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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Rene Descartes, Philosopher, France
르네 데카르트 Rene Descartes
근대 철학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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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1000년간 인물100명중 32위 선정


인류 역사인물 100명중 49위 선정


인류 역사인물 50명에 선정




[출생] 1596년 3월 31일
프랑스 왕국 투렌 (현 데카르트, 앵드르에루아르)

[프랑스 역사 요약]


[사망] 1650년 2월 11일 (53세)
스웨덴-노르웨이 스톡홀름

[스웨덴 스톡홀롬]




[시대] 17세기 철학

[지역] 서양철학

[학파] 데카르트주의,
합리주의 철학,
기초주의

[연구 분야]
형이상학, 인식론, 수학



[주요 업적]
Cogito, ergo sum, 데카르트적 회의, 직교 좌표계,
이원병존주의,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 보편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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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년 3월 31일~1650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이며 본인의 대표 저서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계몽사상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의
근본 원리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0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즈(College la Fleche)
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한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1626년부터 2년 동안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하며
미완성 논문 <정신지도의 규칙>을 쓴다.

1628년 말,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저술활동에 몰두해
《세계론》(Traite du monde)을 프랑스어로 출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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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에는 《방법서설》에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가지 부분을 덧붙여 익명을 출판했다가 후에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완성한다.

1644년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원리》를 출판한다.

그 후 그는 여러 사람과 편지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1649년 출판된 그의 마지막 책,
《정념론》(Les passions de l'ame)이 된다.

1650년 2월 11일, 그는 폐렴에 걸려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생애]
데카르트는 1596년 투렌 지방(Touraine)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La Haye, 현재 그의 이름을 빌어 Descartes)의
법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브흐따뉴의 헨느(Renne) 시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14달이 못되어 세상을 떴다.

이후 그는 외할머니 밑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몸이 무척 허약했다고 전해진다.

1606년 그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레쉬 콜레즈
(College la Fleche)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하게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5년간 라틴어, 수사학, 고전 작가 수업을 받았고
3년간 변증론에서 비롯하여 자연철학, 형이상학 그리고
윤리학을 포괄하는 철학 수업을 받았다.

그가 이 시기에 받은 교육은 후에 그의 저서 여기 저기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특히 《방법서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라 플레쉬를 졸업한 후 뿌아띠에(Poitiers) 대학
법학과에 입학해 수학·자연 과학·법률학·스콜라 철학 등을
배우고, 수학만이 명증적인 지식이라고 생각하였다.

1616년에 리상스(Licence)를 취득한다.

이후 그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으로부터
실질적인 지식을 얻고자 학교밖으로 나갔고,
다시는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졸업 후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네덜란드에 갔으며,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에 출정하였다.



1619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첫 작품 짧은 《음악 개론》
(Compendium Musicae)을 썼다.

같은 해에 독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여행하던 중 11월 10일 울름의 한 여관에서

자신의 삶의 데카르트는 여기서 삶의 목표를 학문에
두기로 결심하였다.



1620년 제대하고 프랑스에 귀환, 1626년부터 파리에서
수학·자연 과학, 특히 광학을 연구하였다.

1627년에 다시 종군한 후, 1628년 단편 <정신 지도의 법칙>을 집필,
자신의 방법론 체계를 세우려 하였다.

같은 해 가을, 연구와 사색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건너가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은
네덜란드에 약 20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에 저술한 것이다.

1628년 겨울에 데카르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 밑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 하아렘, 에그몬드 등의 도시로
여러 차례 주거지를 옮기면서 더러는 개인 교사로 혹은
은둔 학자로 생활을 했다.

이 시기 (1630년 - 1633년)에 자연과학에 관한 책 '《세계》를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책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진술했다.



1637년부터 테카르트는 존재론과 인식론 문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해에 《방법서설》을 출판했다.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는
1641년 《제1 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후에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1649년 스웨던 여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을 받아
스톡홀름에 부임하여 여왕에게 철학을 강의하고,

아카데미 창립에도 관여하였으나,
1650년 초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학문 중에서 수학만이 확실한 것으로
철학도 수학과 같이 분명하고 명확히 드러나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근대 철학을 열었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그로 인해 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의심하였는데,
그렇지만 최후의 의심할 수 없는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도달,
이것이 철학의 근본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찬조 음악]


그 기계적 우주관은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수학에 있어서는
해석 기하학을 창시하여 근대 수학의 길을 열어놓았다.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도 유명하지만 철학자로의 삶도 살았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진리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저서 《방법서설》에 잘 나타나 있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감각도 배제 했는데, 이는 감각도 반드시 맞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달한 결론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다.

[찬조 음악]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방법서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능한 악마가 인간을 속이려 한다고 해도,
악마가 속이려면 생각하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일철학을 위한 성찰'에 나와있다.)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명제이며,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이 명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데카르트가 사용한 관념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데카르트는 본유관념과 인위관념, 외래관념을 분리하였다.

여기서 외래관념은 밖에서 오는 관념을 말하고
인위관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며,
본유관념은 태어나면서 부터 존재하는 관념을 말한다.

본유관념은 '삼각형의 꼭짓점은 세개이다.',
'정육면체의 면은 여섯개 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두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와
같은 것으로, 언제나 확실하게 참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말한다.

덧붙여 데카르트는 신의 관념도 확실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존재론적 증명을 통하여 신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증명은 나중에 칸트의 비판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려 실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바로 연장과 사유이다.

연장은 구체적인 부피와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를 말하고,
사유는 연장과 달리 부피와 같은 것이 없는 실체를 말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연장과 사유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사유는 몸을 제어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몸과 사유를 이어주는 부분을 송과선으로 보았는데,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이 송과선을 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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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이름]
데카르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어머니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갓난아기였던 그는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고
의사마저도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다행히도 마음씨 고운 한 간호사의 보살핌 덕분에
그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때의 일로 인해 그의 이름을 ‘중생(重生)’이란 뜻의
데카르트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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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그는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어려서부터
조용한 곳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철학가 기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꼬마 철학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부자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그는 스스로 형제 중에서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형제들과도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자주 집을 떠나 혼자 여행을 다녔고
친구들에게 마음을 쏟았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 중에서 사팔뜨기 인형을
제일 좋아했던 그는 커서도 유독 장애인들에게 호감을 보였다.



