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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鄭周永, 기업인, Chung Ju-yung, Korea
정주영, 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자,
Chung Ju-yung



[출생-사망]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
2001년 3월 21일 (85세)



[가족] 배우자 변중석, 아들 정몽필, 정몽
구,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
윤, 정몽일, 손자 정의선, 정일선, 정문
선, 정대선, 정기선, 손녀 정성이, 정명
이, 정윤이, 정지이, 동생 정인영



[학력사항]
2000 한국체육대학교 이학 명예박사
1995 존스홉킨스대학교 인문학 명예박사
1995 고려대학교 철학 명예박사
1990 서강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1986 이화여자대학교 문학 명예박사
1985 연세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
1982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1976 충남대학교 경제학 명예박사
1975 경희대학교 공학 명예박사
~ 1930 통천송전소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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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사항]
2006.11 타임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
1998.03 ~ 2001.04 현대건설 대표이사 명예회장
1994.01 한국지역사회교육중앙협의회 이사장
1992.05 ~ 1993.02 제14대 국회의원
1987.02 ~ 1991.12 현대그룹 명예회장
1982.07 ~ 1984.10 제27대 대한체육회 회장
1985 ~ 1987 제17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83 ~ 1985 제16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81 ~ 1983 제15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79 ~ 1981 제14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77 ~ 1979 제13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1973.12 현대조선중공업 설립
1950.01 현대건설 사장
1946.04 현대자동차공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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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
2008 제4회 DMZ 평화상 대상
2001 제5회 만해상 평화상
1998 커맨더 위드 스타 (노르웨이 왕실 최고 공로훈장)
1998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 훈장
1988 국민훈장 무궁화장
1987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2 자이레 국가훈장
1981 국민훈장 동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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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5년 11월 25일
일제 강점기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사망] 2001년 3월 21일 (85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

[사인]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



[국적] 대한민국

[별칭] 호는 아산(峨山)

[학력] 통천송전소학교 졸업

[경력] 현대그룹 회장

[직업] 기업인

[종교] 불교

[배우자] 변중석

[자녀] 슬하 8남 1녀

[부모] 아버지 정봉식, 어머니 한성실

[친척] 6남 2녀 중 장남



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 ~ 2001년 3월 21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주이며 한국의 기업을 이야기할 때
자수성가한 기업인 중의 한 명으로
쉽게 대화의 주제가 되는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에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 서비스(Art Service)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한때 홀동광산을 운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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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1946년 4월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하였고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으며 건설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에 조사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 추진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정주영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영웅시대》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1998년 6월 16일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여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 활동으로는 1992년 초 김동길 등과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선출되었으며,
제14대 총선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해 12월에 제14대 대선에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듬해 2월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였다.



[생애]
[생애 초반]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에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
(현 북한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峨山)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하였고 그와 함께한 동창생은 27명이며
정주영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하다.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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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주영은 무려 4번이나 가출을 하였다.

두 번째 가출하여 금화에 가서 일하였다.

3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하여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의 나이로 인천에서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하여 집을 나온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다.

장부를 잘 쓸 줄 아는 정주영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았고
쌀가게 주인의 아들은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정주영에게 가게를 물려 주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11월 23일 밤 변중석 집에서 처음 대면하였다.

당시 소녀 변중석은 윗마을 총각이 서울서 선을 보러 내려왔다는
부친의 말에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떨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보름 뒤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신부 뒷모습만 보고,
신부는 신랑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뤄진 결혼이었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 받아 복흥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복흥상회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전쟁으로 인해
쌀이 배급제가 되면서 결국 가게를 정리하였다.



[기업 활동]
[자동차 공장 설립]
1940년 당시 경성부에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던
이을학(李乙學)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소식을 접하고 인수를 시작한다.

일제말기인 1941년 빚을 내어 아도 서비스의 사업을
맡기도 하였으나 1달도 채 지나기 전에 불에 타버렸다.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 빈터에다 다시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장도 1942년 5월 기업정리령에 의해
공장을 빼앗기다시피하고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떠나게 된다.

홀동광산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간 하다가
1945년 5월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는데,
3개월 후 일본의 패망으로 홀동광산은 문을 닫고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소련군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그는 이미 타인에게 광산업을 인수하였으므로
극적으로 피랍을 모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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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설립]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 돈암동의 스무 평 남짓한 집에서 동생들,
자녀들과 함께 벌어놓은 돈으로 살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였다.

또한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 건설업에도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두 회사인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때 자본금은 삼천만원이었다.

