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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Charles Darwin, 진화론 생물학자, England
찰스 다윈 [ Charles Robert Darwin ]




지난1000년간 인물100명중 4위 선정


인류 역사인물 100명중 16위 선정


인류 역사인물 50명에 선정




[출생] 1809년 2월 12일
잉글랜드 슈루즈버리

[사망] 1882년 4월 19일 (73세)
잉글랜드 런던 던하우스



[국적] 영국

[분야] 박물학

[출신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과,
에든버러 대학교 의과대학

[수상]
로열 메달,
월스턴 메달,
코플리 메달

한국.net


[요약]
생물진화론을 정하여 뜻을 세운 영국의 생물학자이다.

해군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서 승선하여,
남아메리카·남태평양의 여러 섬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항해·탐사했고,

그 관찰기록을 《비글호 항해기》로 출판하여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859년에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정리한
《종(種)의 기원(起原)》이라는 저작을 통해
진화사상을 공개 발표하였다.



[출생-사망] 1809년 2월 12일~ 1882년 4월 19일

[국적] 영국

[활동분야] 생물학

[주요저서]
《종의 기원》(1859), 《식물의 교배에 관한 연구》(1876)

[소개]
생물진화론의 정립에 공헌하였다.
슈루스베리의 의사 로버트 다윈의 아들이며,
에라스머스 다윈의 손자로 태어났다.

1825년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배웠으나
성격에 맞지 않아 중퇴하였다.

1828년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전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어릴 때부터 동식물에 관심을 가졌고,
케임브리지대학의 식물학 교수 J.헨슬로와 친교를 맺어
그 분야의 지도를 받았다.

1831년 22세 때 헨슬로의 권고로 해군측량선 비글호에
박물학자로서 승선하여,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여러 섬(특히 갈라파고스제도)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를 두루 항해 ·탐사하고
1836년에 귀국하였다.

그 동안에 널리 동식물의 상(相)이나 지질(地質) 등을 조사하여
후에 진화론을 제창하는 데 기초가 되는 자료를 모았다.



특히 갈라파고스제도에서의 관찰, 즉 다른 환경의 섬과
거기에서 생활하는 같은 계통의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사소한 변이(變異)와의 관련은,
다윈으로 하여금 진화사상의 심증을 굳히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또, C.라이엘의 《지질학 원리》도 큰 영향을 주었다.

1839년 《비글호 항해기 Journal of the Voyage of the Beagle》를
출판하여, 여행 중의 관찰기록을 발표하면서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또한 지질학상의 문제, 산호초의 생성원인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1842년에는 건강 때문에 켄트주(州)에 은거하여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1856년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858년에 동남아시아에서 연구 중이던 A.R.월리스가
다윈과 같은 견해의 논문을 보내오자,

이에 놀란 그는 서둘러 논문을 정리하여
그 해 런던의 린네학회에 월리스의 논문과 함께 동시에 발표했고,

이듬해인 1859년 《종(種)의 기원(起原)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
in the Struggle for Life》

(정식 명칭은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이라는
저작에 진화사상을 공표하였다.

진화론의 골자는 바로 그 저서의 표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자연선택설을 요인론(要因論)으로 한 것이다.



자연선택설은 생물의 어떤 종(種)의 개체 간에
변이가 생겼을 경우에,

그 생물이 생활하고 있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고,
부적합한 것은 멸망해 버린다는 견해이다.

곧, 개체 간에서 경쟁이 항상 일어나고
자연의 힘으로 선택이 반복되는 결과,
진화가 생긴다고 하는 설이다.



이 설에서는 개체간의 변이가 어떻게 생기느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라마르크가 제창한 환경의 영향에 따라 생긴 변이가
다음 대에 유전한다고 하는 획득형질유전론(獲得形質遺傳論)을
채용하고 있다.

또한, 개체 간에 경쟁이 일어난다고 하는 견해는
T.R.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시사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종의 기원》은 초판 1,250부가 발매 당일에 매진될 정도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켜, 후에 6판까지 출판되었다.