[수학]
8세 때 데카르트는 라 플레슈 La Fleche의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여
고전문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데카르트의 선생님은 그를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품행이 단정하고, 내성적이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학교의 구시대적 교육방식에 불만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배운 교과서를 잡다한 지식의 쓰레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1613년에 파리로 가서 법률을 배웠고
1616년 푸아티에 poitier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식견을 높이기 위해
1617년 그를 다시 파리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도시 생활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수학과 관련된 도박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1617년의 어느 날 한가로이 길을 걷던 데카르트는
벽에 붙은 광고지를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광고지가 붙은 곳으로 다가갔다.

광고는 네덜란드어로 적혀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행인을 발견한 데카르트는
광고에 적힌 내용을 물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네덜란드 대학교 교장이었고
데카르트에게 광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광고는 어려운 기하학 문제가 적혀 있었고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사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데카르트는 단지 몇 시간 만에 문제를 풀었고
자신에게 수학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해석기하학]
"내가 바라는 것은 평온과 휴식뿐이다."라고 말한
수학의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 수학자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해 눈뜨기 힘든 아침 시간,

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같은 또래의 보통 소년들과는 달리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였다.

중년이 된 데카르트는 학교생활을 되돌아보고 나서
이 길고 조용한 아침의 명상이 자신의 철학과 수학의
참다운 원천이었다고 얘기한다.

그 예에 해당하는 일화가 있다.

[기하학과 대수학을 하나로 통합]


그가 처음으로 도입한 좌표 개념의 발견과 관련된 일화인데,
30년 전쟁 당시 용병으로 참여하였을 당시
몸이 약해 병영의 침대에 누워 천장에 붙어있는 파리를 보고

파리의 위치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좌표'라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학]
어느 날 데카르트는 문득 자신에게
이상한 성향이 있음을 자각한다.

사시(斜視: 사팔뜨기)라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사람만 보면
왠지 더 친근감을 느끼고 이유 없이 호의를 베푼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던 데카르트는 결국 어린 시절에
한 소녀를 사랑한 적이 있었고,
그녀의 눈이 사시였음을 기억해 낸다.

사랑에 빠진 데카르트에게 소녀의 신체적 결함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사랑의 감정이 그녀의 신체적 결점을 압도하여,
사시라는 결점은 훗날 무의식적으로 좋은 감정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경험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어떤 선택의 순간에 부닥쳤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받은 감정적 충격이나
상처 때문에 종종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철학의 왕자’로 군림했던
데카르트는 이 사소한 일화를 통해, 감정이 어떻게
이성의 판단을 방해하는지 깨닫는다.

[수학과 철학]
르네 데카르트는 30년전쟁 때 울름가 주변의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그곳은 겨울에 너무나 추웠다.

그가 술회한 바에 의하면, 그는 어느 벽난로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그 난로 속에서 잠이 들었다가 세 가지 꿈을 꾸었다.

첫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심한 바람이 불고 있는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오른쪽 다리가 약하여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는데
그 근처에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한 사람이 있어
데카르트 자신이 그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는데,
두 번째 꿈에서 그는 미신으로 흐려지지 않는
과학의 눈으로 무서운 폭풍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폭풍은 일단 그 정체가 폭로되고 난 후에는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세 번째로 꿈을 꿀 때는, 테이블 위에 사전과 그 옆에
다른 책이 놓여 있는데

‘나는 어떠한 생활을 보내야 할 것인가?’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오며 낯선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Quiet Non’(그는 이것을 인간의 지식과 학문의
‘참과 거짓’이라 해석함)으로 시작하는 시를 보여주었다.

그는 세 번째 꿈에서 깨어난 후에 이미 꾼 꿈들의 의미를
생각하였는데 첫 번째 꿈은 과거의 오류에 대한 경고이며,

두 번째 꿈은 그를 사로잡은 진실의 정신이 내습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꿈은 모든 과학의 가치와 참된 지기에의 길을 열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사건은 데카르트가 참된 지식으로의 접근법에 대하여
스스로가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미 이 꿈들을 꾸기 8개월 전 베크만에게 보낸 보고에
‘앞으로는 기하학에서 발견해야 할 것은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계획을 공언하였다.

기하학과 대수학의 결합으로 두 개의 학문 영역을
하나의 학문으로 파악하는 데 성공한 데카르트는
더 나아가 모든 학문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통합하려 하였다.

모든 문제는 동일하고 보편적인 ‘수학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 방법을 그는 '보편수학’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철학의 진술은 수학의 진술처럼 아주 기초적이고,
논리적이고, 엄격해야만 하는데 아직 그러지 못했다.

철학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했다.

그럼으로써 모든 근본 중의 근본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근대철학의 토대를 발견했으며,
이 토대 위에 하나의 새로운 철학교회를 세웠다.



[죽음]
1649년 2월,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는 데카르트를
스웨덴 황궁으로 초대했다.

[스웨덴 여행]



“크리스티나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을 지녔다.
그녀는 여왕으로서 위대한 학자의 시간을 뺏을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그녀에게 사랑에 관한 글을 써서 바쳤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그가 무시해왔던 제목이었다.”

여왕은 일주일에 세 번 그에게서 철학 강의를 들었는데
반드시 새벽 5시에 강의하도록 명했다.

데카르트는 그동안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왕의 명에 따라 일주일에 3일은 한밤중에 일어나서

스웨덴의 찬 공기를 가르며 자신의 숙소에서
여왕의 서재로 찾아가야 했다.

[찬조 음악]


1650년 2월 1일, 새벽 찬 바람을 맞은 데카르트는 감기에 걸렸고,
곧바로 폐렴으로 악화되었다.

데카르트는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세상을 떠났다.

[추모 음악]


그의 유골은 1667년에 파리에 돌아왔고
주느비에브 뒤몽 성당에 안치되었다.

[추모 트로트]


1799년 프랑스 정부는 그의 유해를 프랑스 역사관으로 옮겨
프랑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과 함께 모셨다.

1819년 이후 그의 유골은 다시
생 제르맹 데프레 성당에 안치되었다.

