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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W Richard Wagner, 음악가, Germany
리하르트 바그너 [ Wilhelm Richard Wagner ]



[출생]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의 도시 라이프치히 여행]


[사망] 1883년 2월 13일 (69세)
이탈리아 베니스

[물의 도시 베네치아]


[25분 Youtube 동영상]


[국적] 독일

[독일 여행]


[활동분야] 작곡

[주요저서]
《독일음악론》(1840) 《독일예술과 독일정치》(1868)

[주요작품]
《혼례》 《파르지팔》 《트리스탄과 이졸데》



[요약]
독일의 작곡가이다.

오페라 외에도 거대한 규모의 악극을 여러 편 남겼는데
모든 대본을 손수 썼고 많은 음악론과 예술론을 집필했다.

예술론의 사상이 전 작품에 걸쳐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양식적 특색은 이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다.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였다.

[라이프치히 여행]


어려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18세 때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들어가 음악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독일 드레스덴 여행]


18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첫 오페라 《혼례 Hochzeit》를
프라하에서, 1834년에는 제2작인 《요정 Die Feen》을,

1836년에는 제3작인 《연애금제(戀愛禁制) Das Liebesverbot》를
뷔르츠부르크에서 완성하였다.

1836년 여배우 미나 플라너와 결혼하였으나 불행하게 끝났고,
1839년 《리엔치 Rienzi》를 작곡하던 중
러시아령(領)의 리가에서 파리로 갔으나 생활은 불우하였다.

그러다가 1842년 《리엔치》가 드레스덴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궁정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방황하는 네덜란드 사람 Der Fliegende Hollander》을
직접 지휘하여 초연했고(1843),
다음 작품 《탄호이저 Tannhauser》는 1845년에 상연되었다.

또,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여겨지던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지휘하여
그 진가를 일반에게 알렸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바그너도 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렸다.

이를 미리 알고 피신하여,
리스트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다가 스위스의 취리히로 갔다.

[스위스 취리히 여행]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를 돌봐준 베젠동크 부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베젠동크 가곡집》과

악극(樂劇)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에
담아 승화시켰다.

한편, 1850년에는 바이마르궁정극장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로엔그린 Lohengrin》이 상연되고,

[Lohengrin - Bridal Chorus | Richard Wagner]


1861년에는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 《바카날》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오페라극장에서 3회나 상연되었다.

또 같은 해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상연을 위해서
빈에 가기도 했으나 상연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864년 봄, 추방이 해제되면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청으로 뮌헨에 정착하고 작곡에 몰두하였으나

그를 백안시하는 자가 많아 이듬해
1865년 스위스의 루체른 교외의 트리프셴으로 이사하였다.

[루체른 시내 여행]


그 해에 뮌헨에서 H.뷜로의 지휘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상연되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또 1868년에도 역시 뷜로의 지휘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젱거 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가
초연되었으며,

1870년에는 리스트의 딸이자 뷜로의 부인이었던
코지마와 재혼하였다(전처 미나는 1866년에 사망하였다).

이때 그에게는 이미 코지마와의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1869년에 출생한 지크프리트는
훗날 아버지의 음악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1870년 바그너는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여
《지크프리트의 목가 Siegfried Idyll》를 작곡하였다.

바그너는 자기 악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여,
마침내 1876년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완성시켰다.

이 극장 개관기념으로 대규모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전곡을 상연하였는데,
전 유럽의 명사들이 몰려와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1882년에는 《파르지팔 Parsifal》이 상연되었다.

이것이 상연된 후 요양차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갔으나,
1883년 2월 13일 벤다르민궁(宮)에서 70년의 생애를 마쳤다.

바그너는 거대한 규모의 악극을 여러 편 남겼는데,
이 모든 악극의 대본을 손수 쓴 것은 아마도
그의 악극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 많은 음악론도 집필했으며,
이에 따르면 그가 생각하고 있던 '전체예술(종합예술)'이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②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神話)이어야 한다.

③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를테면, 조형예술·시·음악 등)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이들 예술이 모두 하나로 뭉쳐져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

④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는 뜻깊은 선율을 낳기 위해서는 두운(頭韻)을 써야 한다.
관현악은 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합창과 같은 몫을 하며,

이야기의 일반 인간적(一般人間的)인 것을 표현하여,
과거를 회상케 하며 또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한다.

⑤ 일반적인 사상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사부정적(意思否定的)인 염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독일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
구제의 이데아’를 그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⑥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하여야 하고,
음악 스스로가 규정적(規定的)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그의 예술론은 주로 《로엔그린》 이후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창작되기까지의 창작활동
중지기간에 씌어졌다.

