaginaire



=========================================
Moliere

[Born] Jean-Baptiste Poquelin
15 January 1622
Paris, France

[Died] 17 February 1673 (aged 51)
Paris, France

[Pen name] Moliere
[Occupation] Playwright, actor
[Nationality] French
[Period] 1645–1673
[Genre] Comedy

[Notable works]
Tartuffe; The Misanthrope; The Learned
Women; The School for Wives; L'Avare

[Spouse] Armande Bejart
[Partner] Madeleine Bejart
[Children]
Louis (1664–1664)
Marie Madeleine (1665–1723)
Pierre (1672–1672)



Jean-Baptiste Poquelin, known by his stage
name Moliere (15 January 1622 ~ 17 February
1673), was a French playwright and actor who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greatest
masters of comedy in Western literature.
Among Moliere's best known works are The
Misanthrope, The School for Wives, Tartuffe,
The Miser, The Imaginary Invalid, and The
Bourgeois Gentleman.

Born into a prosperous family and having
studied at the College de Clermont (now
Lycee Louis-le-Grand), Moliere was well
suited to begin a life in the theatre.
Thirteen years as an itinerant actor helped
him polish his comic abilities while he
began writing, combining Commedia dell'arte
elements with the more refined French comedy.

Through the patronage of aristocrats
including Philippe I, Duke of
Orleans—the brother of Louis
XIV—Moliere procured a command
performance before the King at the Louvre.
Performing a classic play by Pierre
Corneille and a farce of his own, The Doctor
in Love, Moliere was granted the use of
salle du Petit-Bourbon near the Louvre, a
spacious room appointed for theatrical
performances. Later, Moliere was granted the
use of the theatre in the Palais-Royal. In
both locations he found success among
Parisians with plays such as The Affected
Ladies, The School for Husbands and The
School for Wives. This royal favour brought
a royal pension to his troupe and the title
Troupe du Roi ("The King's Troupe"). Moliere
continued as the official author of court
entertainments.

Though he received the adulation of the
court and Parisians, Moliere's
satires attracted criticism from moralists
and the Catholic Church. Tartuffe and its
attack on perceived religious hypocrisy
roundly received condemnations from the
Church, while Don Juan was banned from
performance. Moliere's hard work in
so many theatrical capacities took its toll
on his health and, by 1667, he was forced to
take a break from the stage. In 1673, during
a production of his final play, The
Imaginary Invalid, Moliere, who
suffered from pulmonary tuberculosis, was
seized by a coughing fit and a haemorrhage
while playing the hypochondriac Argan. He
finished the performance but collapsed again
and died a few hours later.

(from 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wikipedia.org)


Comedy, Church, College de Clermont~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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