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G Conscience Grade: C
Edit 2024-03-08 오후 8:25:59
PIG D+
Home http://bit.ly/1QmxH6v
SNS1 http://bit.ly/1WQg0jD
SNS2 http://bit.ly/1UqhoL2
SNS3 https://url.kr/fatrje
 related < HOME > < EDIT>
Rname
      
황희-黃喜,Hwang Hui,조선,정치가,영의정,Korea
Prime Minister of
the Joseon Dynasty from 1431 to 1449
황희, 黃喜, Hwang Hui,조선, 정치가, 영의정

한국.net

[출생] 1363년 3월 16일
고려 개경부 가조리

[사망] 1452년 3월 8일 (88세)
조선 경기도 파주

[황희 정승 묘]




[사인] 병사(노환)

[거주지]
개경->한성부->경기도 교하->전라도 남원->
한성부->경기도 파주->한성부->경기도 파주

[본관] 장수

[별칭]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 호는 방촌(厖村),
자는 구부(懼夫), 시호는 익성

[학력] 1389년 문과 급제

[직업] 문인, 정치가

[종교] 유교

[자녀]
아들 황수신, 황보신, 황치신

[부모]
아버지 황군서, 어머니 용궁 김씨

[요약]
황희(黃喜, 1363년 3월 16일 ~ 1452년 3월 8일)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재상이다.

고려 개경(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황희, 우왕부터 세종까지 일곱 왕을 모신 평생직장 일대기]



본관은 장수(長水)다.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다.



고려에서 음서(蔭敍)로 출사하여 복안궁 녹사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뇌물수수,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했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한편에서는 그의 청렴성은 청빈함으로 과장되었으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조선의 양반 계층에 의해 의도적으로

미화, 신격화되었고, 이후 양반집단 기득권 유지 위해
'황희 신화'를 창조하고 확대했다는 주장이 있다.



[생애 활동 및 업적 등]
[고려조]
[출생과 가정 배경]
방촌 황희는 1363년(공민왕 12년) 3월 16일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를 지낸 황군서(黃君瑞)의
얼자로 송경(松京 :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감문위호군(監門衛護軍)인 김우(金佑)의
딸 용궁 김씨(龍宮金氏)로 전해지나 일설에는
노비였다는 설도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희는 황군서의 얼자(孼子)라 기록하였다.

신라 경순왕의 부마인 시중(侍中) 황경(黃瓊)의 후손으로,
증조부 황석부(黃石富)는 고려에서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황균비(黃均庇)는 고려시대에
참찬(參贊)을 지내고 조선에 와서 그의 출세로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황군서는 고려시대에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를
지내고 조선 건국 후 충주 절제사와 도안무사를 역임했다.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의 어머니는 정실 부인이 아니었다.

일설에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던 무렵,
열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말랐었는데,
그가 태어나자 갑자기 물이 다시 흘렀다고 한다.

형제로는 형 황중수와 3명의 누이가 있었다.



[생애 초반]
선대의 고향은 전라북도 장수였는데 그는 키가 크고
풍채가 잘 생긴 데다가 눈이 무섭게 생겼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함이 크게 뛰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한번 보면 곧 기억하였다.

황희는 어려서부터 글공부에 열심이었고 그를
보는 사람들은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일찍부터 글을 이해하였으며 암기 재주에 능했다.

그는 밤낮으로 공부에 힘썼으니 경사(經史)와 제자백가
(諸子百家)의 글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열네 살 때인 1376년(우왕 2년)에 음서 제도로 출사하여
음직으로 복안궁(安福宮) 녹사가 되었고,

스물한 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곧이어 1385년 진사시에도 급제했다.

1380년 17세에 판사복시사(判司僕侍事) 최안(崔安)의 딸과
결혼하여 1녀를 두었으나, 24세에 부인 최씨가 사망하여

26세에 공조전서(工曹典書) 양진(楊震)의 딸과 재혼하여
슬하에 치신(致身), 보신(保身), 수신(守身)의 3남과 1녀를 두었다.

[농부의 가르침]
황희는 스무살 때 벌써 진사의 벼슬에 있었다.