이 예술론의 사상이 반드시 그의 전 작품에 걸쳐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작품 중의 다음과 같은 양식적 특색은 이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다.

① 극의 전개와 심화에 관현악을 참가시키기 위하여
도입동기(導入動機)를 유효적절하게 썼다.

② 무한선율(無限旋律)이라고 그 스스로가 명명한 양식에 의하여
음의 흐름을 중단시키지 않고 극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③ 화성의 표현능력을 확대시켰다. 특히 대담한 반음계적 사용으로
음의 조성은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다.

④ 관현악 구성은 대규모화하여 표현의 폭의 넓이와 섬세함에는
종전의 낭만파음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명문가로서 음악작품의 대본 이외에도
많은 예술론을 저술하여
《독일음악론 Uber Deutsches Musikwesen》(1840)
《예술과 혁명 Die Kunst und die Revolution》(1849)
《미래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der Zukunft》(1850)
《오페라의 사명에 대하여 Uber die Bestinnung der Oper》(1871)
《오페라와 희곡 Oper und Drama》(1851)
《독일예술과 독일정치 Deutsche Kunst und
Deutsche Politik》(1868) 등의 저서를 남겼다.



[리하르트 바그너 연보]
1813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출생. 같은 해 부친 사망.

1825 피아노를 처음 배움.

1829 슈라에게서 작곡을 사사받음.

1831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 바인리히에게서 대위법을 배움.

1836 《사랑의 금지》를 완성하여 마그데부르크에서 초연.
여배우 민나 플라너와 결혼.

1840 서곡 《파우스트》, 《리엔치》완성. 소설 <베토벤 참배>를 발표.

1849 드레스덴 혁명에 가담하여 망명함. 취리히로 이사.

1859 《트리스탄과 이졸데》 완성.

1866 부인 사망 후, 루체른 교외의 트리프센으로 이사함.

1871 《지크프리트의 목가》를 완성함. 바그너 협회 설립.

1876 《신들의 황혼》이 완성되면서 《니벨룽의 반지》가 완성됨.

1882 《파르지팔》을 완성하여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됨.

1883 2월 13일 사망.

[바그너에 관한 진실과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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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독일어: 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 22일 독일 제국 라이프치히~1883년 2월 13일
이탈리아 왕국 베네치아)는 영향력 있는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이자 지휘자, 음악 이론가,
그리고 수필가이다.

[이력]
그의 새로운 교향악적인 오페라(또는 "악극")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곡은 연속적인 대위법적 텍스처,
풍부한 화성과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유도동기(라이트모티프, Leitmotif;
특정한 인물이나 상황에 연관된 음악 동기)의
교묘한 사용을 눈여겨볼 만하다.

바그너의 반음계적 음악 언어는
유럽 고전음악의 이후 발전을 암시하며,
이는 극단적인 반음계법과 무조성을 지향한다.

그는 음악적 사고를 그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발상을 통해 전환해 나갔고,

이는 그의 기념비적인 네 개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의 반지 (1876)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유도동기와, 종합적인 음악적 표현이라는 그의 개념은
많은 20세기의 영화음악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바그너는 또한 극도로 찬반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로서,
이는 그의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혁신으로 인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반유대인적 시각에도 기인한다.

[전기]
[어린 시절]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에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Carl Friedrich Wagner)는
경찰서 공무원이었는데,

리하르트의 출생 후 여섯 달 만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고,
1814년 8월에 그의 어머니는 배우 루드비히 가이어와 재혼했다.

가이어는 사실 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소문이 있는데,
어쨌든 친아버지는 리하르트가 여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나고,
그는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젊은 리하르트 바그너는 극작가가 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음악에 대해서는 처음에 그가 쓰고 상연하고 싶었던 극을
한층 향상시킬 수단으로서 관심을 가졌다.

그는 곧 음악을 공부하기로 방향을 돌렸고,
그것을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1831년 입학했다.

초기, 그의 음악에 영향을 준 인물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1832년 19세때 첫 교향곡인 교향곡 C장조를 작곡했으며
1833년에 나이 스물의 바그너는 그의 첫 완성된 오페라인
요정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는 명백히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반 세기 넘게 상연되지 않았으며,
초연은 그의 죽음 직후인 1883년에 뮌헨에서 있었다.

그 동안에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와 쾨니히스베르크의
오페라 극장의 음악 감독으로서 약식 계약을 맺었으며,

그 동안에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에 기초한
연애금지를 썼다.

이 두 번째 오페라는 1836년에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연되었지만,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1836년 11월 24일에 바그너는 "미나"라고 불리는
여배우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라너
(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er)와 결혼했다.

