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G 안중근 安重根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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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安重根,독립운동가,Ahn Jung-Geun,Korea
안중근 (안응칠) Ahn Jung-Geun,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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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879년 9월 2일, 황해도 -
1910년 3월 26일 (30세)

[가족] 손녀 안연호, 동생 안정근, 안공근

[경력사항]
한인민회 고문
대동학교 학감
대동공보 기자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
삼합의 설립
돈의학교 설립
삼흥학교 설립
서우학회

[수상내역]
1962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
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
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
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
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
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
[생애]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32세)
[출생지] 조선 황해도 해주부
[사망지] 일본 제국 관동주 식민지 청나라
만주 랴오닝 성 료준
[본관] 순흥(順興)
[별명]
아명은 안응칠(安應七)
일명은 안다묵(安多默)
[종교]
유교(성리학) → 천주교(세례명:토마스)
[부모] 안태훈(부), 조마리아(모)
[배우자] 김아려
[자녀] 안문생(장남), 안준생(차남)
[친척]
안정근(아우)
안공근(아우)
안명근(사촌 남동생)
안경근(사촌 남동생)
안우생(친조카)
안미생(친조카딸)
김인(친조카사위)
안진생(친조카)
안봉생(5촌 조카)
안춘생(5촌 조카)
김구(사돈)
안창호(친족척)
[복무] 대한의군
[복무 기간] 1907년 ~ 1909년
[최종 계급] 대한의군 참모중장
[근무]
의병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사령관
[지휘]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
[서훈 내역]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기타 이력]
한학 수학 이후 천주교에 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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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
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 多默)이다.

[일생]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조의 유학자 안향
(安珦)의 26대손이다.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
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
다.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
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
였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
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森泰二郞), 남만주 철도 이사인 다나카 세
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
으로 사형(교수형) 집행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
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
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
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
슷한 채표회사(彩票會社) 활동을 하기도 했
다. 1905년 대한제국을 사실상 일본 제국
의 속국으로 만든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사상적
측면으로는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였다. 직
위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에 이르렀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
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할아버지 안인수는 해주 일대에
서 미곡상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축적
했다. 1911년 한국을 방문하여 안태훈 일가
의 활동지를 답사한 베네딕토수도원의 노베
르트 베버 신부가 작성한 여행기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형제와 가족 36인이
해주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았을 당시에 안
인수는 4백석의 토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
다. 할아버지가 대지주에 미곡상으로 거부
가 되어 재산을 축적하였으므로 그는 어렵
지 않은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뒤에 일본은 안인수가 "항상 미곡 매입 대
금을 지불하지 않는 등 각종 간악한 수단
을 부려 재물을 모다 거부를 이루었다"거
나, 안인수는 "성품이 탐욕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일상 간계를 써서 타인의 재산을 수
중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당시인들이 안억
핍(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반면, 안중근은 "조부가 자산가로서 도내
에 이름이 높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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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배경]
그러나 안중근의 가계는 그의 5대조 이전으
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소 불확실하다. 순
흥 안씨 족보에 의하면 17대조 안려(安廬)
는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으로서 건원릉 참
봉을 지냈다. 14대조 안효신은 어린 나이
에 문단에서 명성을 날릴 정도로 문장에 능
했으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황해남도 해주
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했다. 이로써 안효
신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의 해주 입향시조
가 되었다. 이후 안중근의 선조들은 안중근
의 14대조 안숙관과 13대조 안류가 통정대
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을 뿐이며, 안중근
의 5대조 안기옥(安起玉)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불확실한 내용이 여기에서 나타난
다. 1845년에 순흥안씨 족보소가 간행한 순
흥안씨 족보에는 안중근의 17대조 안려에
게 진사, 후사없음(進士無后)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년 안최량(安最良)이 편찬한
순흥안씨 족보에는 안려에 대해 후사가 나
와 있지 않고, 진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
에 반해 1910년대 이후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려의 장조카로 강진현령을 지낸 안효충
(安孝忠)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安順福)이
안려의 양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
고 되어 있다. 따라서 안중근의 15대조이
자 해주입향시조인 안효신의 존재는 1918년
에 신문관에서 간행된 순흥안씨족보와 1936
년 간행된 순흥안씨 족보 이후부터 나타나
고 있다. 또한 1800년대 중, 후반에 간행
된 족보에는 안려의 형인 안의(安毅)의 후
손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년
대에 간행된 족보에는 안의의 후손으로 안
효충 외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
복, 안성복, 안준복 등이 새로이 나오고 있
다. 이로 미루어 해주에 정착한 순흥안씨
참판공파 인사들의 낙향 직전의 세계와 해
주 입향 이후부터 한말까지의 신분 문제는
불명확한 사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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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에 안중근의 전기와 비문을 집필
한 이들은 안중근 가문의 신분을 한결같이
향리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안중
근 의거 이후[6] 에 지은 간략한 전기에서
각각 "그 선조는 본래 순흥 사람으로 해주
에 살면서 대대로 주리를 지냈다. 안태훈
대에 이르러 글을 읽어 진사가 되었다"거
나 "그의 선조는 순흥인데 중도에 해주로
이사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 또한
심산 김창숙은 1961년에 지은 '안중근의사
숭모비문'에서 "그 선조의 세가는 서한으
해주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부친 한태훈의
대에 이르러 독서하여 국자생이 되었
다."고 하였다.