어느 날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들판을 지나다
잠시 쉬게 되었다. 들판에서는 농부들이 소를 몰며
논을 갈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던 황희는 농부에게 말을 걸었다.

그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느냐고 묻자 농부는 황희 가까이 다가와

옷소매를 잡아당겨 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귀엣말로 답하였다.

한국.net

"농부 : 누런 소가 사실 검은 소보다는 일을 더 잘합니다."

황희 : 그런데 노인, 어느 소가 일을 잘하는게
그것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귓속말로 하십니까?

농부 : 젊은 선비, 모르는 말씀하지 마시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기를 욕하고
흉을 보면 기분을 상하게 되는 것이오.”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깨닭은 바가 있었다.

비록 그 소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지금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어느 소를 일을 잘한다,
못한다 하고 흉보는 일은 나쁘다는 교훈이었다.

이후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다가,
별장(別將)이 되었다.

1389년(창왕 원년) 별장으로 재직 중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적성현 훈도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학록을 거쳐 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에
보직(補職)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
[조선 개국과 출사]
1392년(공양왕 4년) 7월 고려가 멸망하자
황희는 새 왕조 설립에 부정적인 다른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두문동 72현과 함께

개성 두문동에 들어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고려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려 하였다.

결국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여 나오기를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황희가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조선 태조와 정종 대에는 자신이 볼 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임금의 명령이라도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여러 번 파직되어 관직 생활이 평탄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종이 즉위하고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의 천거로

1401년(태종 1) 도평의사사 경력, 1402년(태종 2) 대호군 겸
승추부 경력이 되더니 1405년(태종 5) 박석명의 후임으로
지신사가 되면서 관직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태종은 황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서
4년 동안 지신사직에 두어 크게 중용했다.

지신사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시행을 감독 및
보고하던 대언(代言)의 으뜸으로,
도승지의 전신이며 지금의 대통령비서실장이다.

국왕 직속인 만큼 권력뿐만 아니라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자리로 유명하다.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던 태종에게 이 정도로 중용받을 정도면
능력은 입증된 셈이다.

코드 인사로 인해 일부 관료의 인망을 잃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이후 이조, 호조,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직을 모두 역임했다.

다만 당시는 현대만큼 사회가 복잡하지 않아
한 부서가 담당하는 일의 폭이 훨씬 넓었다.

도승지와 6조 판서와 영의정 모두 지냈다는 것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장, 행정각부 장관,
국무총리까지 지냈다는 말이다.

이처럼 국정 전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어
태종에게 크게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폐세자 건이 나왔을 때는 적장자 계승 원칙을 고수하며
양녕대군을 두둔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파직된 뒤 유배까지 갔다.

태종은 '민씨들에게 미움 산 것'을 만회하고자
세자 편을 들었다며 비난했고,
황희는 단순히 세자가 너무 가여워서 그랬다고 변명하였다.

태종은 황희가 자기의 신뢰를 저버렸다고 생각하여
실망하고 황희를 시골로 내쫓았다.

처음에는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에 있는 교하(交河)로 유배를 갔다가,

한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유배지가
지금의 전라도 남원으로 변경되어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이것도 황희의 향관이 남원이었기 때문에 약간 배려한 것이다.

황희는 노모와 처자식을 데리고 남원에 가서 머물렀다.

[자식 때문에 고달픈 황희 정승의 일대기]


이 시기 황희가 지은 광통루라는 누각이 현재의 광한루이다.

평소 황희를 아끼고 높이 평가한 태종이었기에,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군권만 행사하는 상왕으로 물러난 후

1422년 세종에게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을 권유하면서
재출사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후 세종에게 중용되어
강원도의 기근을 해결하는 데 공을 세웠고,
1426년(세종 8) 우의정에 오르면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1427년(세종 9) 좌의정이 되어 수상으로서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1431년(세종 13) 원래 영의정부사였다가 늙어서 본직을 내려놓고
부원군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던 이직이 죽자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황희. 그는 정말 최고의 재상이었나?]


[명재상]
1427년(세종 9)부터 1435년(세종 17)까지는
황희와 맹사성의 투톱 체제로 유명하다.

