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안창호 安昌浩
Edit 2019-11-09 오전 5:59:41
PIG D+
Home http://bit.ly/1RNh2LU
SNS1 http://bit.ly/1VYhU1q
SNS2 https://en.wikipedia.org/wiki/Ahn_Changho
SNS3 http://bit.ly/1TgZZVK
 related < HOME > < EDIT> Click: 5325
      
Register your Global social NAME
안창호-島山 安昌浩, 독립운동가, 교육자, Korea
안창호, 安昌浩, Ahn Changho, 독립운동가


[출생-사망]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
서 - 1938년 3월 10일(60세)
[가족] 아들 필립 안, 딸 안수산


[경력사항]
대독립당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국무총리 서리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
1913.05 흥사단
1908.08 청년학우회
1907 신민회 설립
1905.04 공립협회 설립
1897 독립협회 관서지부 설립

[호] 도산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평남 강서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요약] 한말의 독립운동가·사상가. 독립협
회(獨立協會), 신민회(新民會), 흥사단(興
士團) 등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활동을 하
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호는 도산(島山)으로 평안남도 강서(江西)
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
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
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눈앞
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
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
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평
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萬
民共同會)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
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
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
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
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
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
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
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
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
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
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
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李甲)·양기
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
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대한
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하
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太
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
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
립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
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
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
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
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
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
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
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
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
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
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
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
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
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
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
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
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
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
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
論)》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립
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
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
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
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으며 2012년 1월 애틀랜타에 있는 마틴
루서킹센터내 명예의 전당에 아시아인 최초
로 헌액되었다.


[안창호 연보]
1878 11월 9일 평남 강서에서 출생.
1895 서울에서 구세학당에 들어가 그리스도
교도가 됨.
1897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를 개
최하여 연설.
1899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 남녀공학 학교
인 점진학교를 세움.
1902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노동과
공부를 병행.
한인공동협회를 만들어 <공립신보>를 발간.
1907 을사조약 체결 후 귀국하여 이갑, 양
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
1908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
1912 미국으로 망명하여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
기관지 <신한민보>를 창간.
1913 흥사단을 조직.
1924 미국으로 건너가 홍사단 조직을 강화.
1932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으나
윤봉길 의사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
되어 본국으로 송환 됨.
1938 두 번의 투옥 끝에 3월 10일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하던 중 사망.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6대 국무령

[임기] 1926년 5월 3일 ~ 1926년 5월 16일
[국적]
조선,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출생일] 1878년 11월 9일
[출생지]
조선 평안도 강서군 초리면 초리7리 봉상도
(도롱섬)
[사망일] 1938년 3월 10일 (59세)
[사망지]
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부산부
[거주지]
조선, 대한제국, 미국, 일제 강점기, 중화민국
[학력]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 졸업
[별명]
자는 치삼, 호는 도산 (島山), 산옹(山
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은 안광택
(安廣宅), 안창호(晏彰昊)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교)
[배우자] 이혜련
[자녀]
아들 필립 안, 안필선, 안필영, 딸 안수산, 안수라
[부모] 안흥국(부), 제안 황씨 부인(모)

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
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일생]
평안남도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
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
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
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
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
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
판이라 생각하여 1899년(광무 2년) 점진학
교, 1908년(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
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
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선생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
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
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
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
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
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
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
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
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
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
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
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
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
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
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
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
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창하였으며, 민족개
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
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
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
던 것이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
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
과 양성에 노력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
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윤치호, 이광수, 최
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등
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연설과 웅변에 두루
능통하였다.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
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한편 그는 이상적
인 정치인으로 유길준을 지목했다. 다른 이
름은 창호(昌鎬)이고, 자는 치삼, 호인 도
산(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
生),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
昊)이다. 아호 도산은 그가 태어나고 자
란 '도롱섬'에서 따서 붙인 것이다. 서울특
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김현진의 문인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도산 안창호는 평안남도 강서(江西) 초리
면 7리 봉상도(도롱섬)에서 1878년 11월 9
일 농부인 순흥 안씨 안흥국(安興國, 족보
상 이름은 안교진(安敎晋))과 제남 황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안치호
(安致昊)와 형이 한명 더 있었고, 아래로
는 그가 6세 때 여동생 안신호(安信浩)가
태어났다. 선대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후
손으로,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
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
로 옮겨왔다. 아호인 도산(島山)은 그의 고
향 도롱섬에서 따서 지은 것이었다.