그들은 리가로 이사해서 바그너는 거기에서
지역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몇 주 후에, 미나는 군인과 야반도주했고,
그 군인은 나중에 단 돈 한 푼도 안 남기고 그녀를 떠나 버렸다.

바그너는 미나를 다시 맞아들였지만,
이 일은 30년 후에 비극적으로 끝날 문제 많은
결혼 생활의 시작이었다.

1839년까지 부부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빚쟁이들을 피해 리가를 떴다
(빚은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바그너를 따라다녔다).

그들의 도주 행각 동안에,
그들은 영국으로 가는 항로에서 폭풍우를 만났는데

이 경험이 그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영감을 제공했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거기에서 리하르트는 기사를 쓰고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를
편곡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었다.



[드레스덴]
바그너는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리엔치》를 1840년에 썼다.

뜻밖에 독일의 작센의 드레스덴 왕립 극장이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했다.

1842년에 부부는 드레스덴으로 이사했으며,
리엔지는 상당히 성공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다음 여섯 해를 보냈으며,
결국 30세에 작센 왕립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그의 첫 두 중기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쓰고 상연했다.

바그너의 드레스덴 체류는 바그너의 좌익 정치의 가담으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국가주의 운동은 독일 내 영방국가들에서 힘을 얻고 있었으며,
자유와 약한 주들의 한 나라로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운동에서 매우 열성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극단 좌익 잡지인 Volksblatter를 편집하던 그의 동료

아우구스트 뢰켈(August Rockel)과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 등을 포함한 손님들을 받아들였다.

작센 정부에 대한 널리 퍼진 불만은 1849년 4월에
작센의 왕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2세가 국회를 해산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새 헌법을 거부하면서 결국 끓어 넘쳤다.

5월 혁명이 발발했고, 바그너는 거기에서 사소한 도움을 주었다.

혁명은 초기에 작센과 프로이센 연합 병력에 의해
재빨리 진압되었고, 혁명 주도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바그너는 처음에는 파리로, 또 취리히로 도망해야 했다.

뢰켈(Rockel)과 바쿠닌(Bakunin)은 도망치는 데에 실패했고
오랜 기간의 수감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망명, 쇼펜하우어, 마틸데 베젠동크]
바그너는 다음 열두 해를 망명 생활로 보내야 했다.

그는 드레스덴 봉기 이전에 로엔그린을 완성했고,
이제 그의 친구 프란츠 리스트에게 그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이 상영되도록 간절한 편지를 썼다.

리스트는 꼭 필요할 때의 친구라는 것을 증명하듯 결국
1850년 8월에 바이마르에서 초연을 지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그 자신이 극심한 개인적 궁핍에 시달렸고,
독일 음악계에서 고립되었으며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가 쓰고 있던 음악 단편은 나중에 거대한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로 성장할 것이었는데,
공연될 가망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의 아내 Minna는 그가 《리엔치》 이후에
써 나간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점점 우울증이 깊어져 갔다.

결국 그는 단독(피부병의 일종)의 희생양이 되었고,
작곡을 계속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바그너의 취리히에서의 처음 몇 해 동안 일련의 주목할 만한
수필이 나왔는데, "미래의 예술-작품" (1849)에서

그는 음악, 노래, 춤, 시, 시각 예술, 무대 기술 등이
종합된 개념인 "총체예술(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으로서의
오페라의 비전을 설명했다.

"음악 속의 유대주의" (1850)은 유대인 작곡가를 반대하여
겨냥한 반유대주의 작품이다.

그리고 "오페라와 드라마" (1851)은
그가 반지 사이클에서 사용하고 있던 미학 개념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계속되는 몇 년 동안, 바그너는 두 개의 독립적인
영감의 원천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들이 그의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창작으로 그를 이끌었다.

첫 원천은 1854년에 그의 시인 친구였던
게오르그 헤베그(Georg Herwegh)가 그에게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하면서 그를 찾아왔다.

바그너는 나중에 이를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불렀다.

그의 개인 환경은 분명히 그가,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이 비관적인 관점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의 운이 더 나아진 후에도 남은 생애 동안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았다.

쇼펜하우어의 주의는 음악이 예술 가운데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며,

이는 음악이 물질계와 연관되지 않은
유일한 예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net

바그너는 이 주장을 환영했으며,
그가 그의 "오페라와 드라마" 에서 이와 직접 상반되는,

오페라의 음악이 드라마의 원인에 따라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강하게 공명을 이루었음에 틀림없다.

바그너 학자들은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바그너로 하여금 그의 반지 사이클의 뒤쪽 절반을 포함하는

후기 오페라에서 음악이 더 강한 명령을 하는 역할을
맡도록 했다는 주장을 해 왔다.