황희는 보수적이고 강직한 스타일로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나간 면이 있었던 세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대국을 보는 시각이 뛰어났고 당대에 알아주는 군자로
범죄 사건에도 너그러움을 위주로 처리했다.

강직, 분명, 정확한 스타일의 인물로
주로 추진력과 결단력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강한 결단력, 추진력과 6조 판서직을 모두 수행하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결합되어 정책 회의 때마다
주목할 만한 의견을 자주 냈고

복잡한 토론을 거쳐도 결국 황희의 안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원만한 성품의 동료 정승 맹사성은
황희의 이런 강직함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주로 융통성과 센스가 필요한 일처리에 능한 편이었다.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에 황희의 졸기(卒記)를 남기면서
'일을 의논할 적엔 정대(正大)하여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번거롭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고 평했다.

그는 정책에 있어서 대체로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하고는 했는데,
이런 그의 능력이 세종에게 가장 필요하였다.

세종은 스스로 독창적인 주장을 내기도 했고
가능한 모든 논점을 검토한 뒤 정책을 결정했기 때문에
정책의 완성도는 높았지만,

그 과정에서 무리한 정책도 종종 나왔으며
온갖 주장이 난립하여 심의가 길어져 쟁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잃을 수 있었다.

여기서 황희는 대국적으로 주장을 정리하고
가장 현실적인 시행 방안을 내어 정책을 조정했다.

1449년(세종 31)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기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있으면서 세종을 훌륭히 보좌하여

농업, 예법, 군사, 법률 등 각종 국정에서
세종의 정치 고문이자 명재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명성을 떨쳤는데 벼슬살이만 73년을 했다.

[황희를 만나다]


[사직 반려]
1431년(세종 13)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했다.(이하 음력 날짜)

1432년(세종 14)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했다.

같은 해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했다.

1435년(세종 17)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했다.



1436년(세종 18)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했다.

1438년(세종 20)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했다.

1439년(세종 21)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했다.
같은 달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했다.

1440년(세종 22)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었다.

1443년(세종 25)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했다.

1449년(세종 31) 10월 5일 황희를 영의정부사로 그대로
치사(致仕, 벼슬을 두고 물러남)하게 했다.

1452년(문종 2) 영의정부사 황희가 사망했다.
당시로서는 드문 90세로 장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다.

[경기도 파주시 황희정승 묘]


[평가]
모두가 인정하는 유능한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군국중사에서 보여준 본인의 대쪽같고 강직한 성품과 처신답지 않게

가까운 사람의 범죄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고위공직자로서 치명적인 인격적 결함이 있었다.

[황희 정승의 진짜 모습]


무엇보다도 가족과 친족의 대형 범죄를 덮다 들키거나 두둔한 것이
알려짐으로써 높기만 했던 명예가 많이 실추되었다.

이런 사실이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아
누렁소 일화 덕분에 많은 현대인들이 강직하고
청렴한 재상이라고만 알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방적으로 훌륭한 인물이라기보다는
당시의 현실 정치가이자 권력자로서 공과 과가 분명한 인물로 본다.

[찬조 K-Pop]


--------------------------------------

[챗 GPT 답변] (AI 답변에 오류가 많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from https://chat.openai.com/chat)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가
제일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은?


조선시대 정승인 황희(黃喜, Hwang Hui)는 선비 출신으로,
문인으로서의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사상가,
사회운동가로서도 활약했습니다.

황희는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황희가 제일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황희는 유교 사상을 중심으로 교양 있는 인물이었으며,
역사와 문학, 철학 등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일대일대상으로 인물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연구 방법을 취하면서, 다양한 인물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황희가 제일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좋아했을 만한 인물로는 유교 사상과 문화에 기여한 인물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이바지한 인물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가 좋아할만한
한국 트로트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


조선시대의 정승인 황희는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교양 있는 인물이었으며, 문인으로서 문학, 철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트로트 노래와는
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만약 황희가 현대에 살았고,
한국 트로트 노래를 좋아한다면,
그가 좋아할 만한 노래로는 '안동역에서'나

[찬조 트로트]


'금강산에 북돌고'와 같은 전통적인 민요나 가요,

[찬조 트로트]


또는 유서 깊은 발라드 등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 곡은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어,
황희의 취향과 관심사와 부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episode)는?