1860년 진화론에 관한 논쟁이 옥스퍼드에서 일어나
T.H.헉슬리와 J.D.후커 등의 지지로
다윈의 견해가 인정을 받았다.

1862∼1881년에 한 걸음 더 나아간 진화론에 관한
저작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사육동식물(飼育動植物)의 변이
The Variation in Animals and Plants under Domestication》(1868)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性選擇)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1871)이 유명하다.



특히 후자는 《종의 기원》에서 뚜렷이 제시하지 못했던
인간의 진화에 대하여 그의 태도를 분명히 한 저술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는 진화론 외에도 생물학상의 몇 가지 연구를 하였다.

1880년의 《식물의 운동력》은
식물의 굴성(屈性)에 대한 선구적 연구인데,

식물학자인 아들 프랜시스 다윈(1848∼1925)과
공동으로 이룬 것이다.

또한, 《식물의 교배에 관한 연구》(1876)와
《지렁이의 작용에 의한 토양의 문제》(1881)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그는 1882년 켄트 다운에서 죽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물리학에서의 뉴턴 역학과 더불어
사상의 혁신을 가져와 그 후의 자연관 ·세계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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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version)
영국의 박물학자(博物學者), 진화론자.에든버러대학 의학부 중퇴,
케임브리지대학 신학부 졸업.

실제로는 박물학을 연구.
1831~1836년 해군 측량선 비글 호에 동승하여 남태평양의 지질과
동식물을 자세히 조사하여, 생물 진화의 확신을 얻고 귀국.

동(同)시대의 생물학 및 영국 농업에서의 품종개량의 성과를
개괄하여 생물진화론과 자연도태설을 확립했다.



대단히 신중한 태도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중,
1858년 왈라스(A.R. Wallace, 1823~1913)로부터

거의 같은 의견의 논문을 받고, 주위의 권유에 따라 같은 해
왈라스의 논문과 함께 자신의 학설을 발표.

다음해 『종의 기원』을 계획보다 축소하여 발표했다.

계속해서 많은 저서를 통해 자신의 학설을 제창하고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종교계를 필두로 한 각계(各界)의 격렬한 비난공세에 대해
그 자신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헉슬리 등이 대변론전(代辯論戰)을 벌였다.

그의 세계관은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이었지만,
진화론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중한 자세를 취하여
적극적인 발언은 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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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FRS,
1809년 2월 12일~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뒤 저서 종의 기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진화론을 발표하여 논란이 되었다.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종의 기원》 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인간과 원숭이는 공통 조상을 갖는다'는 그의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진화론과 창조설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

진화가 관찰되는 현대와 진화의 명백한 증거들이 관찰되었던
과거에도 과학계에서는 이러한 논쟁이 전혀 없으나,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창조설자들에 의해
이러한 논쟁은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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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유년기]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 슈루즈버리(Shrewsbury)에서
부유한 의사 로버트 워링 다윈과 어머니 수잔나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 지식인으로 이름이 난 의사였다.

외할아버지는 도예가이자 기업가인 조시아 웨지우드였다.

할아버지들은 박물학자이며, 아버지 로버트와
어머니 수잔의 동생인 외삼촌은 모두 사업가로 다윈 가족과
웨지우드 가족은 모두 오랫동안 친밀하였고,

그의 부모님과 더불어 몇 쌍의 겹결혼으로 인해
친한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수잔이 다윈이 8세 때 생을 마감하고,
누나인 캐롤라인등 3명의 누이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다윈을 길렀다.

아버지 로버트는 아내의 죽음에 성격이 엄격해졌지만,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질까봐서
심하게 꾸짖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당시로선
자유로운 성공회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웨지우드의 가문은 다윈의 탄생 당시 이미 종교개혁으로
영국의 전통교회로 뿌리내린 성공회를 받아들였지만,

양가 모두 원래는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무게를 두는 반(反)삼위일체 기독교 교회인
유니테리언 교회의 신도였다.