데카르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데카르트, 유럽 르네상스 이후
인류를 위해 처음으로 이성의 권리를 쟁취하고 확보한 사람이다.”


[추모 음악]


[업적]
르네 데카르트는 근세사상의 기본 틀을 처음으로 확립함으로써
근세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는 이원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과학적 자연관과 정신의 형이상학을 연결지어

세상을 몰가치적이고 합리적으로 보는 태도와
정신의 내면성을 강조하였다.

대륙철학의 합리주의의 근본이 된 그의 회의론은
다양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함으로써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는 것이었다.

그는 수학을 이러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본 신념으로
여겨 철학을 포함한 모든 진리를 수학적인 원리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철학 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적인 업적도 이룩하였다.

1625년부터 파리에 거주하며 광학을 연구한 끝에
빛의 굴절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1637년 《방법서설》 및 이를 서론으로 하는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시론을 출간하였다.

수학자로서의 그는 데카르트 좌표계(직교 좌표계)를 만들어
해석기하학의 창시자로 알려졌으며
방정식의 미지수에 최초로 x를 사용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거듭제곱을 표현하기 위한
지수의 사용 등을 발명했다.

르네 데카르트는 다양한 여러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수학을 만든 혁명적인 수학자이며 동시에
고대 그리스 과학을 모두 집대성한 철학자이자 과학자이다.

그의 보편적인 수학은 본인이 예견했듯이
광학, 천문학, 기상학, 음향학, 화학, 건축학, 물리학,
공학, 회계 등에 다양하게 응용되었으며

본인이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분야인 전기학, 인공두뇌학,
미생물학, 유전학, 경제학 등에도 응용되고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며,

[찬조 음악]


이 절대적인 진리를 이용해 구성요소의 진리값을 이용한
다른 진술을 증명하는 법을 개발했다.

그는 과학을 대하는 데에 있어 크기, 모양, 운동 등의
경험적인 양에 집중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이론에 따라
진공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세 가지 물질의 연장이
곧 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르네 데카르트의 글과 방법론을 곁들인 데카르트적 회의는
서양철학의 특징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관한 부분은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수학적 업적]
르네 데카르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해석기하학의 창시이다.

《Discourse on
Method》에 포함된 소논문 《La Geometrie》(1637)은
수학의 역사에 큰 공헌을 했다.

논문에서 그는 곡선에 대수 방정식을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해,
모든 원추곡선을 단 한 종류의 2차 방정식으로 표시하는 데에
성공하고,

그를 제시함으로써 과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숫자(밑) 위에 작은 숫자(지수)를 씀으로써
거듭제곱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그의 수학적 업적은 라이프니츠가 제안하고
뉴턴이 발전시킨 미적분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실계수의 n차방정식의 양의 실근의 개수는
다항식 f(x)의 실수의 열사이에서 일어나는 부호변화의 수와
같거나 그 수보다 짝수 개만큼 적다."는

데카르트의 부호법칙은 다항식의 근의 개수를 구하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방정식의 미지수에 처음으로 x를 사용한 것도
르네 데카르트의 업적이다.

1618년 르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나
이삭 베크만을 조우했으며,
그에게 많은 문제에 수학을 적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는 수학이 어떻게 류트의 음정을 맞추는 데에
정확하게 응용될 수 있는지와 무거운 물체가 물 속에 들어갔을 때
수면의 높이 변화를 나타내는 대수적인 공식을 제안했다.

또한 진공 상태에서 물체가 낙하할 때 임의의 시간에서
그 물체가 가속하는 속도를 예측하는 방법과

어떻게 회전하는 팽이가 똑바로 서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공중에 뜰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베크만의 일기를 통해 1618년 말까지 데카르트가 이미
기하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수 방정식의 적용을
여러 방면에 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네 데카르트는 수학을 "불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기하학을 "연속적인 양의 과학"으로 보았으나
그 둘 간의 장벽은 해석기하학이 창시됨에 따라 허물어졌다.

그는 산술과 대수학은 그저 숫자의 과학이 아니라
무리수의 사용을 정의하고 새로운 수학의 가능성을 연
명제의 과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법서설(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을 통해
그는 수학과 모든 과학은 상호관계적이며

둘을 따로 생각하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쉽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업적]
과학자로서의 르네 데카르트는 물리학 분야에 큰 공헌을 했다.

10살 때, 라 플레슈(La Fleche)의 학교에 입학해 논리학,
윤리학, 물리학과 형이상학, 유클리드 기하학과

새로운 대수학 및 갈릴레이의 망원경에 의한
최신 업적에 이르기까지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과학자로서의 초석을 다졌다.

1618년 르네는 군에 자원 입대하여 장교로서 복무하였는데,
이 때 그의 과학적 흥미는 탄도학, 음향학, 투시법, 군사기술,
항해술 등까지 발전시켰다.

그 해 겨울 아마추어 과학자이자 당시 수학의 지도자였던
이삭 베크만을 처음 만나 다시 이론적인 문제와
물리학에 흥미를 가진 이후 몇 년간 물리학분야에 있어

빛의 원리, 공학, 자유낙하 등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이론적 전개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가장 작은 수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이미 알려져 있는
모든 사실을 설명하고,

더구나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까지 이끌어 내는 방식이다.

"스넬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굴절의 법칙이
이 때 발견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저서 《굴절광학》에서 독자적으로 증명한
"굴절의 법칙"을 언급하는 한편,
시력에 관한 다양한 연구 내용을 설명했다.

그는 《천체론(Le monde)》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후일 뉴턴에 의해 거부된 그의 와류이론에 의하면
에테르의 미소한 입자들이 혹성이나 태양 주위에
거대한 회전흐름,

즉 소용돌이 속에 떠 있는 어린이의 보트와 같이,
이 태양의 소용돌이 속으로 운반되고,
달도 마찬가지로 지구의 주위로 운반된다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Clifford Truesdell로부터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현대적 의미의 시초이다."
(Truesdell 1984,6)라는 평을 들었다.

데카르트는 사물의 본질을 외연(extension)으로 보았다.