안중근의 5대조 안기옥의 대에 이르러 무과
에 급제, 관직 진출을 꾀하였다. 이는 향리
직을 장기간 세습하면서 사회경제적 능력
을 갖추어 나간 이서층이 과거를 통해 양반
층으로 편입되려는 신분상승운동을 벌였음
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
지풍(安知豊, 안중근의 고조부), 안유풍(安
有豊), 안순풍(安順豊) 등 네 아들을 두었
는데, 이들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
처럼 향리 가문의 4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
제한 것은 가문의 위상을 높인 쾌거였다.

또한 안지풍의 장남 안정록(安定錄, 안중근
의 증조부),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
亨), 안유풍의 손자 안인환(安仁煥), 안순
풍의 아들 안신형(安信亨) 등이 모두 무과
에 급제하였고 안유풍의 손자 안인권(安仁
權)이 절충장군의 품계를 받았다. 안인필
(安仁弼)은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의 정6
품 군직인 사과가 되었고, 안정록의 아들이
자 안중근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통훈대부
와 진해현감을 지냈다. 기록에는 안인수의
아들 안태건(安泰健)은 고종(高宗) 28년
(1891) 신묘(辛卯)년에 24세의 나이로 증광
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으로 등과됨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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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활동]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
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
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
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 정객의 식객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이 척신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
수는 영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일가
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
로 피신했다. 안중근도 가솔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훈장을 초빙하여 공부를 했
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
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안중근 자신은 《안
응칠역사》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조부모
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8~9년 동
안 한문을 익혔으며,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

[소년기]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정평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
은 산채에 개인적으로 사병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
나 각지에서 동학도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하자 안태훈은 자발적으로 창의를 하여 동
학 농민군을 토벌하여 승리를 거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
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작전을
펼치자 소년 안중근 역시 동학군 토벌에 참
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하는데 참여했다.

김구가 동학군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김구를 보호한 적이 있으며 그
시기에 안중근도 그와 안면이 있었으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
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
문에, 안중근 자신도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
년 평양에서 석탄 장사를 하다가,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을사
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이를 저항해 독
립운동에 투신했다. 이어 삼흥학교를 세우
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가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도마, 다묵)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
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 뒤 잠시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
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
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
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청인 난타 사건]
1904년 아버지 안태훈과 청나라 의사 사이
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년
4월 20일 안악읍에 사는 청나라 의사 서원
훈(舒元勛)과 시비가 있었다. 아버지 안태
훈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친우 이용일(李龍
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양측이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측이 어떤 실
수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
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
은 서원훈에게 화해를 청하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이 4월 29일
이용일 등 10여 명과 함께 무기를 들고 야
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무수히
난타하여 거동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대
한 반발로 1904년 5월 2일 청국인 7~8명이
이용일의 집에 난입하여 그를 마구 구타하
고 잡아가려고 했다.