많은 측면의 쇼펜하우어적 주의는
바그너의 이어지는 대본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마이스터징거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인 한스 작스는
일반적으로 바그너가 자신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인물로 간주되는데,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적인 창조의 전형이다.

.....(중략)......

1861년에 바그너에 대한 정치적인 추방이 해제되었고,
프로이센의 비브리히에 머무르면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작업을 시작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오페라가 그의 작품 가운데에
가장 밝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는 나중에 "미래 세대가
이 독특한 작품 안에서 상쾌함을 찾는다면,

그들은 눈물 속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썼다.)

1862년에 바그너는 결국 Minna와 이혼했지만,
그는 (또는, 적어도 그의 채권자는) 그녀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186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국왕 루트비히 2세의 후원]
바그너의 행운은 1864년에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2세가
나이 19세로 즉위하자 극적인 계기를 맞았다.

젊은 왕은 어린 시절부터 바그너의 오페라의 열렬한 숭배자였기에
작곡가를 뮌헨으로 데려왔다.

그는 바그너의 상당한 빚을 해결해 주었고,
그의 새 오페라가 상연될 계획을 세웠다.

리허설에서의 각고의 어려움 끝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뮌헨 왕립 극장에서 1865년 6월 10일에
큰 성공을 거두며 초연되었다.

.....(중략).....

루트비히는 바그너를 스위스의 루체른 호 인근의 빌라
Triebschen에 보냈다.

마이스터징거는 Triebschen에서 1867년 완성되었고,
다음 해 6월 21일에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10월에, 코지마는 결국 한스 폰 뷜로를 설득해
그녀와 이혼하게 했다.

리하르트와 코지마는 1870년 8월 25일에 결혼했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 바그너는 코지마의 생일 선물로
지크프리트 목가를 선사했다.

코지마와의 결혼은 바그너의 생애 마지막까지 지속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또 한 명의 딸인 에바와 아들인
지크프리트가 태어났다.

Triebschen에서 1869년에 바그너는 처음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만났고, 곧 굳은 친구가 되었다.

바그너의 사상은 니체에게 주요한 영향을 주었고,
그때 니체의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니체의 첫 책인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odie, 1872)는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니체가 점점 바그너의 다양한 측면의 생각,
그의 평화주의와 반유대주의와 같은 것에
환상이 깨지면서 결국 멀어졌다.

"바그너의 경우" (Der Fall Wagner, 1888)와
"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 1889)에서,

그는 바그너를 퇴폐하고 타락한 것으로 비난했고,
심지어 그 자신의 이른 시절의 미숙한 시야에 대해서도 자기 비판했다.



[바이로이트]
바그너는 그의 새 가정에 안착하여,
그의 에너지를 반지 사이클을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바그너는 반지 전곡 사이클이 이 작품을 위해 특별히 설계된
새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후원자인 루트비히2세가 전곡의 완성될 때까지
참을 수 없어 그의 명령에 따라 사이클 중 이미 완성된

첫 두 작품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은
뮌헨의 "특별 시사회"에서 초연되었다.



1871년에, 그는 작은 마을인 바이로이트를 그의
새 오페라 극장의 위치로 결정했다.

바그너 일가는 그 다음 해에 이주하였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초석이 놓였다.

공사를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바그너 협회"가 각 도시에 결성되었고,
바그너 자신도 독일 전역에 콘서트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루트비히2세가 또 다른 거액의 보조금을
1874년에 지원한 후에야 충분한 자금이 모였다.

그 후년에, 바그너 일가는 바이로이트에 리하르트가
반프리트(독일어로 "미혹과 광기로부터의 평화와 자유")라고
이름붙인 빌라를 그들의 영구적인 집으로 삼아 이주를 마쳤다.

축제극장은 결국 1876년 8월에 《반지》 사이클의 초연과 함께
열었고, 그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바이로이트 축제의
개최지로 남았다.

[만년]
1877년에 바그너는 그의 최후의 오페라인
파르지팔에 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작곡에는 4년이 걸렸으며, 그 동안에 그는 또한 일련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수필을 썼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1882년 1월에 완성했는데,
이 작품을 오페라라 하지 않고
신성한 무대용 축전극이라 하였다.

그 해 여름 파르지팔을 초연하기 위해
두 번째로 바이로이트 축제가 열렸다.

바그너는 이 때에 심하게 아팠으며,
점점 심한 협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바그너는 평소 협심증이 있었는데 이 때는 상태가 심해졌다.