사물에 체계적 의심을 적용해
그것의 감각적 특징들을 지워 나간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간의 일부를 채우고 있는
무색, 무미, 무취의 어떠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공간은 물질로 꽉 차있는 플레넘(plenum)으로,
불의 원소, 공기의 원소, 흙의 원소의
세 종류의 물질로 채워져 있다.

다른 어떠한 감각적 속성이 없이도
크기, 모양, 운동 등으로만 물질을 정의해

차가움, 뜨거움, 습함 등의 질적인 개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은 데카르트는

플래넘을 구성하는 작은 원소들의 충돌이
자연의 크고 작은 변화들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또한 데카르트는 그의 책에서 눈에 대한
해부학적 구조를 설명하며 빛이나 외부 이미지가

동공과 내부 유리체를 거쳐 굴절되고 상이 뒤집혀
망막에 맺히고 시신경을 통해 자극이 전달되는 과정 뿐 아니라

눈이 얼마나 상을 최대화하고 또렷하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과정을 현미경과 망원경의 개념에까지 확대시켰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렌즈 깎는 법을 설명하며 망원경과
현미경의 유용성을 언급했다.

또한 생물학 분야에서의 르네 데카르트는 윌리암, 하베이와
나란히 근대 생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그는 전생리학의 기초가 도는 대가적 가설을 도입했다.

다양한 동물의 머리를 해부해보며 상상력과 기억이 위치하는 곳을
찾기 위한 연구를 했으며,
네덜란드에 머무른 기간 동안 많은 시간을 들여 인체를 해부했다.

데카르트는 가설적 모델 방법을 통해 육체 전체를
일종의 기계로 간주해 눈의 깜빡임과 같은

자율적인 동작 현상과 보행과 같은 복합 동작에 있어
많은 관찰과 다양한 기계론적 설명을 내세웠다.

이러한 모든 동작과 운동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그의 방식은 근대적 생리학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는 자연에서 영혼을 제거시켜 중세적 자연관을 밀어내고
기계적 세계관을 정당화함으로써

자연계의 만물을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철학]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데카르트적 회의는 르네 데카르트의 글과
방법론이 곁들여진 방법론적 회의이다.

데카르트적 회의는 자신이 믿는 바의 진실성 여부에 대해서
의심하는 체계적인 방법으로 철학의 특징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 의심의 방법은 절대적인 진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믿음을 의심한
르네 데카르트에 의해 서양 철학에 대중화 되었다.



[특성]
데카르트적 회의는 방법론적이다.

데카르트적 회의의 목적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으로서
의심을 절대적인 진리를 찾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특히나 경험적 정보의 오류 가능성은
데카르트적 회의의 대상이 된다.

데카르트 회의론의 목적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 중 가장 저명한 것은 토대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데카르트의 회의론은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하는 것으로서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기본 신념으로부터
데카르트는 다음 지식을 파생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지식을 상대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를 토대로 쌓아갔다.

이는 대륙철학의 합리주의를 축약시켜 보여주는
원형적이고 중요한 예시이다.

[기법]
데카르트적 회의는
(4개의 과학적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실이라고 아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둘째, 이 사실들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는 것.
셋째, 간단한 문제들을 먼저 해결하는 것.
넷째, 더 확장된 문제들의 완전한 목록을 만드는 것. )

의심을 과대하게 하는 것이므로 의심의 경향성을 가진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기준으로의 지식은 단순히 합리적인 것 아닌
가능한 모든 의심을 넘어선 것을 말한다. )

그의 성찰(1641)에서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로만 이루어진 믿음체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믿음의 진실 여부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의 방법]
데카르트적 회의의 원조인 르네 데카르트는 모든 신념,
아이디어, 생각, 중요성을 의심에 두었다.

그는 어떠한 지식에 대한 그의 근거나 추리 또한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식의 초기 상태인 감각적 경험은
잘못되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의심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보는 것은 환각일 수도 있다.

그가 보는 것이 환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즉, 만약, 어떠한 신념이 논박될 수 있는 방법이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이의 진실 여부에 대한 근거가 불충분한 것이다.

이 것으로부터 데카르트는 꿈과 악마라는
두 가지 주장을 제안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자신이 깨어있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을
가정했을 때,

우리가 꿈을 꿀 때 믿기 어려운 와중에
현실 같을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깨어있을 때의 경험과 꿈을 꿀 때의 경험을 구별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꿈이라는 생각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세계에 산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성찰(1641)의 끝에 가서는 적어도 회상을 할 때에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악의적 천재에 의해
조정 당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천재는 똑똑하고 강하며 남을 잘 속인다.

데카르트는 그가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허울적인 세상을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찰(1641)에서 데카르트는 한 사람이 미쳤었다면,
그 광기가 그 사람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정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우리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부터 막는
어떤 강력하고 교활한 악마가 존재할 수 도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그의 모든 감각들이 거짓말을 할 때,
한 사람의 감각이 그 사람을 쉽게 속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자신에게 거짓을 할 이유가 없는
강력한 존재가 심어두었으며

그의 강력한 존재에 대한 생각은
사실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찬조 음악]


[코기토 에르고 숨]
자신의 존재조차도 의심의 방법을 적용하여 의심하는 것이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코기토 에르고 숨)이란 말을 탄생시켰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려고 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합리론]
인식론에서 합리주의란 사실의 기준이 감각이 아닌
지적이고 연역적인 것이다.

이 방법을 강조하는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의
합리주의자들이 있다.

추리력이 지식을 얻는 다른 방법들보다 우선적이라는
온건한 위치부터 추리가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극단적인 위치까지 존재한다.

근대 이전의 합리주의는 철학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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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계몽운동 이후로, 합리론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에서와 같이 수학적인 방법을
철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합리주의는 영국에서 경험주의가 우세했던 것과는 달리
유럽의 대륙 쪽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대륙 합리주의라고도 불린다.

합리주의는 경험주의와 자주 대조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합리주의를 믿으며 동시에 경험주의를
믿을 수 있다는 점만을 봐도 아주 넓게 보았을 때
이 두 관점은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단적인 경험주의자는 모든 생각이 외적인 감각이던
내적인 감정이던 경험을 통해 얻는다는 관점을 갖는다.