그러나 그해 한국 전쟁으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한 정주영은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하던 덕에
서울에서 하던 토목사업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며
서울 수복 후 미8군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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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전반기와 전후 복구 사업]
한국 전쟁 직후 현대건설은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하면서 점차 늘어가는
건설수요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늘어나는 건설 수요 등을 감안하여 그는
시멘트 공장 설립을 추진,
1964년 6월 현대 시멘트공장을 준공하여
시멘트도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

그 뒤 낙동강 고령교 복구, 한강 인도교 복구, 제1한강교 복구,
인천 제1도크 복구 등의 사업을 수주하여
1960년에는 국내 건설업체중 도급한도액이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5년에는 국내 최초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1967년에는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내며
한국 국외의 건설시장으로도 진출하였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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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2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3년 12월에는 중공업에도...



[경제건설사업 참여]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돌았다.

차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부정적인 반응만 받다가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주영은 우리 나라 5백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1977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분양특혜사건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건축법 위반에 대해 징역 6월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나 현대산업개발 사장이었던
차남 정몽구가 서울지검 특수부에 구속되어
아들이 아버지 대신 처벌받는 전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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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4월 29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80년에는 신군부에 의하여 창원중공업을 강탈당했으며,
이어 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후 LG반도체를 인수합병하여, 반도체 위주로 사업을 전개하며,
Hynix로 사명을 변경하고, SK그룹이 인수하여,
현재의 SK하이닉스가 되었다.

[사회 활동]
기업인으로 활동하는 중에도 한국지역사회학교 후원회에 참여하여,
1969년 1월에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장에 피선되기도 했다.

1974년 6월에는 한국과 영국의 민간 경제협력을 위한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한국측 대표의 한사람에 선출되었고,
1970년대 중근동 지역 건설, 개발 사업을 성사시킨 뒤
1976년부터 1997년까지는 한국·아랍 친선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7년부터는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제13대 회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한국·아프리카 친선협회의 회장으로도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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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유치 추진 활동]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 주도로 88 올림픽의
서울특별시 유치 운동에 참여하였고,
1981년 3월에는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조직되자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어 각국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활동, 설득 작업을 추진했다.

1981년 11월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되자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에 선임되고,
바로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되어
서울올림픽 사전 준비와 86 아시안게임 사전 준비활동을 추진하였고,
1982년부터 1987년에는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에 추대되고,
그해 5월에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생애 후반]
[정계 입문 초기]
1987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 초빙되었으며
그해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고
그해 현대그룹 명예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 뒤 1992년 1월초 정계에 입문,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이어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 출마]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석패하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김영삼 정권의 세무조사를 받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보복이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 이후 기업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되었다.

1996년 그해 타임지 선정 '아시아를 빛낸 6인의 경제인'의
한사람에 추천되기도 했다.

1994년 1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방북과 금강산 개발]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은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의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정주영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하였다.

이때 그는 직접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차례 더 방북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을 설득,
남북 민간교류 중 큰 규모인 '금강산 관광 사업'을 성사시켜
그해 11월 18일 첫 출항하였으나
북한의 사업장 몰수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그는
1999년 2월에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사실 정주영은 1989년에 북한과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하여
금강산 공동 개발 의정서에 서명하였는데,
이것이 9년 만에 현실화된 것이다.

이때 정주영은 원산과 평양을 둘러봤으며,
특히 자신의 고향 통천도 방문하였다.

[사망]
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87년 제1회 한국경영대상,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하였다.

한편 현대그룹은 각기 분산되어 현대자동차그룹, 현대건설,
현대중공업그룹 등으로 분리되었다.

한편 정주영은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아내 변중석이 입원해있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이후 자택에서 요양중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뒤인 3월 21일에 사망하였다.

[사후]
그의 사후인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TIME)지 선정 아시아의 영웅에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다.

[명예 박사 학위]
1975년 경희대학교 명예공학 박사
1976년 충남대학교 명예경제학 박사
1982년 조지워싱턴 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1985년 연세대학교 명예경제학 박사
1986년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 박사
1990년 서강대학교 명예정치학 박사
1995년 고려대학교 명예철학 박사
1995년 존스홉킨스대학교 명예인문과학 박사
2000년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 박사