파르지팔은 총 16회 상연되었는데,
마지막 공연날인 8월 29일에는 지휘자 헤르만 레비가
아팠기 때문에 3막이 연주되는 도중에 바그너 본인이

비밀리에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가 지휘자 헤르만 레비로부터
지휘봉을 받아서 작품의 종결부에 이르기까지 공연을 지휘했다.

이 축제 이후에,
바그너 가족은 베니스로 요양을 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났다.

[베네치아 1일 여행 코스]


1883년 2월 13일,
리하르트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베니스 대운하 위의
Palazzo Vendramin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로 되돌아와 반프리트의 정원에 묻혔다.

[Richard Wagner in Venice: A Symphony]


[바그너의 영향과 유산]
그는 음악사에 있어서뿐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 천재이다.

음악사에서는 초기 낭만파의 뒤를 이어 낭만파 음악을 대성한
최고봉이며, 문학사에서는 신낭만파의 희곡 영역에 있어서의
거봉이었다.

또한 니체에게도 영향을 준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주의, 종교적인 신비주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19세기 말
낭만주의 부흥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바그너의 유럽 예술과 문화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으며
기념비적이다.

그의 생전과 사후 여러 해 동안,
바그너는 그의 다수의 팬들 사이에서 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그들 사이에서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음악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특히 중요한 새 지평을 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 편에 서거나
바그너에 반대하는 편 중 하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안톤 브루크너와 휴고 볼프는 그에게 특히 많은 빚을 졌으며,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팍, 에르네스트 쇼송, 쥘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등의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러하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이십 세기 화성 혁명은
트리스탄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드라마적인 공연 동안에 불빛을 희미하게
해야 한다고 처음 요구했던 사람이 바그너였으며,

처음으로 관현악단 피트(바이로이트에서는 관중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사용했던 것도 그였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이 청중들의 상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극장"을 꿈꿨다.

오디오 기기의 발달로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바그너의 문학과 철학, 미술에 대한 영향 또한 분명하다.

영향력 있는 저작물인 비극의 탄생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지팔》 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했다.

그는 《파르지팔》를 기독교 신앙심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20세기에, W. H. 오든은 한때 바그너를
"아마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천재"로 불렀으며
,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를 논했다.

바그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그의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은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톨킨 자신이 옥스포드의 고대영어 교수이었기에
북구 신화와 사가에는 정통했었고,

따라서 북구 신화를 차용한 바그너의 작품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C.S. 루이스가 열렬한
바그네리안이었으며, 20세기 초의 유럽 문화계의 풍토를 보아도
바그너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었다.

게다가 톨킨은 C.S. 루이스와 함께 종종
바그너 공연을 보러 갔었으며,

한때는 C.S. 루이스와 함께 <니벨룽의 반지>의 2부 발퀴레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그는 바그너를 즐겨 들었고 또 열심히 연구를 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느, 그리고 샤를르 보들레르는
그를 숭배했다.

사랑과 죽음(즉 에로스와 탄토스)의 관계에 대한 것 등
그의 음악 속의 많은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을 예고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잇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때,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 지지자와
요하네스 브람스 지지자의 두 파로 나뉘었다.

브람스 지지파는 강력한 비평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전통 형태를 최고로 인정하고
바그너식 혁신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이끌었다.

클로드 드뷔시는 바그너를 심하게 비판했던 사람이지만,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작곡자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드뷔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받았기 때문에
바그너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작곡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강한 반응을 계속 일으켰다.

그의 후기작에서,
그는 바그너 작품의 그것처럼 긴 시간과 깊은 맥박을 만들어내어
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자들이 바그너의 시간개념에 완전히 익숙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런 음악을 만들어 냈다.

로시니("바그너는 굉장한 순간과 진절머리나는 15분을 가지고 있다")를
포함해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그 자신의 "Guillaume Tell"이 네 시간 이상의,
어떤 바그너 작품 하나보다도 긴 시간을 요구했다.

바그너의 이상은, 지크프리트의 "금발의 괴물" 영웅주의로부터,
그의 열성적인 쇼펜하우어 오독과 더불어 죽음과 신격화에 대한
매혹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심하게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오페라는 계속 강한 추종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그너는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그에게 자극받은
이차 문학의 양이 많은 역사적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렇게 그는 계속적으로 많은 찬반 논란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다.

그 원인이 그의 음악의 뿌리에 있는 능가할 자 없는 숭고함, 힘,
장엄함, 그리고 때때로 위험한 초월적인 아름다움 때문이다.



[바그너의 작품]
[오페라]
바그너의 오페라는 그의 으뜸가는 예술적 유산이다.

이는 시간 순서대로 세 기간으로 나뉠 수 있다.