따라서 지식은 본질적으로 경험으로부터 유추되거나
경험을 통해 직접 얻는다는 입장이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에 있어서 논점이 되는 것은
인간의 지식의 근본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증명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합리주의의 몇 부류의 지지자들은 기하학의 자명된 이치와 같은
근복적이고 기초적인 원칙들로부터
나머지 모든 지식들을 연역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을 가졌던 철학자들로는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들 수 있다.

이 둘은 데카르트에 의해 제기 되었던
인식론 상의 근본 원리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합리주의의 근본적인 접근의 발전을 가져왔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둘 다 원칙적으로는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모든 지식이 추론만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수학을 제외한 영역에서는 인간에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관찰했다.

합리주의자와 경험주의자의 구별은 나중에 일어난 일로
그 시기의 철학자들은 알지 못했다.

그 구별 또한 애매하여 대표적인 세 합리주의자들은
경험주의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평가된다.

또한, 많은 경험주의자들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보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가까웠다.

[합리주의와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불변의 사실들에 대한 지식들만 추리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지식들은 과학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경험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꿈이 감각적 경험과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지만,
이러한 꿈들은 사람에게 지식을 제공할 수는 없다고 했다.

또한, 자각하고 있는 감각적 경험은 환각이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감각적 경험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그 결과로 데카르트는 사실을 찾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든 믿음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연역적으로 얻어내었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방법서설,
제1 철학에 관한 성찰과 철학원리에 실었다.

데카르트는 지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지식으로 분류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사실을 찾아내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얻어낸 사실들은 데카르트에 의하면
어떠한 감각적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추론을 통해 얻어낸 사실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작은 요소들로 나뉘어

연역적인 방법을 통해 현실에 대한 명백한
사실들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그의 방법의 결과로 추론은 지식을
결정짓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 방법은 감각의 도움 없이 행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은 어떠한 경험의 간섭도 받지 않은 결론이다.

이는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서
다른 모든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원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그의 형이상학의 제일원리인 동시에,
견실한 과학에 도달하기 위한 제일 원리였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사상에 반동적이었으며
과학에서 발견된 사실을 철학적인 세계관에 옮기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갈릴레오의 기하학적 물리학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데카르트가 보기에 그것은 엄밀성이 부족했다.

감각에 기초한 물질 세계의 개념과 좀더 엄격한
수학적인 물질세계의 개념을 구별하는 가운데,
데카르트는 후자가 더 객관적인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물질 세계를 지각하는 감각적 경험은
주관적이며 자주 착각을 일으키고 외부세계와 동일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목표는 주관을 넘어서 객관적 지식을
확보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따라서 그가 취하는 입장은 감각적 경험이 아닌 이성관념으로,
이는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선험적 관념에 따라,
실체를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두 가지로 구분했다.

왜냐하면 정신과 육체는 명확하고 명료한 속성들의
전적으로 구별되는 두 조합을 통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실체의 본성은
사유하는 것(res cogiton)이며 물질적인 실체의 본성은
연장된 것(res extensa)였다.

먼저 정신은 연장적인 특징이 없고 불가분적이므로,
연장을 지니고 있는 물질과는 판명하게 구분된다.

데카르트는 육체 없이도 존재하는 나를
상상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정신을 물질과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실체로 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좁은 의미에서는
순수한 지성(수학, 철학을 탐구하는)을 뜻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상상 작용, 감각 작용이 속한다.

감각 작용은 신체에서 온 감각인 내부 감각과
외부사물로부터 비롯된 외부 감각으로 나뉜다.

내부감각은 다시 어디에서 오는지 위치를 알 수 있는
고통, 배고픔, 목마름과 같은 관념과
위치를 알 수 없는 분노, 슬픔과 같은 정념으로 나뉜다.

이 신체들의 내부감각은 정신을 속여
가짜의지를 생성해서 신체를 움직이게 한다.

그에게 있어 정신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이며,
제한 되어있지만 신과 동일한 유형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신적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신이었으며,
이런 배경으로 인해 순수하게 지적인 능력인 상상력이나
감각 지각과 같이 육체를 전제로 하는 능력과
구분된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물질(육체)은 연장을 가지고 있으며,
기하학적 공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섞여있거나 겹치지 않는다.

또한 기하학의 원리에 따라 무한 분할이 가능하며
이러한 모든 물체의 위치와 공간은
기하학적 공간에서 좌표화 가능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공간 개념에 있어서
빈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항상 물질에 의해 점유되어 있는 것으로서
운동은 연쇄적으로 각 물질의 위치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관념들 자체는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것으로
각 관념들은 물체를 특수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또한 정신과 육체는 섞여있는 것이다.

과거 플라톤의 정신과 신체는 선원과 배의 관계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것이었으나,
데카르트는 이 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송과선이라는
솔방울 모양의 샘을 통해 설명하려 한다.

육체가 신경선으로 동물정기라는 기체화된 혈액을 자극하면
인과적으로 감각적 내용이 송과선을 통해
정신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설명에 대해 기계적인 방식으로
‘자연에 의해 확립되었다’라는 주장을 한다.

[데카르트 사상과의 대립]
[아이작 뉴턴]
과학혁명 이전의 자연관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자석들은 왜 서로 잡아당기거나 밀어낼까?

상처에 약을 바르면 왜 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 르네상스 자연주의에서는
자연을 살아있는 신비한 생명체로 파악하며,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잡아당기는 이유는
서로가 공감을 하기 때문이고,

N극과 N극이 밀치는 이유는 서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식물이 성장하고,
동물이 스스로 자각해서 움직이는 모든 운동의 원리를
영혼으로 보았다.

이렇게 자연을 마치 생명과 감정이 있는 인간처럼 여기는
르네상스 자연주의는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자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추구할 동기로 부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근대 과학은 자연에서 신비로움을 제거해 버렸다.

자연은 객관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고,
수학적 법칙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으며,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 근대 과학의 출발점이 된 것이 바로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이다.

데카르트는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을 제시하며,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규정했다.

기계적 철학은 자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 현상이란 이런 물질들의 운동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전제하고,

각종 자연 현상들을 미세한 물질들의
직선 운동과 충돌로 설명했다.