공조참의를 지낸 안종검의 17대손으로, 세
조 때의 재상 안지귀, 중종대의 정승 안당
은 그의 방계 선조들이었다. 안중근, 안공
근 일가는 안종검의 형제인 전라도관찰사
증 병조참판 안종신의 후손으로 역시 그의
먼 친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계는 몰락하
여 평안남도로 이주하여 농사를 짓게 되었
다. 그의 처음 이름은 치삼이었다. 그러나
10세가 되어 학교에 다닐 무렵 이름을 창호
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安泰烈)은 관직이 통덕랑
에 머물렀고, 가세는 더 기울어서 아버지
안흥국은 관직을 지내지 못하고 가난한 농
부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12세 때 아버지
안흥국을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안태열의
손에 자랐다.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
하였다. 조숙했던 그는 서당에 함께 다니
며 공부하던 몇년 연상의 필대은(畢大殷)
등과 함께 국내·외의 이런 저런 문제에 대
해서 많은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후 목동
생활을 하며 1890년 전후 황해도 구월산을
돌아다녔다.

[유년기와 수학]
1892년(고종 29년) 평안남도 대동군 남부산
면 노남리로 이사하면서, 그는 노남리댁 셋
째라고 불리었다. 이때 안창호는 저명한 성
리학자인 김현진에게 한학과 성리학을 수학
하며 유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16세때 안창호는 평양
이 청일전쟁으로 파괴당하자 큰 충격을 받
았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을 겪으며 청나
라와 일본군의 진입을 보고 자신이 구국의
대열에 나서야 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할아
버지 안태열이 반대했고 온 집안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는 홀로 경성부로 가려 했다.
결국 삼촌의 도움으로 비밀리에 가출하여
차를 타고 경성부로 올라갔다. 이어 장로
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운영
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 보통부에 입학하
였다.

무작정 경성에 올라온 안창호는 어느 날 경
성 정동제일교회가 있는 골목을 지나치다
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으니 우리 학교로 오
라' 고 권하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를 만
난 것을 계기로 장로교에서 설립한 구세학
당(求世學堂)에 들어가 공부하게 된다. 여
기서 그는 산수, 지리,세계사,과학 등 새로
운 학문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또한 구세학당 재학 중 송순명의 전도로 장
로교에 입교하였다. 장로교로 개종하면서
자신에게 개화 사상을 준 필대은에게도 기
독교를 소개하였다.

[교육 계몽 운동]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를 졸업하였는데,
상급 학부로 진학하지 않고 보통부의 조교
로 취직하였다. 그해 고향으로 잠깐 돌아왔
을 때 할아버지 안태열은 전주이씨 이석관
(李錫寶)의 장녀 이혜련(李惠練, 당시 13
세)와 성혼시켰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
이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할아버
지에게 파혼을 주장했으나 관철되지 않았
다. 결국 그는 파혼하지 못하고 다시 경성
부로 되돌아와야 했다.

1897년(고종 35년) 서재필·이승만·유길준
·윤치호 등이 주관한 독립협회에 가입하였
으며, 이승만, 양기탁, 윤치호, 이상재, 이
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곧 만민공동회 관서지방 발기회에
도 참여하였다.

안창호는 이후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조직하
고 책임자가 되었으며, 평양부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회를 개최하여 강연에 연
사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는데, 이 때 그
는 청년 웅변가로 명성이 알려졌다. 이후
안창호는 곳곳에 순회강연을 다니기도 했
고, 연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1898년(광무 1년) 11월 경성부 종로에서 열
린 만민공동회에서 7대신을 탄핵, 성토하였
고, 6개조의 정치혁신안(政治革新案)을 건
의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가
황국협회의 무고와 습격으로 해산되자, 안
창호는 은신해 있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
교육과 기독교 전도운동에 뛰어들었다.
1899년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
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였고, 인근 황무지
를 농지로 개간하는 간척사업을 추진하였
다. 1902년(광무 5년) 이혜련과 결혼하였
고 그 해 11월 4일 아내 이혜련과 함께 배
편으로 출국, 일본 동경에서 1주일을 체류
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다.