바그너의 초기 단계는 나이 열 아홉에
그의 첫 오페라 도전 혼례(Die Hochzeit)로 시작되었는데,
작곡의 초기 단계에서 1832년에 포기했다.

바그너의 완성된 초기 단계 오페라는 세 개로, 요정(Die Feen),
연애금제(Das Liebesverbot - 쉽게 말해서 연애 금지),
그리고 리엔치이다.

이 작품들의 작곡 양식은 전형적인 것으로 음악사에서
바그너의 위치를 매김해 준 혁신적인 발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의 생의 나중에, 바그너는 이 비성숙한 작품들은
그의 예술 작품의 일부로 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작품들은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리엔치 서곡은 콘서트용 작품이 되었다.

바그너의 중기 단계의 작품은 굉장히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드라마 작가이자 작곡가로서의 힘이 깊어가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nde Hollander),
그 뒤를 이어서 탄호이저(Tannhauser)와
로엔그린(Lohengrin)을 포함한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 광범위하게 연주되고 있다.

바그너의 후기 단계의 오페라는 오페라라는 예술을 승화시킨
그의 걸작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바그너의 가장 위대한 단편 오페라로 꼽고 있다.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장인 가수)
(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는 바그너의 유일한 희극이며

(그의 잊혀진 초기작인 연애금제를 제외하면)
현재 공연되는 오페라 가운데 가장 긴 것들 중 하나이다.

니벨룽의 반지는 흔히 반지 사이클이라고 회자되며,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기초한 네 개의 오페라 모음이다.



연주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16시간 가량으로, 반지 사이클은
이제까지 작곡된 음악 작품 중 가장 야심찬 것으로 불린고 있다.

바그너의 최후의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은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를 위해 특별히 작곡되었으며
악보에 "무대신성제전극"("Buhnenweihfestspiel")이라고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성배에 대한 기독교 전설에 기초해 쓰여진
명상적인 작품이다.

그의 오페라와 음악 이론에 대한 수필에 걸쳐,
바그너는 오페라라는 매체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는 그가 "악극"이라고 부른, 음악과 드라마의 요소를 모두 함께
융합한 새로운 오페라 형태에 대한 옹호자였다.

대본 작성 작업을 직접 하지 않은 다른 오페라 작곡가들과 달리,
바그너는 그의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직접 썼으며
자신은 그것을 "시"라고 지칭했다.

그의 작품의 줄거리 대부분은 북유럽 신화와 전설에 기초해 있다.

거기에 더해,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가수의 그것과
동등한 작품 양식을 개발해 냈다.

오페라의 드라마에 대한 오케스트라의 역할에는,
특정한 인물, 장소, 줄거리 요소를 알려 주는 음악 주제인
유도동기의 연주가 포함된다.

유도동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진화해 나가는 양상이
드라마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바그너의 음악적인 양식은 종종 서양 고전음악의 낭만파 시기의
축약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감정적 표현에 대한 탐구 때문이다.

그는 화성과 음악 형식에 있어서 새로운 생각을 소개했으며,
여기에는 극단적인 반음계법이 포함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그는 전통적인 조성 체계의 한계를 탐구하여 조와 화음을 각각
인물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20세기의 무조성으로의 길을 가리켰다.

몇몇 음악 사학자는 현대 서양 고전음악의 시작을, 소
위 트리스탄 화음이라고 불리는 트리스탄의 첫 음표들로 보고 있다.

[초기 단계]
(1832) 혼례 (Die Hochzeit) (완성 전에 포기)
(1833) 요정 (Die Feen)
(1836) 연애금지 (Das Liebesverbot)
(1837) 리엔치, 마지막 호민관 (Rienzi, der Letzte der Tribunen)

[중기 단계]
(1843)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ander)
(1845) 탄호이저 (Tannhauser)
(1848) 로엔그린 (Lohengrin)



[후기 단계]
(1859)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1867)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장인 가수)
(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다음 네 개의 악극으로 구성됨:
(1854)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1856) 발퀴레(Die Walkure) (1871) 지크프리트(Siegfried)
(1874) 신들의 황혼(Gotterdammerung)
(1882) 파르지팔(Parsifal)



[오페라 이외의 음악]
오페라를 떠나서는,
바그너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음악을 작곡했다.

여기에는 2개의 교향곡 (나이 19세와 21세에 씀) 과
몇 개의 서곡, 합창곡 및 피아노곡,
그리고 글룩의 아울리데의 이피게니의 관현악 재편곡 등이 포함된다.

이들 중에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코지마의 생일을 위해 작곡된
실내악 작품인 지크프리트 목가이다.