다윈가는 휘그당의 급진자유주의에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렇듯 다윈의 집안은 자유주의가 전통인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로버트는 관례에 따라 아이들에게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게했다.

그러나 다윈 남매와 어머니는 유니테리언 교회를 갔다.



어린 시절부터 박물학적인 취미를 좋아하고,
8세 때 식물, 조개, 광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는 할아버지와 달리 박물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인 원예가 취미였기 때문에
어린 다윈은 자신의 작은 정원을 가졌다.

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형 에라스머스는
화학 실험에 몰두했고, 다윈에게 실험을 돕게 했다.

다윈은 형을 라즈라고 부르면서 그리워 했다.



[학창시절]
[청소년기]
그는 할아버지 에라스무스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쓴 책들을 읽으면서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1817년부터 1825년까지 다윈은 초중등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다윈은
교육을 지식전수로 잘못 이해하여,

학생만의 좋은 점들을 존중하고 키워주지 않는
잘못된 교육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여,

교사에게서 '항상 멍하게 있는 녀석'이라는
심한욕을 듣기도 했다.

[의대진학]
의사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그를 의대로 진학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찰스는 의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청소년기 때부터 곤충 채집과 동물 관찰에 흥미를 보였다.

아버지는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다윈은 16세 때인 1825년에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 슬하를 떠나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피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졌고,
의학보다는 곤충 채집같은 경험에 입각한
자연계의 다양성을 좋아했다.

더구나 마취학이 없었기 때문에 수술이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19세기 유럽 의학의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모습과

지나치게 학문에 치우친 의대 교수들의 지루한 강의에
친숙해지지 못하고 1827년에 에딘버러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박물학과의 만남]
당시 남미의 탐험 여행에 동행한 경험이 있는
흑인 해방노예(영국에서는 1833년 성공회 복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노예무역이 없어졌음)존 에드먼스턴에게서 동물의
박제 제작 방법을 배웠다.

다윈은 존을 매우 느낌이 좋은 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워 했다.

존 에드먼스턴이 가르쳐준 박제만들기는 나중에
비글호의 항해에 참가해 생물 표본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2학년 때에는 플리니 협회(급진적인 유물론에 매료된
박물학의 학생들의 클럽,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와 연관)에 소속해,

해양 생물의 관찰 등에 종사했다.

다윈은 로버트 에드몬드 그랜트의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활환경과 해부학의 연구를 도왔다.

어느날, 그랜트는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진화 사상을 칭찬했다.

다윈은 놀랐지만, 그 무렵 할아버지의 책을 읽어 유사한
개념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생각이 논쟁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교의 박물학의 수업은 지질학의 수성론(Neptunism)과
화성론(Plutonism) 논쟁 등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지루했다.

또 식물의 분류를 배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식물수집을 자랑한
에딘버러 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를 도왔다.

[영국 대학 투어!! (UCL + 에든버러대학)]


[신학과 진학]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과]
1827년 아들이 성공회 신부(Episcopal Reverend)가
되기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본인의 흥미에 따라 식물학자 헨슬로와 지질학자
아담 세지윅 교수의 지도를 받았으며 1831년에 졸업했다.

한국.net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부]
[부친의 권유]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자,
아버지는 다윈을 성공회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182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넣어
신학,고전, 수학을 배우게 했다.

다윈은 성공회 신부가 되면 성공회 미사 집전, 성서와
신학연구등의 교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박물학에 쏟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들였지만
찰스 다윈의 관심은 신학이 아닌 박물학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도 육촌 윌리엄 다윈 폭스와 함께
필수는 아니었던 박물학이나 곤충 채집에 심취했다.

폭스의 소개로 성직자이자,
박물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와 만나 친한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다.

다윈은 학내에서 헨슬로가 만든 정원을 둘이서
자주 산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헨슬로와의 만남에 대해서,
자신의 연구에 가장 강한 영향을 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 성직자이면서 지질학자였던 아담 세지윅에게 배워,
층서학에 평범하지 않는 재능을 발휘했다.