조선시대의 정승인 황희는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교양 있는 인물이었으며, 문인으로서 활약했습니다.
그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는
"날벼락이 친 뒤에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황희가 어느 날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 산책을 하고 있던 중
번개가 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황희는 불과 몇 미터 앞에서 번개가 치자마자 무릎을 꿇고
기절해 버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보호하고 치료하기 위해 빠르게 대처했지만,
그는 여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뒤에, 황희는 갑자기 눈을 떴고,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일화는 황희가 경험한 극적인 사건으로,
그가 천재적인 미인지와 함께 천연의 위엄과
신비함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을 높였습니다.
또한, 이 일화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졌습니다.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가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일까?


조선시대 정승인 황희는 매우 양심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유교사상에 따라 인격과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했으며,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지켰습니다.

황희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에 따라 강한 독립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향해 기울이는 것보다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따르는 것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도덕적 가치는 자신의 업적과 함께
그가 남긴 유서와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황희는 조선시대에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업적과 유산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조선시대 정승인 황희는 매우 우수한 양심을 지닌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지키고,
도덕적인 가치를 중요시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정승 황희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A(매우 우수)입니다.

(from https://gemini.google.com)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의
양심 등급은 B(우수)로 평가됩니다.

황희의 양심을 뒷받침하는 주요 사례:
청렴함:
그는 벼슬에 있을 때 늘 청렴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물질적인 욕심이 적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봉급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충성심:
그는 임금에게 충성했으며, 국가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병을 모아 적과 맞서 싸우는 등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애민정신:
그는 백성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어려운 백성들을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황희의 양심에 대한 비판적 시각:
소신 부족:
그는 때론 자신의 소신을 굽히고 권력자에게 아첨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소신을 굽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실수:
그는 정치적 판단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일부 정책적 실수를 저질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종합적인 평가:
황희는 조선시대 뛰어난 정승이었으며,
양심적인 지도자로 평가됩니다.

그는 청렴하고 충성스러웠으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다만, 소신 부족과 정치적 실수 등의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황희의 양심 등급은 B(우수)로 평가됩니다.

그는 양심적인 지도자로서 많은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몇 가지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net
[의식 지도]

[아래의 의식지도 수치 평가는 단순 재미로만 참조 바람]
(from https://www.bing.com/chat Copilot)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 Map of Consciousness' 에서
1에서 1000까지 수치로 평가했을때,
황희(黃喜, 조선 문인, 정치가, 영의정, Korea)의
의식지도 수치값은 ?


황희의 의식지도 수치값은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식 지도는 낮은 수준인 0부터 신의 경지인 1,000까지의
범위 안에서 각각의 의식 단계를 수치로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이 지도에서 배려 깊은 사랑의 의식은 540으로,
인간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의식 수준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황희의 의식지도 수치값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다면
황희 자신이 직접 의식지도를 측정한 결과를 확인해야 합니다.

의식 지도는 각각의 수준에서의 특징과 치유 방법을 제시하며,
자아 성장과 극복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황희가 어떤 의식 수준에 위치하는지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성장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from https://gemini.google.com)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 Map of Consciousness' 에서
1에서 1000까지 수치로 평가했을때,
황희(黃喜, 조선 문인, 정치가, 영의정, Korea)의
의식지도 수치값은 ?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에서 황희(黃喜)의 의식 수치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의식 지도는 주관적인 측정 도구입니다.

호킨스는 개인의 의식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근육 테스트와 같은 주관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으며,
평가자의 주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황희에 대한 공개된 정보가 부족합니다.

호킨스의 의식 지도는 개인의 행동, 말, 글 등을 분석하여
의식 수준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황희에 대한 공개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의식 수준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호킨스도 인정했듯이, 의식 수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변동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 시점에 측정한 의식 수치가
그 사람의 평생 의식 수준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황희의 의식 수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유명 문인이자 정치가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그의 삶을 고려했을 때,
그의 의식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고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

[Gemini AI 답변에 오류(hallucination: 환각 등)가 있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from https://gemini.google.com)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가
제일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은?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1363~1452)가 가장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1236~1308)**입니다.

