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이시영 李始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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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李始榮, 독립운동가, 1대 부통령, Korea
이시영 (이성흡) 李始榮 Yi Si-yeong
독립운동가, 제1대 부통령(대한민국)

[출생-사망] 1868년 12월 3일-
1953년 4월 17일 (84세)

[출생지] 서울
[가족] 형 이회영

[본관] 경주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경력사항]
1948.07 ~ 1951.05
대한민국 부통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
한국국민당 감사

1933 ~ 1945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회 위원장, 이사

1919.09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

1919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
경학사, 신흥강습소 설립
1908 한성재판소 소장
1907 중추원 칙임의관
1906 평안남도 관찰사
1905 외부교섭국 국장

[수상내역]
194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요약]
한말의 독립운동가·정치가. 만주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1948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통치에
반대했다.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 낙선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본명은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이다.
조선 말기인 1869년(고종 6)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886년 가주서(假注書),
1887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副承旨)에 이어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고,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궁내부(宮內部)
수석참의(首席參議)를 역임하였으나,
1896년 장인인 김홍집(金弘集)이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재등용되고, 1906년 평남 관찰사로 나갔다가
1908년 한성(漢城)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
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하여
류허현[柳河縣]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하여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고,
1933년 임시정부 직제 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그뒤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
장으로 활약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헌국
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와 실정(失政)으로 뜻을 펴
지 못하다가 1951년 '거창 양민학살 사
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의 실정(失政)과 부패를 성토하는
〈국민에게 고한다〉라는 성명서를 국회에
전달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한동안 정계를 떠나 있다가 1952년 5
월 민주국민당의 거듭된 요청으로 제2대 대
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10.9%의 득표에
그쳐 이승만(74.6%)·조봉암(11.4%)에 이
어 3위로 낙선하였으며, 1953년 4월 17일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을 치른 뒤 서울의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지금의 강북구 수유동 73-3번지로 이장되었다.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던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형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
동생 호영(頀榮)과 함께 6형제가 전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으로 유명하며,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대종교(大倧敎) 활동에도 힘써 사교교질(司敎敎秩)·
원로원장 등을 맡았으며, 저서로는 《감시만어(感時漫語)》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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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

[임기] 1948년 7월 24일~1951년 5월 9일
[대통령] 이승만
전임: 김규식 (1881년)(제0대)
후임: 김성수 (1891년)(제2대)
[국적]
조선, 대한제국, 중화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868년 12월 3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일] 1953년 4월 19일(84세)
[사망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정당]
한국국민당(1935)→한국독립당(1940)→독립
촉성중앙회(1946)→민주국민당(1952)
[별명]
호는 성재, 시림산인,
자는 성옹, 성흡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경주김씨(김홍집의 딸),
반남박씨임
[자녀] 아들 이규열

이시영(1868년 12월 3일 한성부 ~ 1953년 4
월 19일 부산)은 조선, 대한제국의 관료이
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성옹(聖
翁),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
人),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여러 벼
슬을 거쳐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
과(丙科)로 급제, 부승지, 우승지(右承旨)
에 올라 내의원 부제조, 상의원 부제조 등
을 지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독립 운동에
투신,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19년 9월 통합 임정 수립
이후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 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임정 요인이
단정론과 단정반대론으로 나뉘었을 때는
단정론에 참여하였다. 1948년 7월 24일부
터 1951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후손으
로, 영조 때의 정승 이종성의 5대손이었
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과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아들이며, 이건영
(李健榮), 이석영(李石榮), 이철영(李哲
榮), 이회영(李會榮)의 동생이자 이소영(李
韶榮), 이호영(李護榮)의 이복 형이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신익희와도 인척간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 및 가계 배경]
이시영은 1868년 12월 3일 조선 한성부 저동에서
고종 때 이조판서와 의정부우찬성을 지낸
아버지 이유승과 어머니 동래 정씨의 다섯째
막내 아들로, 당색으로는 소론 계열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은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이다.

이후 여동생 2명이 더 태어났고, 이복 동생으로
이소영과 이호영이 태어났다.

그는 해공 신익희와도 사돈간으로, 여동생
이씨는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신익희의 여
섯째 형인 신재희(申宰熙)와 결혼했다.

그의 가계는 신라, 고려와 조선에서 대대
로 문무관료를 배출한 양반 가문이었다. 신
라의 개국공신 이알평의 후손이자 통일신
라 소판 이거명의 34대손이었다. 고려의 문
하시중 이제현과 이항복의 후손으로, 조선
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
의 10대손이었다. 소론의 지도자 이광좌는
그의 6대 방조(傍祖)였고, 이시영의 7대조
이세필(李世弼)은 형조참판이었고, 6대조
이태좌(李台佐)는 소론의 중신이자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으며 5대조 이종성(李宗
城)은 의정부영의정을 지냈고, 노론일색의
조정에서 사도세자의 몇안되는 후견인이기도 했다.

외교관으로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을 지
낸 당대 정치거물이며 일제 강점기에 친일
파로 변절한 이하영(李夏榮), 국문학자 이
준영(李準榮) 형제는 이시영의 12촌 종형이
었다. 이하영·이준영 형제의 아버지인 증
내부대신(贈內部大臣) 이유수(李裕脩)는 그
의 아버지 이유승과 10촌 종형제간이었다.

외가 역시 벌족으로 어머니 동래정씨(東萊
鄭氏)는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
弼)의 후손으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이
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이었다.

[유년기]
이시영이 태어날 무렵 당시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은 그의 아저씨
뻘 되는 친족이었는데, 이유승의 둘째 아들
이자 그의 둘째 형 이석영이 이유원의 양자
로 출계하였다.