[자연신학]
동시에 당시 다윈은 신학의 권위자인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을 읽었고,

모든 생물은 하느님이 천지창조의 시점에서
완벽한 형태로 창조했다고 하는 설을 납득하고 믿었다.

자연철학의 목적은 관찰을 기반으로 한 귀납적 추론에 의해서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기술한 존 허쉘의 새로운 책이나,
알렉산더 훔볼트의 과학적 탐험 여행 등의 책을 읽었다.

그들의 불타는 열의에 자극되어 열대 지방에서
박물학을 배우기 위해서 졸업한 뒤,

동년배들과 테네리페 섬에 여행할 계획을 세우며,
그 준비 단계로 세지윅의 웨일스 지질 조사에 참가했다.



[여행]
이때의 그의 취미는 음악이나 후에
잔인하다며 그만둔 사냥이었다.

입학을 했던 1827년 여름에는 조시아 2세와 그 딸이자,
미래의 아내가 될 엠마 웨지우드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고
파리에 몇 주간 머물렀다.

한국.net
[Charles Darwin and Emma Wedgwood]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유럽 대륙 여행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
1831년에서 최고 성적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했다.
과학 역사는 이 두 대학교 시절을 다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본인은 훗날 회고록에서 "학문으로서 대학교도
(에딘버러 대학교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뒤 그는 세계일주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버지 로버트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에딘버러 대학 재학시절의 은사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의 간곡한 설득으로 아버지 로버트는
아들의 세계일주를 허용하였고,

한국.net
[비글호의 세계일주 항해, 1831년~1836년]

이는 훗날 그의 생애는 물론 생물학계에도 족적을 남기게 되는
비글호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중략)...





[말년]
진화론 하나로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으며,
2015년에 공개된 비밀편지의 내용을 보면
성서도 예수도 믿지 않는다며 종교적 소신을 명확히 밝혔다.

편지가 공개되기 전의 관련 기록에서는
다윈이 종교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퍼뜨린
'다윈이 죽기 직전 회개하고 진화론을 부정하였다'는
루머가 버젓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공개된 편지에서 다윈은 신탁으로서의 성서를 부인하고,
예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밝히게 돼
유감이라고 명확히 적어놓았다.

그 편지는 경매에 붙여졌고 197,000달러에 낙찰되었다.

다윈의 자서전을 보면 그 자신이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것만은 명백한 듯하다.

헉슬리나 조지프 후커를 비롯한 지지자들의 강력한 옹호를 받았으며
생전에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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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다윈 부부]

게다가 형인 에라스무스는 편지로 진화론을 강력하게 지지했었기에
그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다윈의 일기를 봐도 그걸 매우 기뻐했다.)

원래 집안이 꽤 넉넉한 집안이었거니와
그가 죽을 당시에도 이미 영국 여러 왕립학회 과학자들이
그를 위대한 학자이자 영국의 자랑이라고 찬양하고 있었다.

덕분에 왕립학회 회원으로 거리낌없이 활동했고 연금도 받았다.

[찬조 교향곡]


[죽음]
1882년에 그는 관상 동맥 혈전증과 심장 질환을 의미하는
"협심증" 이라고 불리는 진단을 받았다.

그의 사망 당시 의사들은 "협심증 발작"과 "심부전"을 진단했다.

다윈은 다운 하우스에서 1882년 4월 19일 73살로 사망했다.

[추모 음악]


유족들이 밝힌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랬다.

"쓰러질 것 같소....."

4월 18일 오후 3시 30분쯤에 아내 에마에게 남긴 말이었고,
이후 혼수상태에 빠져 다음 날 숨을 거뒀다.