목가는 반지 사이클에서 여러 모티프를 끌어오지만,
반지의 일부는 아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베젠동크 가곡으로,
이전에는 여성 성악을 위한 다섯 개의 노래로 알려졌으며,
바그너가 트리스탄을 작곡하는 동안에
마틸데 베젠동크를 위해 작곡되었다.

파르지팔을 끝낸 후, 바그너는 분명히 교향곡 작곡으로
방향을 전환하려 의도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작곡되지 않았다.

바그너의 중기와 후기 오페라에서 서곡과 관현악 소절은
콘서트 작품으로 흔히 연주된다, 이들의 대부분에 대해,

바그너는 이 발췌부에 대해 짧은 소절을 덧붙여서
곡이 갑자기 끝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들어, 이런 경우에 파르지팔 전주곡과
지크프리트의 장송 음악이 해당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트리스탄 전주곡의 콘서트용 판은
인기가 없고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주곡의 원래 형태가 콘서트 연주를 위해서도
보통 더 나은 것으로 간주된다.



영어권 국가에서 신부의 입장 시에 연주되는 가장 대중적인
결혼 행진곡 중 하나(흔히 "여기 신부가 온다"
("Here Comes the Bride")라고 알려져 있다)는,

그 가락을 로엔그린의 "혼례 합창곡"에서 따 온다.

오페라에서 이 곡은 신부와 신랑이 축하 행사장을 떠나
결혼식장으로 들어갈 때에 불린다.

로엔그린과 엘자의 재앙과도 같은 결혼은,
합창곡이 불리는 20분 후에 회복할 수 없이 파경으로 도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이런 이상한 사용을 막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교향곡]
교향곡 다장조 (1832년)

[관현악곡]
지크프리트 목가
파우스트 서곡

[가곡]
베젠동크 가곡 WWV. 91

[합창곡]
사도들의 애찬

[다른 저작]
바그너는 극도로 다작의 저술가로, 수백 편의 책, 시, 기사를
썼을 뿐 아니라 엄청난 양의 서신 왕래도 이루어졌다.

그의 저작은 정치, 철학, 그리고 그 자신의 오페라에 대한
상세한 분석 (종종 분석끼리 서로 상충되는 경우도 있다)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중요한 수필에는 오페라 이론에 대한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 1851), 그리고

유대인 작곡가에 반하는 논쟁인 "음악 속의 유대주의"
("Das Judenthum in der Musik", 1850)이 있다.

그는 또한 자서전인 나의 삶(1880)을 썼다.

그는 그의 오페라의 공연을 위해 특별히 건축된
오페라 하우스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개발된
여러 극장 관련 관습에 대한 혁신에 관련이 있다.

이러한 혁신에는 공연 동안에 객석을 어둡게 하기,

그리고 관현악단을 관객의 시야 밖의 피트
(객석과 무대에 비해 낮게 위치한 관현악단 전용 공간)에
위치시킨 것 등이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해마다 열리는
리하르트 바그너 축제의 개최지로,
수천 명의 오페라 팬을 매 여름마다 바이로이트로 끌고 있다.

[유대인들이 듣지 않는 음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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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 GPT 답변에 오류(hallucination: 환각 등)가 있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from https://www.bing.com)]

리하르트 바그너(W Richard Wagner, 음악가, Germany)가
제일 좋아한 역사적 인물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는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연출가, 지휘자, 음악 비평가,
그리고 저술가로서 19세기 유럽의 음악 및 문화 전체에 있어
독보적인 예술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독일의 오페라에 있어서 대표적인 작곡가 중 하나이며,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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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바그너(W Richard Wagner, 음악가, Germany)가
좋아할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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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악과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업적은 음악사와 문화사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1.

한편,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중에서
리하르트 바그너가 좋아할 만한 곡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아래는 몇 가지 한국 발라드 노래 제목입니다:

“안녕이란” - 황치열

“내가 다 미안해” - 이진재

“넌 할 수 있어” - 강산에

“사랑이 늦어서 미안해” - Johan Kim

“너는 내 마음 속에 남아” - Lucid Fall

이 노래들은 감성적이고 감미로운 발라드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적 취향과도 어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리하르트 바그너(W Richard Wagner, 음악가, Germany)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episode)는?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는
그의 생애 동안 많은 흥미로운 일화를 경험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공유해드리겠습니다.

“킹 루돌프와의 만남”

리하르트 바그너는 19세기 말 유럽의 귀족들과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자인
**킹 루돌프(King Rudolf)**와의 만남은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킹 루돌프는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에 열광했습니다.

어느 날, 킹 루돌프는 바그너를 자신의 궁전으로 초대했습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음악, 예술, 정치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만남은 바그너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그 후 그는 킹 루돌프를 자주 찾아갔습니다.