앞에서 르네상스 자연주의자들이 자석을 공감,
반감을 이용해서 설명했던 것에 비해서,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서는 입자와 운동이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자석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구멍들이 있고,
자석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나사들이 배열되어 있어서 자석의 구멍을 통해서
작은 나사들이 통과하는데,

나사들의 운동 방향에 따라서 자석은 서로 끌리기도 하고,
서로 밀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자연주의에서 자석은 외부에서
특별히 힘이 작용하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는

매우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지만,
기계적 철학의 눈으로 본 자석은 신비로움을 잃었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자연을 합리적이고 명쾌하게
이해가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었다.

기계적 철학에서는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구분조차 불필요했다.

데카르트에게 자연은 단지 기계에 불과했으며,
그 자체의 목적이나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자연에서 영혼을 제거시켜서,
중세적 자연관을 밀어내고 기계적 세계관을 정당화했다.

이로써 자연은 기계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자연계의 만물은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17세기 과학혁명의 기본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자연은 정확한 수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완전한 기계"라는
그의 생각은 일생동안 하나의 가설로 남아있어야 했다.

데카르트의 꿈을 실현시키고,
과학혁명을 완성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에서 "운동"이라는 개념을 이어받아,
뉴턴도 자연 현상의 기본을 운동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운동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데카르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입자의 운동에 수학적 성격을 합친 "힘"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운동을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다시 말해서 "힘"을 운동의 원인으로 설정하여,
힘의 수학적인 표현을 찾아내고,

거기서부터 가속도, 속도, 물체의 움직이는 궤적 등을 계산하는
역학의 방법을 정식화했다.

뉴턴은 결국 데카르트를 뛰어넘지만,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데카르트와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다.

복잡한 자연을 단순하게 분해해서 이해하는 방식이나,
운동에서 자연 현상의 근원을 찾고,

그 운동을 수학적인 언어로 풀어내려고 했던 점 등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경향이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까지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영국의 뉴턴 중 누가 옳았는가" 하는 문제가
양국 과학자들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두 사람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이 부각되어 왔지만,
사실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 공유하는 것이 더 많았던 사람들이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을 그렇게 항목별로 비교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와 뉴턴의 가장 큰 공통점은
우리가 자연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새롭게 규정했다는 점에 있다.


20세기 초에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일상 세계는 데카르트와 뉴턴이 확립해 놓은
고전역학의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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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실체란 자신 안에 있으며,
자신에 의하여 생각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즉, 실체는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으로 존재함을 뜻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 생각된다는 것"은
그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실체를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그 정의를 실체로 적용할 때,
의미를 악화시켜서 자신이 내린 정의에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그는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서 신의 도움만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고도 정의한다.

이는 실체 개념을 창조물에까지 확대시킨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는 자신이 내린 실체 개념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는 자립적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 실체"라는 말은
불합리한 개념이며, 신만이 실체라고 주장한다.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도 없다"고 한 스피노자의 정리에서 잘 드러난다.

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방식으로
세계에 개입하는지에 대해서도
두 사상가는 커다란 입장 차이를 보인다.

이신론을 주장하는 데카르트의 신은 인격을 소유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 소멸, 심지어는 개입할 수도 있다.

반면 스피노자는 신을 그런 초월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신의 의지에 의한 "기적"같은 것은
신의 작동 방식을 법칙으로 이해하고자 한
스피노자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종교적인 믿음]
르네 데카르트의 종교적 믿음은 학계에서 엄밀히 논쟁되어 왔다.

그는 <제1철학에 관한 성찰>의 목적들 중 하나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서 데카르트는 이원론 또는
무신론을 믿은 것으로 비난받았다.

동시대의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철학에서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신 없이 지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에게 손가락 움직임 하나만으로
세계를 확립하라고 재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 후에 그는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스티븐 고크로져의 데카르트 전기는 그가 죽는 날까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단호하고,

열정적인 열망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에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고 저술한다.

데카르트가 스웨덴에서 죽은 후,
크리스티나 여왕은 스웨덴의 법이
신교도 지도자를 요구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로 바꾸기 위해서
그녀는 왕위에서 물러났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그녀가 장기적으로 접촉한 사람은
개인 지도 교사인 데카르트뿐이었다.

[주요 저서]
데카르트 전집: Oeuvres de Descartes, 편집
Ch. Adam et P. Tannery, 11판, 1982-1991 Paris.

《음악개론》: Compendium Musicae, 1618년

《정신지도규칙》: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
(Rules for the Direction of the Mind), 1626-1628년

《인간, 태아발생론》: L'Homme(Man),
1630-1633년, 1662년 출판

《세계》: Le Monde(The World), 1630-1633
년, 1664년 출판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Discourse on the
Method), 1637년 문예출판사 1997

《기하학》: La Geometrie(Geometry), 1637년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1년
양진호, 옮김, 책세상 출판사 2011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1641년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7

《철학의 원리》: Principia philosophiae, 1644년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어떤 비방문에 대한 주석》: Notae in programma
(Comments on a Certain Broadsheet), 1647년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The Description of the Human Body, 1647년

《뷔르만과의 대화》: Responsiones
Renati Des Cartes(Conversation with
Burman), 1648년

《정념론》: Les passions de l'ame(Passions of the Soul)1649년
김선영 옮김, 문예출판사, 2013

《음악에 관한 소고》: Musicae Compendium(Instruction in Music),
1656년
사후 출판

《서한집》: Correspondance, 1657년
클라우데 클레르슬리에(Claude Clerselier)에 의해 출판

한국.net

[어록]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찬조 음악]


동물은 기계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일생에 한 번은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자연의 모든 것은 수학적으로 일어난다.

지금까지 철학이라 일컬어 온 모든 것들을
가장 적게 배운 사람들이 참된 철학을 배울 능력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아주 느리게 걷더라도 늘 곧은 길을 따라간다면,
뛰어가면서 곧은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

[챗 GPT 답변에 오류(hallucination: 환각 등)가 있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from https://chat.openai.com/chat)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제일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은?


레네 데카르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플라톤(Plato)을 꼽았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이상주의적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철학적 사유와 방법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따라서, 르네 데카르트는 플라톤을 제일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 중 하나입니다.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좋아할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


레네 데카르트는 합리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합리적인 분석과 추론을 중요시했습니다.