보통 흔히 알려진 "난 죽는 게 두렵지 않아." 라는 말은
유언이 아니라 죽기 나흘 전인 4월 15일에 산책 도중에
아내인 에마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에마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60대 때부터
다윈은 여러 병에 시달려 자주 요양을 가고 같이 누워서
안정을 취했는데,

70대가 넘으면서 혼수상태가 되는 일이 잦아지자
죽기 며칠 전에 자신의 손을 잡으면서 단호하게 하던
말이었다고 한다.

그는 Downe에 있는 St Mary's 교회 묘지에 묻힐 것으로
예상했지만 Darwin의 동료들의 요청에 따라 공개
및 의회 청원을 거친 후 William Spottiswoode(왕립 학회 회장)는
Darwin이 Westminster Abbey에 묻히도록 주선했다.

한국.net

4월 26일 수요일에 열린 장례식에는
가족, 친구, 과학자, 철학자, 고위 인사 등
수천 명이 참석했다.

에마는 다윈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연구를 부정하는 건
일절 없었고 당당하게 여겼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다윈이 유언으로 진화론을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고인을 모독하는 엉터리 주장이라고 분노했다.

그렇게 그녀는 평온하게 살면서 14년 뒤에 남편을 따라갔다.

오랫동안 그냥 다윈의 아내로만 알려졌던 그녀도
조수이자 남편의 연구를 돕던 반려자라는 걸 부각시킨
그녀에 대한 전기가 2001년에서야 나오게 되었다.

한국.net

[찬조 트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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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 GPT 답변]
(답변에 오류가 있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from https://chat.openai.com/chat)

찰스 다윈이 좋아했던 음악 제목은?

알려진 것으로는 찰스 다윈은 고전적인 음악을 좋아했지만,
그의 좋아하는 특정한 음악 제목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윈은 음악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의 글을 통해 그의 음악적 취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from https://platform.openai.com/playground)

찰스 다윈이 좋아했던 음악 제목은?

"Ode to Joy"

음악 "Ode to Joy"의 작곡 년도는?

1824년입니다.





-------------------------------

[챗 GPT 답변에 오류(hallucination: 환각 등)가 있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from https://chat.openai.com/chat)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진화론 생물학자, England)이
제일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은?


찰스 다윈은 자신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영국의 과학자인 존 헨리(Newton John Henry)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존 헨리는 다윈의 선조들 중 한 명으로, 동물학, 지질학,
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전문가였습니다.

다윈은 헨리의 연구 방법과 접근법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헨리의 생각과 이론이 자신의 진화론 발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진화론 생물학자, England)이
좋아할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


저는 인공지능 언어 모델로써 음악 감상 능력은 한계가 있어,
찰스 다윈의 취향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또한, 다윈이 좋아했던 과학적 이론과 관련된 주제의
노래나 음악을 찾아 드리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윈이 좋아할 만한 음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선호하는 음악이나 노래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진화론 생물학자, England)이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episode)는?


찰스 다윈의 일생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를 발표하기 전,
다윈이 과학적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 일입니다.

다윈은 1831년에 영국 해군의 비행선인 HMS 비글호(Beagle)에
탑승하여 5년간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는 매우 다양한 지리학적, 지질학적,
생물학적 샘플을 수집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이 이후 그의 진화론 이론 발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행 중 다윈이 겪은 가장 재미있는 일 중 하나는,
남미 대륙의 한 섬에서 다리를 헛디뎌서
쓰나미에 휩쓸리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다윈은 검은 숲 속으로 달려가서 살아남았는데,
이 숲에서 다윈이 처음으로 지금은 멸종된 동물인
레이오수어(Lepidosiren)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동물은 폐가 없는 척추동물로,
다윈의 진화론 이론 발견에 큰 영향을 끼친
하나의 증거였습니다.

이와 같이 다윈은 자연의 놀라운 존재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모험과 재미를 경험했습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진화론 생물학자, England)은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일까?