[연보]
1940년 3월 합자회사 아도(Art)서비스 공장 인수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 대표이사
1947년 5월 현대토건사를 설립
1950년 1월 자신이 운영하던 현대자동차와 현대건설을 합병,
현대건설주식회사로 개편하고 대표이사 취임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
1969년 1월 한국 지역사회학교 후원회 회원, 바로 회장에 선출
1969년 12월 현대시멘트주식회사 설립, 71년에 공장으로 설립
1971년 3월 현대자동차, 중공업, 시멘트 등의 회사들을 한데 묶어
현대그룹으로 출범시키고 회장에 취임
1973년 12월 계열사로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
1974년 6월 한·영경제협력위원회가 개최될 때 한국측 위원장 피선
1975년 4월 현대미포조선주식회사 설립
1976년-1997년 한·아랍 친선협회 회장 피선
1977년-1987년 전경련의 13대 회장
1977년 7월 재단법인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
1979년-1980년 한·아프리카 친선 협회장
1981년 3월 88서울올림픽 유치 위원회 위원장 피선
1981년 11월 88서울올림픽 유치 확정,
곧바로 올림픽 조직 위원회 부위원장
1982년-1984년 대한체육회 회장
1982년-1987년 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
1983년 2월 계열사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 설립
1983년 5월 한국정보산업협회장에 추대
1985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장에 재선
1987년 2월 현대그룹 명예회장 취임
198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명예회장 취임
1987년 5월 한국정보산업협회 명예회장 취임
1987년-1988년 재단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 취임
1989년-1991년 한·소(韓·蘇) 경제협회장
1992년 1월 통일국민당(가칭)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 피선
1992년 2월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의원 피선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비례대표) 당선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
1993년 2월 통일국민당 탈당, 이어 국회의원직 사퇴
1993년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재추대
1994년 1월 한국지역사회교육 중앙협의회 이사장에 선임

1998년 6월 1차 방북,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 통해 북한(한반도 북부지역)을 방문

1998년 10월 1차 방북 4개월만에 2차 방북, 소 501마리와 함께
판문점 통해 방북,
이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 경협사업을 논의

1998년 11월 금강산 관광단지 개장에 참석

2000년 병으로 입원했다가 퇴원, 자택에서 요양

2001년 3월21일 별세

[서훈]
1977년 명예 대영 제국 훈장 3등급
(honorary CBE, 외국인대상 정원외 명예훈장)
1981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3등급)
1987년 한국경영대상
198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
1998년 IOC 훈장
1998년 노르웨이 왕실훈장
2001년 제5회 만해상 평화상
2008년 제4회 DMZ 평화상 대상

[저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1991년
《이 땅에 태어나서》, 1998년
입이 뜨거워야 성공할 수 있다, 2002년
정주영, 《입이 뜨거워야 성공할 수 있다》
(도서출판 숲속의 꿈, 2002)
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 (도서출판 솔, 2009)
정주영,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제삼기획, 2001)
카리스마 vs 카리스마 이병철 · 정주영 / 홍하상 著 /
한국경제신문사(정주영의 생애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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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뉴시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21주기를 맞아
범(汎)현대가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옛 자택에 모였다.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범현대가는 정주영 명예회장 21주기를
하루 앞둔 2022년 3월 20일 청운동 자택을 찾아
정주영 회장과 변중석 여사의 제사를 지냈다.

변중석 여사의 기일은 8월16일이지만
현대가는 2020년부터 제사를 합쳐 지내고 있다.

범 현대가는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시간대를 나눠 순차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정 명예회장의 장손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오후 5시쯤 가장 먼저 참석했으며,
뒤를 이어 정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정 이사장의 아들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사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
정몽선 성우그룹 회장,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정몽석 현대종합금속 회장,
정몽훈 성우전자 회장, 정몽용 현대성우홀딩스 회장,
정몽진 KCC 회장, 정몽혁 현대코퍼레이션홀딩스 회장 등도
청운동을 찾았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1915년 11월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정봉식과 한성실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
현대그룹을 일군 창업주다.

1946년 4월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면서
'현대'라는 상호를 처음 탄생시켰고,
1947년 '현대토건사'를 설립했다.
현대토건사는 현대건설의 전신이다.
이후 정주영 회장은 더욱 사업 영역을 넓혀갔다.
건설과 자동차 사업은 더욱 탄탄해졌고 조선 분야로도
시선을 돌려 비약적 성장을 이룩했다.

1998년에는 85세의 고령에 전세계인의 관심을 집중시킨
소떼몰이 방북을 성사시켜 남북 화해와 교류의 시대를 열기도 했다.
국내 기업인 최초로 구소련과 중국을 방문한
민간 외교인으로도 활약했다.
정주영 회장은 2001년 3월21일 86세로 생을 마감했다.