한중 양국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삼화
항의 청나라 영사가 한국 정부에 공식 문제
제기를 했다. 이에 따라 삼화항 재판소 감
리가 순검을 보내 안중근과 이용일을 체포
하여 압송토록 했다. 그런데 중도에 나타
난 괴한들이 순검들을 난타하고 안중근과
이용일을 구하여 사라졌다. 이때 순검 한
명은 안면에 총을 맞아 중태에 빠졌다. 체
포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7월 10일 전후에
안중근과 이창순은 각기 외부에 청원서를
올려 자신들의 부친이 억울하게 청국인에
게 당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외
무부는 다시 자체 조사를 거친 끝에 안중근
과 이용일의 죄상이 중하다는 점을 인정하
기에 이르렀다. 이에 지방 정부는 안중근
등의 체포를 명하였고, 7월 22일 황해도관
찰사 이용필(李容弼)은 안중근과 이용일이
기미를 알고 미리 도주하여 체포하지 못했
다는 보고서를 외무부대신에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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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운동과 의병 운동]
[계몽 운동과 국채보상운동]
1905년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외교권을 일
본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
운동을 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상하이
(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
절당하여 실망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부
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
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1906년 3월에 평안남
도 진남포로 이사했다. 이사한 곳에서 생계
를 위해 한때 석탄상회를 경영하였으나 사
업이 되지 않았으며, 교육을 통한 깨달음
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석탄회사를 정리하
고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운
동을 시작했다. 그 뒤 황해남도의 천주교
계열의 학교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였으며 안중근 자신도 교사로 아이들
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대구의 유생 서상일 등의 주도
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됐고, 열심히 활동하여 인정을 받으
면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임명
되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 역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다.

[의병 활동]
1907년(융희 1년) 황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강제 퇴위를
당한 뒤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노선을 바꾸어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
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 매국노 척결을 주장하던
그는 의병대를 찾아다녔다. 그 뒤 황해도
의병대의 한사람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신이 직접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
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계동
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하고, 곧 계동청
년회의 임시사찰(臨時査察)에 선출되었다.

1908년(융희 2)에는 소수의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흥군으로 2차례 진입하여 일본
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승리하였으나, 석방
한 포로에 의해 위치가 노출되어 회령군 인
근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대가 와해
되었다. 안중근은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구
사일생으로 귀환하였으나 이 패배로 인해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1908년 6월 안중근은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
지구군사령관으로 출정하여 함경북도 경흥
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본격적인 국
내 진공작전을 계획,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
흥군과 신아산 부근의 야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
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
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의병대원
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혼자의 뜻
으로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
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
고 한다. 이 일로 의병의 신임을 잃은 그
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새로이 의병
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곧 해체되었다.

1909년(융희 3)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
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
다. 안중근은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
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의 수인
(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순국]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
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
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
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
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
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
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
(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
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
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
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
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
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
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
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
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열차 안
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
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
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
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
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만주 철도의 이사를 맞추었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라고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한국 만세라
는 뜻이었다.

저격 30분만인 오전 10시경, 이토 히로부미
는 피격당한 직후 열차로 옮겨졌다. 죽기
직전에 브랜디(옛날에는 각성제로 종종 사
용) 한 모금 마시고 "범인은 조선인인
가?"하고 물었으며, 주변에서 그렇다고 대
답하자 "바보 같은..."이라고 뇌까리며 죽
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주변인물들의 증언에 의한 것이지만 조작이
라는 주장이 있다. 총을 세 발이나 맞고 그
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동행한 의사의 증언으로는 분명히 열
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책에서는 죽을 당시에 "난 틀렸
다... 다른 부상자는?"이란 말을 남기고 죽
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정확하
지 않은 감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었고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일본
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
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
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
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
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
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
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편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安秉
瓚)이 안중근을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
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 15가지.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
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안중근의 체포와 수감 소식이 접해지자 당
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
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 기타
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
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동양 평화론의 저술을 하였으
나 끝내 완성시키지 못했다.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
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
를 공개하였다.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뤼순 관
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
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
을 전함.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
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
의를 제기함.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
서 받음.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
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
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
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
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
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
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2세.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
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
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
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
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
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
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다롄(大連)시 뤼순
(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
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유언]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
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
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
다. 이후 1945년 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
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
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
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분의 독
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
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
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
근 의사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
을 보여준다. 하지만 1949년 김구 역시 안
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
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
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
치 또한 찾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
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
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
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
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
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이 때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어머니의
편지는 이렇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
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
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
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
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
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
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
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
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나라가 위기일
때 모든 아내와 어머니들이 저랬다. 사를
버리고 공을 앞세웠던 당시 유행가 가사 가
운데 "님께서 가신 길이 영광의 길이었기
에 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소…"
전쟁터로 가는 아들과 남편 입영부두나 역
에서 차마 울지 않고 눈물을 감추었다. 그
들이 맘 약해질 것 걱정해서 그리고 그들
이 떠난 후 돌아서 울었다. 이 어머니와 아
내들의 조국사랑이 오늘 이 나라가 있게 했다.