찰스 다윈은 매우 양심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그는 학문적 연구를 위해 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쳤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연구가 인간의 진화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연구 결과에 대해 솔직하게 공개하며,
과학적인 증거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다윈은 인간의 진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종 차별을 근거로 하는 인종주의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이 같은 종이며, 인간의 진화가 진행되면서
모든 인종이 서로 다른 외모나 특징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인종관에 대한 인식은 그의 시대에서는
혁신적이었으며,
다윈은 이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따라서, 찰스 다윈은 양심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으로 평가되며,
그의 과학적 발견과 진화론 이론은 인류의 지식과 역사를
크게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진화론 생물학자, England)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찰스 다윈(Charles Darwin, 진화론 생물학자, England)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찰스 다윈은 그의 연구와 인생 전반에 걸쳐
매우 높은 윤리적 표준을 유지하며,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솔직하고 정직하게 공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인간의 진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종차별과 인종주의에 반대하였으며,
이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찰스 다윈의 양심등급은 A (매우 우수) 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

Charles Darwin

[Born] Charles Robert Darwin
12 February 1809
The Mount, Shrewsbury, Shropshire, England

[Died] 19 April 1882 (aged 73)
Down House, Kent, England

[Residence] England

[Citizenship] British

[Nationality] British

[Fields] Natural history, Geology

[Institutions]
Tertiary education:
University of Edinburgh Medical School
(medicine)
Christ's College, Cambridge (University of Cambridge) (BA)
Professional institution:
Geological Society of London

[Known for]
The Voyage of the Beagle
On the Origin of Species
evolution by
natural selection,
common descent

[Notable awards]
FRS (1839)
Royal Medal (1853)
Wollaston Medal (1859)
Copley Medal (1864)

[Spouse] Emma Darwin (m. 1839)

[Children] 10 children

Charles Robert Darwin
(12 February 1809 ~ 19 April 1882) was
an English naturalist and geologist,
best known for his contributions to
evolutionary theory.

He established that all species of life have descended
over time from common ancestors, and in
a joint publication with Alfred Russel
Wallace introduced his scientific
theory that this branching pattern of
evolution resulted from a process that
he called natural selection, in which
the struggle for existence has a
similar effect to the artificial
selection involved in selective breeding.



Darwin published his theory of
evolution with compelling evidence in
his 1859 book On the Origin of Species,
overcoming scientific rejection of
earlier concepts of transmutation of
species. By the 1870s, the scientific
community and much of the general
public had accepted evolution as a fact.

However, many favoured competing
explanations and it was not until the
emergence of the modern evolutionary
synthesis from the 1930s to the 1950s
that a broad consensus developed in
which natural selection was the basic
mechanism of evolution. In modified
form, Darwin's scientific discovery is
the unifying theory of the life
sciences, explaining the diversity of life.

Darwin's early interest in nature led
him to neglect his medical education at
the University of Edinburgh; instead,
he helped to investigate marine
invertebrates.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Cambridge (Christ's
College) encouraged his passion for natural science.

His five-year voyage on HMS Beagle established him as an
eminent geologist whose observations
and theories supported Charles Lyell's
uniformitarian ideas, and publication
of his journal of the voyage made him
famous as a popular author.

Puzzled by the geographical
distribution of wildlife and fossils he
collected on the voyage, Darwin began
detailed investigations and in 1838
conceived his theory of natural
selection. Although he discussed his
ideas with several naturalists, he
needed time for extensive research and
his geological work had priority.

He was writing up his theory in 1858 when
Alfred Russel Wallace sent him an essay
that described the same idea, prompting
immediate joint publication of both of their theories.

Darwin's work established evolutionary descent with
modification as the dominant scientific
explanation of diversification in
nature. In 1871 he examined human
evolution and sexual selection in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followed by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His research on plants was
published in a series of books, and in
his final book, he examined earthworms
and their effect on soil.

Darwin has been described 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figures in human
history; he was honoured by burial in
Westminster Abbey.

(from naver.com 네이버 두산백과 나무위키 wikipedia.org)


Abbey, Animals, Alfred, Artificial, All, influential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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