(from https://newsis.com 2022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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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 Ju-yung

[Born] Chung Ju-yung
November 25, 1915
Tongchon, Kogendo, Japanese Korea
(now Tongchon, Kangwon Province, North Korea)

[Died] March 21, 2001 (aged 85)
Songpa District, Seoul, South Korea

[Nationality]
Republic of Korea

[Occupation] Businessman

[Known for]
Founder and honorary chairman of Hyundai.

[Children]
9 (8 sons and 1 daughter)

Chung Ju-yung (鄭周永; November 25,
1915 – March 21, 2001) was a
South Korean entrepreneur, businessman
and the founder of all Hyundai Groups of South Korea.



[Life]
[Early life]
Chung Ju-yung was born in Kangwŏn
province (now located in North Korea),
during a time when Korea was under
Japanese rule. Born to a large
impoverished family of peasants, he was
the eldest out of six children.

As a young boy, Chung dreamed of becoming a
school teacher but his hopes were cut
short because the restrictive
environment at the time kept the family
stuck in poverty, effectively keeping
Chung away from the opportunities of
higher education. Despite the setbacks,
Chung continued to go to a local
Confucian school run by his grandfather
whenever his time was not taken up by
tasks on the family farm.

Chung's talent for business became
apparent during his trips into town
where he would sell wood. The fast
paced atmosphere of the town along with
the articles in newspapers he read
sparked his imagination and he soon
grew tired of the poverty that he and
his family had to endure. At the age of
sixteen, Chung and a friend decided to
travel to the city of Chongjin for work
in hopes of escaping the harsh
realities of farm life.

After a 15-mile trek through the most dangerous parts
of the Paechun valley, the pair reached
the town of Kowon where they took up
jobs as construction workers. They
worked long hours for low pay but Chung
enjoyed the fact that he could
independently earn money. Chung & his
friend continued the work for two
months until Chung's father found their
whereabouts.

[Second attempt]
The journey that Chung and his friend
had embarked on made him realize his
passion for civil engineering and gave
him a sense of accomplishment that he
had been looking for. Once he returned
to Asan, he devised another escape
plan; this time towards Seoul. With two
companions, Chung left for Seoul in April 1933.

The journey seemed to be destined for failure,
especially since one of the boys had already got caught
by a sibling early on. More misfortune
came upon them when Chung was conned by
a stranger who promised him and his
friend jobs but instead took all of the
money they had with them. The journey
came to an end when Chung's father
found the two staying at Chung's
grandfather's house nearby.

[Third attempt]
Chung once again found himself in Asan,
where he remained for a year helping
his father work on the family farm.
Once his duties to the family were
complete, Chung decided that it was
time to make another attempt at getting
out of poverty. He managed to get a
train ticket for 70 won by selling one
of his father's cows Once he arrived in
Seoul, Chung enrolled himself in a
local bookkeeping school hoping to
start a career as an accountant. Things
went smoothly for Chung for two months,
when his father managed to find him and
after a mild argument, took him back to Asan.

[Rice merchant]
In 1933, at the age of 18, Chung
decided to make a fourth attempt to
escape. He left during the night with a
friend who had been trying to escape a
forced marriage. Once Chung had reached
Seoul, he jumped at any job he could
find. He first worked as a laborer at
Incheon Harbor, later as a construction
worker at Boseong Professional School
and then as a handyman for a starch syrup factory.

After working for the syrup factory for
nearly a year, Chung managed to land a
job as a deliveryman at the Bokheung
Rice Store in Seoul. Chung's new job
offered him room for advancement and as
Chung became more successful at it, he
decided to stay on full-time. Chung
eventually won the praise of the rice
store's core customers which impressed
the owner so much that he allowed Chung
to manage the store's accounting after
only six months on the job. His
experiences as the store accountant
helped Chung to thoroughly develop his business sense.

In 1937, the owner of the rice store
became ill and decided that it would be
in his best interest to give the store
to Chung. At 22 years of age, Chung
became the store owner and changed the
name of the store to Kyungil Rice
Store. The store grew and made good
profits until early 1939 when Japan, in
its war efforts to secure rice supply
to Japan and its military, imposed an
oppressive rice-rationing system which
forced Korean businesses out of trading rice.