[찬조 트로트]


그러므로, "이성적인 사랑"이라는 제목의 한국 발라드 노래가
르네 데카르트가 좋아할 만한 노래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찬조 음악]


이 노래는 이성적인 선택과 이성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학적인 관점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episode)는?


레네 데카르트의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는
그의 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데카르트는 "명상록" (Meditations)에서
그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뇌가 현재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를 통해 외적인 세계에 대한 감각적인 인식보다는
내면에 내재된 진리에 대한 인식이 더욱 진실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일화는 데카르트가 자신의 철학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기초로 한
"초기지식" (Cogito Ergo Sum) 이론을 발전시켜,
인간의 존재와 인식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게 됩니다.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일까?


레네 데카르트는 양심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학문적인 연구에서 참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데 큰 열의를 쏟았지만,
그의 철학적인 입장은 항상 진실과 도덕적인 가치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는 "명상록" (Meditations)에서
자신의 인식론적 철학적 입장을 고찰하면서,
참된 지식과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솔직하고 정직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또한 "의심하는 정신" (Le Discours de la Methode)에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그의 철학적인 태도에서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양심적인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저는 인공지능 언어모델로써
역사적 인물의 개인적인 특성에 대한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르네 데카르트의 양심 등급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인 입장과 업적으로 볼 때,
그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양심적인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

[Gemini AI 답변에 오류(hallucination: 환각 등)가 있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from https://gemini.google.com)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Philosopher, France)가
제일 좋아한 역사적 인물은?


르네 데카르트가 가장 좋아한 역사적 인물을 명확하게 꼽는 것은
자료 부족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과 행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몇 명의 후보가 있습니다.

1.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of Hippo)
데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애독했으며
그의 철학적 사고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인간의 내면성과 자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탐구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영감을 주었다고 평가됩니다.

2.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
데카르트는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에 공감하며
과학적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베이컨처럼 인간의 오류를 극복하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경험적 관찰과 논리적 추론에 기반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3.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
데카르트는 갈릴레오의 과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heliocentric (태양 중심) 모델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또한 갈릴레오처럼 과학적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기존의 권위와 맞서 싸우는 용기를 갖추었습니다.

4. 피타고라스 (Pythagoras)
데카르트는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사고방식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특히 피타고라스의 "모든 것은 숫자이다"라는 주장에
영향을 받아 수학적 원리를 모든 학문 분야에 적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5. 세네카 (Seneca)
데카르트는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글에서 윤리적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는 세네카처럼 인간의 내면의 평온과 덕성을 추구하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이 외에도 데카르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모크리토스 등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장 좋아한 인물을 단 한 명만 꼽는 것은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복잡한 사상을 고려할 때 무리한 일입니다.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Philosopher, France)가
좋아할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


저는 텍스트 기반 AI라서 그것은 저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Philosopher, France)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episode)는?


르네 데카르트는 17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지만,
그의 삶에는 재미있는 일화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의 철학적 업적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로 흥미롭습니다.

1. 난로 앞에서 꾸는 꿈
1619년 11월 10일 밤,
데카르트는 따뜻한 난로 앞에서 잠시 졸았습니다.

그때 그는 생생한 꿈을 세 번 꾸었습니다.

첫 번째 꿈에서는 낯선 학교에서 과학과 철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었고,
두 번째 꿈에서는 어떤 시를 낭송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꿈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책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데카르트는 이 꿈들을 자신의 삶과 미래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로 받아들였고,
이후 철학 연구에 더욱 몰두하게 됩니다.

2. 스웨덴 여왕의 초대와 죽음
1649년, 데카르트는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의 초청을 받고
스웨덴으로 떠났습니다.

크리스티나는 철학에 대한 열정이 있는 여왕으로,
데카르트에게 매일 아침 5시에 철학 수업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평소 늦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고,
스웨덴의 추운 날씨에도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폐렴에 걸려 1650년 2월 11일에 스웨덴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3.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탄생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확증하기 위해
의심을 방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감각 경험, 기억, 심지어 자신의 신체까지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심할 수 있는 자아,
즉 생각하는 능력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탄생 배경입니다.

4. 난로 옆에서 명상하는 습관
데카르트는 몸이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아침 늦게까지 잠자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따뜻한 난로 옆에서 누워서 명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 습관은 그의 철학적 사색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됩니다.

5. 직교 좌표계의 발견
데카르트는 수학에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파리가 천장에 앉았다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직교 좌표계를 고안해냈습니다.

이는 현대 수학과 과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처럼 데카르트는 철학적 업적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일화들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의 일화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철학적 사고에 대한 이해를 도와줍니다.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Philosopher, France)는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일까?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양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진 철학자였지만,
그의 양심에 대한 견해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측면:
데카르트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도덕적 법칙,
즉 "양심의 명령"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법칙이 인간의 이성에 기반하며,
모든 사람이 타고난 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양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얻는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따라 행동할 때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적 사색에도 양심을 적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지
끊임없이 검증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
데카르트는 양심을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시켰습니다.

그는 사회적 정의나 공동체의 가치보다는
개인의 내면적인 도덕성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양심의 기원을 신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양심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관점에서 양심을 해석하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데카르트는 양심의 실제 적용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서 양심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론:
데카르트는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도덕적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양심에 대한 견해는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고,
종교적 관점에 의존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양심에 대한 견해를 평가할 때는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Philosopher, France)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Philosopher, France)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르네 데카르트의 양심 등급: B(우수)

긍정적인 측면:
데카르트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도덕적 법칙,
즉 "양심의 명령"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에 기반하며
모든 사람이 타고난 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얻는 방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따라 행동할 때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철학적 사색에도 양심을 적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지
끊임없이 검증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
데카르트는 양심을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시켰습니다.

그는 사회적 정의나 공동체의 가치보다는
개인의 내면적인 도덕성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습니다.

데카르트는 양심의 기원을 신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양심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관점에서 양심을 해석하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데카르트는 양심의 실제 적용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서 양심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등급 결정:
데카르트는 양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도덕적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양심에 대한 견해는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고,
종교적 관점에 의존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양심에 대한 견해를 평가할 때는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르네 데카르트의 양심 등급은 B(우수)입니다.