[결혼 생활]
그러나 안창호 자신은 교민사회 활동과 독
립운동에 투신해야 했으므로 아내 이혜련과
는 오래 같이 보내지는 못하였다. 이후 도
산이 처자와 함께 지낸 기간은 13년밖에 되
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서 결혼식을 올린
뒤 함께 도미한 이후 독립협회 시절의 5년
간, 국민회 시절의 8년간뿐이었다. 1919년
에 상해로 간 뒤엔 가정을 다시 돌볼 기회
가 없었는데, 1926년에 잠시 미국에 들렀
을 때 로스앤젤레스의 YMCA 도산 송별식장
에서 도산은 자기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아내에게 치마 하나, 저고
리 한 감 사 준 일이 없었고, 필립에게도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 못 사주었다. 그
러한 성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러 가
지 사정으로 그랬는데, 여간 죄스럽지 않
다.”

1902년 유학을 위해 도미하여 그곳 동포들
의 어려운 처지를 본 뒤 학업을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섰다. 그러나 오랫동안 남편
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내 이혜련은 불평
불만 없었고 외도 한번 하지 않았다. 또한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남편을 탓하지도 않았
고 안창호는 평생 이를 가슴아프게 생각하
였다. 그는 곧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 지도
자의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망명과 사회 활동]
[출국 초기와 유학 생활]
1902년(광무 5년) 안창호는 미국으로 유학
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면서 하우
스 보이로 취직해 2~3년 동안 일하였다. 이
후 리버사이드로 이사하여 오렌지 따는 일
을 하였다. 1903년 9월 23일 재미 한인교포
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韓人親
睦會)를 조직, 회장에 피선되었다. 유학생
신분임에도 그는 교민 사회의 단결을 위해
각 한인 교민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집 청소
와 주변 쓰레기 정리, 겨울에는 눈도 쓸어
주었다. 처음에는 그의 진의를 의심하던 교
포들은 그의 계속된 노력에 감동하여 한인
친목회에 가입하고 교민사회를 형성하여 활
동하기 시작했다.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
주, 기독교계가 경영하는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유학생 신분이던
1905년 장남 필립이 태어났고, 그해 4월 5
일 그는 한인친목회를 발족시켜 한인공립협
회(韓人共立協會)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에 창립
되어 도산이 귀국하기까지 직접 이끌었던 2
년 미만의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았
다. 11월에는 자비를 들여 부지를 마련하
고, 3층 건물의 공립협회 회관을 설립했으
며, 11월 20일 순국문판 신문 《공립신보
(共立新報)》를 발행했다. 그는 매월 두 차
례 《공립신보》를 발간하여 교민 사회에
보급하였다.

1905년(광무 8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박
제순과 일본 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제국이 빼앗자, 그는 조약 반대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윤치호, 서재필 등과
함께 을사 보호 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
도하였다. 1907년 안창호는 귀국하여 대한
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 외에도 1904년 의친왕, 정
재관(鄭在寬) 등과의 공립협회(共立協會)
창립, 1909년 김좌진·이갑(李甲) 등과의
서북학회 창립을 하였고 또한 1907년 미국
에서 귀국한 이후 신민회, 대한협회 대성학
교 설립 등을 위해 서울과 평양 등에서 여
러 차례 연설을 했다. 도산은 탁월한 웅변
력으로 수천 인파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
다. 을사 보호 조약 이후 그는 실력 양성
을 통해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유길준의
계몽 강연 활동에 감명받아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후 그는 실력양성을 위해서는 교육
이 필요하며, 민중들의 의식개선이 선행되
어야 한다고 보았다.

[독립운동과 사회 활동]
1907년(광무 10년) 대한협회에서 주최한 강
연에 참여해 연설을 하였는데, 그의 연설
을 듣고 감동받은 여운형·여운홍 형제와
조만식은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기
로 한다. 그의 강연에 감화받은 조만식
은 '장차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려면 실력
을 키워야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1907년 2월에는 대한유학생회(大韓留學生
會)의 초청연사로 초빙되어 강연하였다.

1907년(융희 1년) 그는 귀국을 결심하였
다. 귀국 즉시 안창호는 양기탁, 윤치호,
전덕기(全德基), 김구, 유길준, 이동휘(李
東輝), 이갑(李甲), 이회영, 이승훈 등 국
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소집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의 민중을 계몽, 문맹과 구
습을 타파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구상
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들의 폭넓은 공감대를 얻어 안
창호는 신민회(新民會)를 경성부경성에서
조직하였다. 그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전국
의 애국지사들을 규합해 가는 한편, 청년
지사들의 교육 외에 그들로 하여금 교육,
계몽 강연, 언론, 산업, 문맹 타파, 문자
교육, 농촌 계몽 등의 활동을 추진해 나갔
다.