유년기에 이시영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
였고,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1894
년 갑오경장 당시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
의 딸인 1년 연상인 경주 김씨와 결혼했다
가, 사별 후 15년 연하의 반남 박씨와 재혼
하였다. 이시영은 1885년 사마시에 급제
1885년에 16세에 식년감시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 생원(生員)이 되고 바로
음서(陰敍)로 관직에 투신했다.
1886년(고종 23년)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대한제국 관료 생활]
1887년(고종 24년) 형조좌랑 등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와
경연청 서연관(書筵官)을 지냈다. 1891
년 세자익위사우사어(右司禦)가 되었다.

18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92년 이후 홍문관교리·홍문관수찬, 승정
원 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후 승정원우승
지,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
제조(副提調), 이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
府事), 궁내부 수석참의등을 지냈으나 장인
인 김홍집이 살해당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물러났다.

1904년(광무 6년) 충청도도순찰사에 임명되
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사표를 올렸다.

[을사조약 이후]
1905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외부 교섭국
장(外部交涉局長)이 되었다. 외부 교섭국
장 재직 중 러일 전쟁 직후 을사 조약이 체
결되자 그는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다. 외부
대신 박제순을 찾아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박제순은 을사조약
을 받아들이자 교섭국장직을 사직하였다.
당시 이시영의 조카와 박제순의 딸이 약혼
한 상황이었는데, 박제순이 을사조약 체결
에 동의하자 그는 즉각 혼약을 파기하고 박
제순 집안과도 절교를 선언하였다.

1906년 평안남도 관찰사(觀察使)로 부임하
였다. 관찰사로 부임한 그는 서양식 근대학
교 설립 및 구국계몽운동 확산에 힘을 쏟았
다. 1907년(융희 1년) 상경하여 중추원 칙
임의관(勅任議官), 1908년 법부(法部) 민사
국장(民事局長), 한성재판소 소장, 한성고
등법원 판사 등을 지냈다. 1909년(융희 3
년) 대한제국 법부 법률기초위원이 되었
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인 1910년 10
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으
나 1911년 2월 의원 면직 처리되었다. 1911
년 1월 조선총독부 취조국 위원으로 임명되
었지만 1911년 3월 의원 면직 처리되었다.


[독립운동]
[신흥무관학교 활동]
1910년 8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1910
년 12월 이시영은 위로 건영(健榮)·석영
(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 아래로
소영(韶榮)·호영(護榮) 등 형제의 가족 50여명과
함께 압록강 건너 남만주 지린 성의
류허 현(柳河縣)추가보(鄒家堡)로 망명,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이들의 소식이 알려지자 1911년 1월부터 3월 사이에
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김동삼
(金東三)·주진수(朱鎭洙)·윤기섭(尹琦燮)
·김창환(金昌煥)·김규식(金奎植)·유동렬(柳東說)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기지 설립에 찬성하고
류허 현 삼원포(三源浦)에 집결했다.


1911년 4월에는 삼원포 대고산(大孤山)의
노천(露天)군중대회로 자치단체인 경학사
(耕學社)를 창설, 사장에 이상룡을 추대하
여 일면 민생, 일면 교육의 두 목표를 걸
고 이주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생산을 지도
하는 등, 최초의 항일구국 자치단체로서 괄
목할 활동을 벌이며, 추가보(鄒家堡)에는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신흥강습소는 1911
년말에는 일제 밀정의 감시를 피해 이 강습
소를 퉁화 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이
전한 뒤, 교사를 신축, 확충하면서 동시에
신흥학교로 개명했고 1913년 5월에는신흥무
관학교로 개명, 독립군 간부를 본격적으로
모집, 키워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자, 국내에서 애국청년이 계속 몰려듦에 따
라 이때 학생수가 무려 600명에 이르러 도
저히 수용이 어려웠다. 따라서 학교를 다
시 류허 현 고산자 하동 대장자(孤山子 河
東 大壯子)로 옮겼다. 신흥무관학교는 이
론, 병법, 전술등을 교육했고, 폐교되는
1920년 8월까지 3,500여 명의 간부를 배출
했으며, 양성된 병력이 청산리 전투의 주축
을 이루는 등, 1910년대 서간도 지역 독립
군양성의 본산이었다. 그 뒤 아들과 며느
리 서차희의 결혼식 때는 1000여 명의 하객
이 보낸 축의금을 모두 상하이 대한민국 임
시 정부로 보냈다.
(중략)

[평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일 정도로 청렴
결백했다고 한다. 대대로 대소 관료를 배출
하였으며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던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재산과 영달을 포기하고 형 건영(健榮)·석영(石榮)·
철영(哲榮)·회영(會榮), 동생 호영(頀榮)과
함께 6형제가 전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으로 유명하였다.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었음에도 개인적으로도 사치하지 않고
근검절약하였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
Yi Si-yeong

Vice President of South Korea
[In office]
24 July 1948 – 9 May 1951
[President] Syngman Rhee
[Succeeded by] Kim Seong-su

[Personal details]
[Born] 3 December 1868
Hanseong-bu, Joseon

[Died] April 19, 1953 (aged 84),
Busan, South Korea

[Political party]
Democratic Party
[Religion] Confucianism

Seongjae Yi Si-yeong
(李始榮, December 3, 1868 – April
19, 1953) was a Korean politician,
independence activist, educator and Neo-
confucianism scholar. He was the first
Vice President of South Korea from 1948
to 1951. Yi resigned after the
National Defense Force Incident. His
nickname was Seongjae (성재; 省齋),
Sirimsanin (시림산인; 始林山人).
Before, the Japan–Korea Treaty of
1910, he had served for Joseon, as the
Governor of South Pyongan Province and
the President of Hansung Law Court.

(from naver.com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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