[사후]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
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
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
수 묘역에 묻혔다. 그러나 일제는 뒤에 안
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 주지 않아 그
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
고 있다. 그러나 2011년 출범한 안중근 유
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는 최근 안
중근이 순국한 뤼순 감옥에서 동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뤼순감옥구지묘지를 안중
근의 유해 매장지로 추정하며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을 정부에 의뢰하고 있는 상황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뒤에 대한민국장으로 개정)이 추서되었다.

[저서 및 유묵]
[저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東洋平和
論)》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는 일본이 3
국 간섭으로 인해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
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
고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3국 청년으로 구성
된 군단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
의 언어를 배우게 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또한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라는 제
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이 자서전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일본어 번역본
과 한문 등사본이 전해진다. 이 자서전을
저본으로 하여 1970년에 출판된 《안중근
자서전》이 있다.

[시]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丈
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
순도 〈거의가(擧義歌)〉로 답하였다. 〈장
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한글
시가 함께 전해진다. 안중근은 〈장부가(丈
夫歌)〉에서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국가를
멸망에 이르게 한 일본인 출신 이등박문
을 '쥐새끼' 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
을 드러내었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쳐
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時造英雄兮,英雄造
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
으리로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
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
긔가 뜨겁도다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
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豈度至此兮,事勢
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萬歲萬
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
로다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유묵]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
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의사유
묵(安重根義士遺墨)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
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
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
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
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연보]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에
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 사이에서 출생.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 김구와의
첫 만남.
1896년: 부친 안태훈이 천주교에 입교.
1897년: 19세에 천주교에 입교.
1898년~ 1904년: 천주교 전교 사업. 천주교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불발.
1905년: 부친 안태훈 사망
1906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운영하였으
며 서북학회에 가입.
1907년: 석탄회사 삼합을 설립하였으나, 같
은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08년: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추진.
1909년: 단지동맹 결성(동지 11명).
1909년 10월 26일: 거사
1910년 2월 14일: 일본제국 재판부는 안중
근에게 사형을 선고. (당시 재판관할권은
일본에 없었음.)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순국.

[사상과 신념]
[동양평화론]
《동양 평화론》의 서문에서 안 의사는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
해지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 황인종에게 욕을 당할 수
는 없다는 의론이 한국·청국 두 나라 사람
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위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
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
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
火之勢矣. 然則…)”라고 서술하였다.

서문의 설명처럼 안중근은 옥중에서 집필
한 《동양 평화론》에서 하얼빈 의거를 동
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고 동양평
화론이란 한·중·일 3국이 각각 독립을 유
지하면서 서로 상호 부조하여 서세동점(西
勢東漸)의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대응하
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론까지 제시
하고 있었다.

내용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바라는‘동양
평화(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침략해 일
본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반대로 ‘일본
식 동양평화’를 주창하는 이토에게는 안중
근은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다.

이러한 이토를 제거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
부미 저격 사건을 일으켰고 이후 5개월간
의 수감생활과 공판과정에서 안중근은 이토
의 사살이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
징이었음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미완성의 옥중 저서가 된 《동양 평화론》
은 ‘하얼빈 의거’를 ‘동양평화의전(東洋
平和義戰)’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형장에
서의 최후 발언도 “나의 이 거사는 동양평
화를 위하여 결행한 것이므로 임석 제원들
도 앞으로 한·일 화합에 힘써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

[동양평화론에 대한 평가]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 시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중국인들은 “안중근 의사가 추
구한 동양평화의 정신을 오늘 중국인도 배
웠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안중근 의사
의 《동양 평화론》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
아도 선구적인 사상”이라며 “한국에서 안
중근의 평화사상을 왜 국제화하지 못하는
가”라고 묻는다. 이들은 안중근이 뤼순 감
옥에서 최후진술하기 위하여 1910년 2월 12
일 관동도독부 법정 제5차 공판에서 당당
히 밝힌 것도 동양평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20세기 넘어 서
구 유럽 등에서 구상한 평화보다 70년이 앞
서는 사상이었다는 것이다.