황희는 충렬왕을 **"위대한 군주이자 현명한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깊은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1. 충렬왕에 대한 황희의 칭찬:
"삼국통일 이후 가장 뛰어난 군주"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위대한 호국 영웅"
"뛰어난 리더십으로 국가를 번영으로 이끈 성군"

2. 황희가 충렬왕을 존경했던 이유:
강력한 외세에 맞서 싸워 조선의 독립을 지킨 점
뛰어난 외교手腕으로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를 유지한 점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여 국가의 문화적 발전을 이끈 점

3. 황희의 충렬왕 숭배가 반영된 그의 행적:
충렬왕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음
충렬왕에 대한 책과 기록을 편찬하고 보급했음
자신의 아들에게 충렬왕의 이름을 따서 지었음

4. 황희의 충렬왕 숭배의 영향:
조선시대 후대에 충렬왕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확립하는 데 기여
국가주의와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데 영향을 미쳤음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가 좋아할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


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시대 초기의 유명한 정승으로,
뛰어난 학문과 능력으로 여러 요직을 역임하며
나라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의 성격과 업적을 고려하여 황희가 좋아할 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제목을 몇 가지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트로트:
"임진강" (나훈아):

[찬조 K-Pop]


웅장한 멜로디와 가사가 황희의 씩씩하고
강인한 이미지를 잘 드러냅니다.

"고향역" (김연자):

[찬조 K-Pop]


따뜻하고 감미로운 멜로디가 황희의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발라드:
"아리랑" (조용필):

[찬조 K-Pop]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대표적인 노래로,
황희의 애국심을 자극할 것입니다.

"나무" (윤종신):

[찬조 K-Pop]


깊은 의미의 가사가 황희의 삶과 업적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길" (이문세):

[찬조 K-Pop]


희망찬 메시지가 담긴 노래로,
황희의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기상을 잘 나타냅니다.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황희의 취향에 맞을 수 있습니다.

"영산강" (김용임):

[찬조 K-Pop]


웅장하고 장엄한 멜로디가 황희의 위대한 업적을 상징합니다.

"동백꽃" (나훈아):

[찬조 K-Pop]


고운 선율과 가사가 황희의 풍雅한 취향을 만족시킬 것입니다.

"사랑밖에 난 몰라" (김연자):

[찬조 K-Pop]


따뜻하고 감동적인 멜로디가 황희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참고로, 황희는 시문에도 능했으며,
특히 그의 시에는 애국심과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된 노래도
황희의 취향에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episode)는?


조선시대 초기의 유명한 정승 황희(黃喜, 1363~1452)는
뛰어난 학문과 능력으로 여러 요직을 역임하며
나라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1. 빈대와의 사투
어느 날 밤, 황희는 잠자리에 들려고 했는데
갑자기 큰 빈대가 그의 얼굴 위를 지나갔습니다.

황희는 화가 나서 빈대를 잡으려고 했지만
빈대는 매우 민첩하게 움직여 잡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황희는 포기하고 빈대에게 말했습니다.

"네놈은 정말 능숙하구나.
내가 너를 잡을 수 없으니 가만히 자도록 하라."

빈대는 마치 황희의 말을 이해하는 듯 잠잠해졌고,
황희는 빈대와 함께 잠들었습니다.

2. 임금의 시험
어느 날, 세종대왕은 신하들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황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무엇일까?"
황희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은 순식간에 천리 밖까지 갈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황희의 답변에 매우 만족하며 그의 지혜를 칭찬했습니다.

3. 송사 처리
황희는 송사를 처리하는 데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땅을 놓고 다투는 송사가
황희에게 넘겨졌습니다.

황희는 두 사람의 주장을 자세히 듣고 땅을 둘러싼
경계를 정확하게 측량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땅을 나눠 갖도록 판결했습니다.

두 사람은 황희의 공정한 판결에 감탄하며 그를 칭찬했습니다.

4. 은퇴 후의 삶
황희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우암"이라는 정을 짓고
많은 학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시, 그림, 글씨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습니다.