[Creation of Hyundai]
[A-do Service Garage]
Chung returned to his village once his
business failed and stayed there until
1940, when he decided to try again in
Seoul. After considering the reality of
restrictions imposed on Koreans in
certain industries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Chung decided to
enter the automobile repair business.
Using a service garage he purchased
from a friend, Chung started the A-do
Service Garage on a 3,000 won loan.
Within three years, the employee number
grew from 20 to 70 and Chung was able
to bring in a good income. In 1943, the
Japanese Occupational Government forced
the garage to merge with a steel plant
as part of the war effort.[2] Although
his businesses were seeing their demise
due to suppression by the Japanese,
Chung returned to Asan with 50,000 won
in savings to try to make the best of the situation.

[Hyundai]
In 1946, after the liberation of Korea
from Japanese control, Chung started
Hyundai and Hyundai Civil Industries in
anticipation of the post-war
reconstruction and industrialization.
Chung won major government contracts
and became responsible for building
much of South Korea's transportation
infrastructure, including the Soyang
Dam in 1967, the Gyeongbu Expressway in
1970, the world's largest shipyard in
Ulsan, the Kori Nuclear Power Plant and
many others. Chung also won contracts
from the American military to build
facilities for their personnel as his
younger brother could speak English and
was on good terms with the U.S. Army engineers.

During the North Korean invasion of
1950, Chung abandoned his construction
projects and fled with his younger
brother to Busan for safety. His son,
Chung Mong-joon was also born there.
Chung continued to build onto the
company by gathering any kind of work
he could get from the U.N. forces & the
Korean Ministry of Transportation.[1]
Once Seoul was regained by U.N. forces,
Chung reestablished the company and
continued to gather more work from the Americans.

From there on, Chung continued to grow
and diversify the company into one of
South Korea's major chaebol. With no
experience in shipbuilding, he created
the Ulsan shipyard, the largest
shipyard in the world. The first vessel
was completed in three years (rather
than the expected five) as Chung had
the shipyard and vessel built
simultaneously. He introduced the
Hyundai Pony in 1975 and the Hyundai
Excel in 1986 using European expertise.

[Later years]
From the 1980s until recently, the
Hyundai Group was split up into many
satellite groups. Chung had a very
successful career. In Seosan, he
carried out a successful reclamation
project, using a decommissioned oil
tanker as a cofferdam.[citation needed]
Also he sent 1001 cows over the DMZ to
North Korea. He was the first to
propose the Geumgangsan sightseeing
excursions.[citation needed] He
developed the PONY as a first Korean
car, which was the start of Hyundai
Motors. He founded the Hyundai Heavy
Steel Company which developed a non-
dock shipmaking method.

Chung's philanthropy distinguished him
from the other businessmen of his
generation. In 1977 he founded the Asan
Foundation with a scope of activities
comparable to those of the Ford or
Rockefeller Foundations.

The Asan Foundation was organized into
four major areas of service: medical
support, social welfare, research and
development, and a scholarship fund.
Through its efforts, the Foundation
established nine hospitals throughout
South Korea, built Ulsan Medical
College, and funded the Asan Life
Sciences Research Institute. The
Foundation also initiated cooperative
arrangements between industry and
academic institutions by supporting
such academic research as the Sinyoung Research Fund.

[Political activities]
Chung is credited with successfully
lobbying for South Korea to host the
1988 Summer Olympics. This success
highlighted the accomplishments of his
generation in the eyes of the world and
became a source of great pride to the
people of Seoul. In 1992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awarded
Chung an IOC Medallion for his
contributions to sports as a vehicle of
international understanding.

Chung ran as a presidential candidate
for 1992 Korea presidential election.

Chung also worked to normalize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In
1998, at the age of 82, he worked with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o provide
economic assistance to the North.
President Kim wanted to provide a $100
million donation as a way to jump-start
economic development in North Korea.
However, Kim could not find a legal way
to transfer the funds. He turned to
Chung, who was already negotiating a
large program with the North. Kim
persuaded Chung to increase his
investment by $100 million with money
from secret loans provided by the
government-controlled Korea Development
Bank. The historic South-North summit
took place, with Chung traveling across
the border in a motorcade of cars
containing some 1001 "unification cows"
as a gift to the North Korean people.

[Death]
Chung died at the age of 85 of natural
causes at his home in Seoul, and he was
buried in accordance to Buddhist and
Confucian customary rites. His wife,
Byun Joong-seok, died on August 17,
2007, due in part to long-term heart
complications, and was buried in a
family graveyard in Hanam, along with
her husband and their son.

[Books]
No Failures but Trials.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Born in this Land
(이 땅에 태어나서)

(from naver.com wikipedia.org)


Company, CEO, Chairman, Business, influence(+)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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