이 일화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삶과 음악에 대한
흥미로운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그의 예술적 업적 뿐만 아니라
이런 재미있는 인연들로도 기억되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W Richard Wagner, 음악가, Germany)는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일까?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는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연출가, 지휘자, 음악 비평가,
그리고 저술가로서 19세기 유럽의 음악 및 문화 전체에 있어
독보적인 예술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의 종합예술관과 종교적 예술관은 각 예술의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양심적인 측면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생애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관련된 측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정치적 견해와 사회적 태도:
바그너는 정치적으로 활발했으며,
그의 정치적 견해는 다양했습니다.

그는 혁명적인 사상을 지지했고, 민주주의와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입장은 논란이 많았고,
그의 행동이 양심적인지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예를 들어,
1849년 독일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바그너는
혁명가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바그너는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그너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통해 양심적인 선택을 했지만,
그의 행동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인종적 견해:
바그너는 인종적으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는 반유대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의 글에서는 유대인과 다른 인종에 대한
비난적인 표현이 종종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인종적 견해는 그의 양심적인 측면을 논의할 때
고려되어야 합니다.

음악적 업적과 예술적 비전:
바그너는 음악적 업적과 예술적 비전을 통해
양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혁신적이고 독창적이었으며,
그의 예술적 비전은 그의 양심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양심적인 측면은 그의 정치적 입장,
인종적 견해, 음악적 업적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판단되어야 합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논란이 많았지만,
그는 음악사와 문화사에 큰 흔적을 남겼습니다

리하르트 바그너(W Richard Wagner, 음악가, Germany)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리하르트 바그너(W Richard Wagner, 음악가, Germany)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리하르트 바그너(W Richard Wagner), 독일의 작곡가,
극작가, 연출가, 지휘자, 음악 비평가 및 저술가로서
그의 음악적 업적은 뛰어나지만,
그의 인격과 태도는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싫어했고 독일 문화에 유해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의 양심 등급을 A, B, C, D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을 수 있습니다:

A (매우 우수):
그의 음악적 업적과 창작에 대한 평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의 양심은 매우 우수할 것입니다.

B (우수):
그의 음악적 업적은 뛰어나지만,
그의 인격과 태도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그를 우수하다고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C (보통):
그의 음악적 업적과 인격적 측면을 평균적으로 고려한다면,
보통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D (낮음):
그의 인격과 태도 때문에
그의 음악적 업적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낮은 등급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이 등급은 주관적이며, 다양한 시각에서 평가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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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helm Richard Wagner
(22 May 1813 ~ 13 February 1883) was a German composer,
theater director, polemicist, and conductor who is primarily
known for his operas (or, as some of his later works were
later known, "music dramas").

Unlike most opera composers, Wagner wrote both
the libretto and the music for each of his stage works.

Initially establishing his reputation as a composer of
works in the romantic vein of Weber and Meyerbeer,
Wagner revolutionised opera through his concept of
the Gesamtkunstwerk ("total work of art"),
by which he sought to synthesise the poetic, visual, musical
and dramatic arts, with music subsidiary to drama.

He described this vision in a series of essays published
between 1849 and 1852.

Wagner realised these ideas most fully in the first half
of the four-opera cycle Der Ring des Nibelungen
(The Ring of the Nibel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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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compositions, particularly those of his
later period, are notable for their complex
textures, rich harmonies and orchestration,
and the elaborate use of leitmotifs—musical
phrases associated with individual
characters, places, ideas or plot elements.

His advances in musical language, such as
extreme chromaticism and quickly shifting
tonal centres, greatly influenced the
development of classical music. His Tristan
und Isolde is sometimes described as marking
the start of modern music.

Wagner had his own opera house built, the
Bayreuth Festspielhaus, which embodied many
novel design features. The Ring and Parsifal
were premiered here and his most important
stage works continue to be performed at the
annual Bayreuth Festival, run by his
descendants. His thoughts on the relative
contributions of music and drama in opera
were to change again, and he reintroduced
some traditional forms into his last few
stage works, including 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 (The Mastersingers of Nuremberg).

Until his final years, Wagner's life was
characterised by political exile, turbulent
love affairs, poverty and repeated flight
from his creditors. His controversial
writings on music, drama and politics have
attracted extensive comment, notably, since
the late 20th century, where they express
antisemitic sentiments.

The effect of his ideas can be traced in many of the arts
throughout the 20th century; his influence
spread beyond composition into conducting,
philosophy, literature, the visual arts and theater.

(from 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wikipedia.org,
추천 유튜브 동영상,
** Selected & Recommended Youtube Videos are shown. **)


Broadly ok Beyond opera composition~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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