[대성학교 창설과 중앙, 기호학회 참여]
1908년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
였는데, 당시 대성학교의 교육방침은 정직
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그해 그는 양기탁,
윤치호 등 과 신민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회장직은 윤치호가 선출되고 그는 간사로
서 행동 강령을 직접 초안한다.

"신민회 강령

민족자존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한다.

함께하는 투쟁동지를 발굴.총력 단결한다.

국민 개개인의 국민운동 역량을 축적한다.

미래의 주인될 청소년 교육을 촉진한다.

각종 상공업을 발전시켜 국민경제의 부흥
을 도모한다."
1908년(융희 2년) 경성부의 중앙학회를 본
뒤, 중앙학회를 본따 장학재단인 서북학회
를 창립하였다. 서점인 태극서관의 평양,
서울, 대구지사 설립을 계획, 후원하여 독
서를 보급하려 노력하였다. 그해 평양 마산
동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는데 투자, 직
접 참여하여 산업을 일으키는 운동에 모범
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 교육과 지원사업
에 몰두하는 한편 각지를 순행하며 각지의
신민회 지역간부들을 만나 사업을 의논하였
다.

1908년 선천군, 철산군 등에서 김진후의 희
사금(喜捨金) 2만원과 오치은의 재정적 원
조를 얻어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웠다. 교장
에는 윤치호를 초빙, 임명되었다. 그런
데 대성학교의 아침 체조시간은 군사훈련
을 방불케 한다고 알려져 당국의 이목을 끌
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각 사립
학교에서도 체조시간을 강건한 신체와 정신
을 단련하는 과목으로 중요시 하고 있는 분
위기가 확산되고 있어서 많은 학생들과 교
육자들, 한국통감부조차 관심을 갖고 지켜
보게 됐다. 어느 날 대성학교 학생들은 체
육 수업 시간에 운동장에서 곤봉을 둘러메
고 '행보가'를 부르며 행진하던 학생들
은 '일본의 무력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망
국의 비운을 눈앞에 둔 우리들에게 가장 필
요한 것은 강병이나 군대는 이미 해산되어
강병정책의 수행이 불가능하니 학교교육의
체조시간을 통해서나마 이러한 민족적인 과
제를 수행해야 한다.'며 우렁찬 기상을 선
보였다. 또한 안창호는 가끔 학생들에게 야
간에 비상소집령을 내려 험산준곡 이나 공
동묘지가 있는 산에 올라가게 하여 담력을
기르게 하기도 하였다. 한국통감부는 이를
두고 눈 덮인 광야나 폭염을 가리지 않고
전술강화훈련을 시키고 있다며 트집을 잡
기 시작했고,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사립
학교의 병식교련을 두고 통감부와 수시로
마찰을 빚게 되었다. ...(중략)...
====================================
Ahn Changho

[Personal details]
[Born]
November 9, 1878
Kangso, Pyeongan, Korea

[Died]
March 10, 1938 (aged 59)
Keijo Imperial University, Gyeongseong-
bu, Korea under Japanese rule

[Nationality] Korean

Ahn Changho, sometimes An Chang-ho
(November 9, 1878 - March 10, 1938) was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and one
of the early leaders of the Korean-
American immigrant community in the
United States.

He is also referred to as his pen name
Dosan (도산; 島山). He established the
Shinminhoe (New Korea Society) when he
returned to Korea from the US in 1907.
It was the most important organization
to fight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He established the Young Korean
Academy (흥사단; 興士團) in San
Francisco in 1913 and was a key member
in the founding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in 1919. Ahn is one of two men
believed to have written the lyrics of
the Aegukga, the South Korean national
anthem. Besides his work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Dosan wanted to
reform the Korean people's character
and the entire social system of Korea.
Educational reform and modernizing
schools were two key efforts of Dosan.
He was the father of Philip Ahn and
Susan Ahn Cuddy.

(from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wikipedia.org)


Dosan, inDependence, influence(+)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D+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0 1 2 3 4 5 6 7 8 9

Social Name Portal 한글 세계이름 포털: 한국.net   Wopen.net   yungbkim@nate.com
shared by link
웹프로그래밍(한국.net 사례기반) & 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한국.net 사례기반)&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롤모델100명-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한국.net 사례기반)&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롤모델100명-김영복 저
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 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 (한국.net 사례기반) - 김영복 저, 실습 사이트: w3schools.com
Role Model 100명 from 한국.net
한국.net
Name Por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