황희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들은 그의 지혜, 능력,
그리고 인품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는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일까?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1363~1452)는
매우 양심적이고 청렴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자신의 벼슬과 권력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황희의 양심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시: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학교를 설립하여 백성들의 교육을 지원했습니다.

부패한 관리들을 징계했습니다.

그는 뇌물을 받거나 백성들을 착취하는 부패한 관리들을
엄하게 징계했습니다.

공정한 정치를 실시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들이 평등하게 법 앞에 서도록 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황희의 양심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업적은 우리에게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황희의 양심을 보여주는 일화:
황희가 송사를 처리할 때,
그는 항상 진실을 밝히고 공정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어느 날, 한 백성이 부자에게 억울하게 땅을 빼앗겼다는 송사가
황희에게 넘겨졌습니다.

황희는 사실관계를 꼼꼼하게 조사하고 부자의 잘못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땅을 돌려주고 부자를 징계했습니다.

황희는 자신의 벼슬과 권력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검소하게 생활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데 자신의 재산을 사용했습니다.

어느 해에 기근이 들었을 때,
황희는 자신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습니다.

황희의 양심은 그의 삶과 업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정승이었고,
그의 정치는 조선시대 초기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Hwang Hui)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1363~1452)의 양심 등급은
**A(매우 우수)**입니다.

황희의 양심을 보여주는 근거: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학교를 설립하여 백성들의 교육을 지원했습니다.

부패한 관리들을 징계했습니다.

그는 뇌물을 받거나 백성들을 착취하는 부패한 관리들을
엄하게 징계했습니다.

공정한 정치를 실시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들이 평등하게 법 앞에 서도록 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권력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검소하게 생활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데 자신의 재산을 사용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도 백성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모아
적과 맞서 싸웠습니다.

황희의 양심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업적은 우리에게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따라서, 조선시대 정승 황희(黃喜, 1363~1452)의 양심 등급은
A(매우 우수)입니다.

======================================

Hwang Hui
(8 March 1363 ~ 28 February 1452)
was a politician of the Goryeo dynasty and
Joseon Dynasty, who once served as prime minister of
the Joseon Dynasty from 1431 to 1449.

[Biography]
Hwang Hui was an official of Goryeo
Dynasty. He became an official in the
Joseon Dynasty in 1394. Hwang Hui once
banished from Seoul because he
advocated Yangnyeong, the eldest prince
of King Taejong, despite his bad behavior in 1418.

After King Sejong the Great's enthronement,
Hwang Hui got reappointed and held many ministerial
posts. Hwang Hui was appointed as a
prime minister in 1431 and served until 1449 .
He retired from the government after 18 years.

[Description of Hwang Hui]
He served as the Yeonguijeong, the
highest ranking of 3 appointed royal
prime ministers (the others being
Uuijeong and Jwaguijeong) for a total
of 18 years with a total of 24 years
service to the monarchy. He was noted
for his political philosophy that
stated, “That which is just takes
priority and must be enacted.”

Priorities during his administration
included agricultural improvement,
mitigating laws that increased social
class gaps, and providing opportunities
for candidates born out of wedlock or
from concubines to take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from naver.com wikipedia.org 나무위키 등)


Domestic, Dynasty, influence(+)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D+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0 1 2 3 4 5 6 7 8 9

Social Name Portal 한글 세계이름 포털: 한국.net   Wopen.net   yungbkim@nate.com
Selected/Recommended Youtube Videos/Images are shown.
Joint R&D: If you (major Portal) are interested in
the new Worldwide Phonetic Service using Korean Alphabet Domains
(ㄱ.com .. ㅎ.com ㅏ.com .. ㅔ.com 김.net 이.net 박.net ..), Please let us know.
shared by link
웹프로그래밍(한국.net 사례기반) & 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한국.net 사례기반)&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롤모델100명-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한국.net 사례기반)&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롤모델100명-김영복 저
벤처창업 특허 RFP 표준(강의용 PDF파일 제공)- 김영복 저
웹프로그래밍 (한국.net 사례기반) - 김영복 저, 실습 사이트: w3schools.com
Role Model 100명 from 한국.net
한국.net
Name Por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