참고자료: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르네 데카르트, "성찰"
찰스 마이어, "데카르트"

다음은 르네 데카르트의 양심 등급을 평가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추가 정보입니다.

데카르트의 시대적 배경:
데카르트는 17세기에 살았습니다.

이 시대는 종교적 권위가 약화되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는 시기였습니다.

데카르트의 양심에 대한 견해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적 사상:
데카르트는 이원론적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인간을 물질적인 몸과 영적인 마음으로
구성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양심에 대한 견해는 그의 이원론적 철학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개인적인 삶:
데카르트는 평생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종교적 박해를 받기도 하고,
여러 번 전쟁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데카르트의 양심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론적으로, 르네 데카르트의 양심 등급은 B(우수)이지만,
그의 양심에 대한 견해는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의식 지도]

[아래의 의식지도 수치 평가는 단순 재미로만 참조 바람]

(from https://gemini.google.com)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 Map of Consciousness' 에서
1에서 1000까지 수치로 평가했을때,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Philosopher, France)의
의식지도 수치값은 ?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에서 르네 데카르트의
의식 수치값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저서, 행적, 그리고 호킨스의 의식 지도 모델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데카르트의 의식 수준은 500점에서 700점 사이에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1. 데카르트의 업적과 행적:
철학적 업적: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시초를 세운 인물입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유명하며,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철학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과학적 업적:
데카르트는 수학과 과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해석 기하학을 창시하고,
좌표계를 도입하여 기하학과 대수학을 연결했습니다.

저서: 데카르트는 "성찰", "방법서설", "관념론" 등
여러 중요한 철학 서적을 남겼습니다.

2. 호킨스의 의식 지도 모델:
호킨스의 의식 지도 모델은 인간 의식의 발달 수준을
1점에서 1000점까지 수치화한 모델입니다.

각 수준은 특정한 감정, 사고방식, 행동 양식과 연관됩니다.

500점: 용기, 의지력, 목적 의식
600점: 평온, 균형, 감사
700점: 사랑, 연민, 이해

3. 데카르트의 의식 수준 추측:
데카르트의 철학적 업적과 과학적 업적은 의식 지도에서
500점 이상의 수준을 나타내는 '용기', '의지력', '목적 의식',
'평온', '균형', '감사'와 같은 특징들과 일치합니다.

또한 그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데 능숙했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평생 동안
우울증과 불안감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했을 때,
데카르트의 의식 수준은 500점에서 700점 사이에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4. 참고 사항: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 모델은 개인의 의식 수준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의식 수준은 시간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의식 수준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5. 결론: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 모델에서
르네 데카르트의 의식 수치값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 행적, 그리고 호킨스의 의식 지도 모델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데카르트의 의식 수준은
500점에서 700점 사이에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의식 지도]

======================================

Rene Descartes

[Born] 31 March 1596
La Haye en Touraine, Kingdom of France

[Died] 11 February 1650 (aged 53)
Stockholm, Sweden

[Nationality] French

[Alma mater]
University of Poitiers (LL.B., 1616)

[Religion] Roman Catholic

[Era]
17th-century philosophy

[Region]
Western Philosophy

[School]
Rationalism, founder of Cartesianism

[Main interests]
Metaphysics, epistemology, mathematics,
physics, cosmology

[Notable ideas]
Cogito ergo sum, method of doubt,
method of normals, Cartesian coordinate
system, Cartesian dualism,
foundationalism, ontological argument
for the existence of God, mathesis
universalis, folium of Descartes

Rene Descartes
(31 March 1596~11 February 1650) was a
French philosopher, mathematician, and
scientist. Dubbed the father of modern
western philosophy, much of subsequent
Western philosophy is a response to his
writings, which are studied closely to
this day. He spent about 20 years of
his life in the Dutch Republic.

한국.net

Descartes's Meditations on First
Philosophy continues to be a standard
text at most university philosophy
departments. Descartes's influence in
mathematics is equally apparent; the
Cartesian coordinate system — allowing
reference to a point in space as a set
of numbers, and allowing algebraic
equations to be expressed as geometric
shapes in a two- or three-dimensional
coordinate system (and conversely,
shapes to be described as equations) —
was named after him. He is credited as
the father of analytical geometry, the
bridge between algebra and geometry,
used in the discovery of infinitesimal
calculus and analysis. Descartes was
also one of the key figures in the
scientific revolution.

Descartes refused to accept the
authority of previous philosophers, and
refused to trust his own senses. He
frequently set his views apart from
those of his predecessors. In the
opening section of the Passions of the
Soul, a treatise on the early modern
version of what are now commonly called
emotions, Descartes goes so far as to
assert that he will write on this
topic "as if no one had written on
these matters before". Many elements of
his philosophy have precedents in late
Aristotelianism, the revived Stoicism
of the 16th century, or in earlier
philosophers like Augustine.

In his natural philosophy, he differs from the
schools on two major points: First, he
rejects the splitting of corporeal
substance into matter and form; second,
he rejects any appeal to final
ends—divine or natural—in explaining
natural phenomena. In his theology, he
insists on the absolute freedom of
God's act of creation.

Descartes laid the foundation for 17th-
century continental rationalism, later
advocated by Baruch Spinoza and
Gottfried Leibniz, and opposed by the
empiricist school of thought consisting
of Hobbes, Locke, Berkeley, and Hume.
Leibniz, Spinoza and Descartes were all
well-versed in mathematics as well as
philosophy, and Descartes and Leibniz
contributed greatly to science as well.

His best known philosophical statement
is "Cogito ergo sum" (French: Je pense,
donc je suis; I think, therefore I am),
found in part IV of Discourse on the
Method (1637; written in French but
with inclusion of "Cogito ergo sum")
and §7 of part I of Principles of
Philosophy (1644; written in Latin).

(from naver.com wikipedia.org)


[Map of Consciousness]



Analytical,Algebra,Apart,Aristotelianism,Am,influence~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A


(MoC: Map of Consciousness) 의식 지도

MoC(의식 수준): 5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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