안중근이 지향하는 평화는 한·중·일 3국
이 각각 독립을 유지하면서 서로 상부상조
하는 길을 찾았고, 이를 통해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고자 하는 서구 제국주의를
막을 때 동양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
던 것이고 더 나아가 일본이 침략적 속성
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대동아공영권 논
리의 함정과 모순을 이미 꿰뚫어보았기에
이에 대한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당시 동아
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27년부터 중
화민국 장쉐량의 지시로 동북 각지의 36개
모범소학교에서 수업 전에 안중근의 노래
를 합창하였으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엔
저우언라이와 궈모뤄 등이 무한, 장사 등지
에서 화극 《안중근》을 연출해 반일 투쟁
을 고무 격려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토
를 사살한 조선인을 적대하는 감정이 가속
되었으며, 조선의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였다. 이토를 사살한 것이 한일병합
조약을 가속화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1909
년 4월 이토와 고무라 외무대신은 이미 한
일병합조약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이토는 도쿄에서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의도
를 드러낸 연설을 한 바 있어, 일본 정부
내에서 한일병합조약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
었다.

[영향]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들에게 사상적으
로 영향을 주었고 이승만과 김구는 광복 이
후 매년 그를 기리고 그의 동상을 찾아가
헌화, 참배하였다. 윤치호를 포함하여 일부
는 역시 그의 사상에 대체적으로 공감하
나, 하얼빈에서의 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
로 한일병합조약을 촉진시킨 것이 아닌가하
는 회의적인 생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
린다.

[평가]
[긍정적 평가]
혁명가 김산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학교
기숙사에서 우리는 수많은 수행원들을 데리
고 기차에서 내려온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
사가 하얼빈 역에서 어떤 식으로 저격했는
가 하는 이야기와 한국독립을 위해 대담무
쌍한 행동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많고 많
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
의 《아리랑》은 수록하고 있다.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
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 바오로라고 부른
다. 즉, 안중근을 한국 교회에서는 모세의
애국심과 바오로의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평가한 것이다.
안중근의 일본인 교도관 다카오 미조부치
는 그를 동아시아의 의인이라고 평하였다.
고려대학교 세종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안중근을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평하였다.
미래사목연구소 황종률 박사는 이토 히로부
미의 암살을 “정의의 하느님”의 뜻에 협
력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평가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20세기
초 우리나라 반일애국운동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애국열사”로 평가하며 북조선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에 저격장면, 계기 등을 자세
히 소개하였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제15
차 남북 장관급 회담(2005년6월21~24일, 서
울)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사업 공동
추진’에 합의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회에서 안중근 의사
국제평화상을 제정하였다.
김삼웅은 안중근의 동양평화 제안을 유럽공
동체(EU)와 같은 것으로 평가한다. 당시 안
중근의 제안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이 동
양평화회의를 결성하며, 여순을 중립화하
고, 관련 3국으로 운영되는 동양평화회의본
부를 여순에 설치한다. 또한 평화지역 창
설, 공동개발은행과 공동화폐 발행 등이 포
함되어 있다.
안중근은 또한 문명개화를 통해 실력을 닦
는 것이 한국 독립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
한 문명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의 보호정치
가 한국의 문명개화가 아닌 국권침탈에 불
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바로 무장투쟁
의 선두에 나선 행동가라고 서영희 한국산
업기술대 교수는 평했다.
안중근이 자신을 존경했던 일본인 간수 지
바에게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
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군인
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귀는 현재
대한민국 국군의 표어 중 하나가 되었다.
청산리 대첩의 주역 김좌진은 안중근의 의
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김경천은 자신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에
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이는 안응칠씨
라 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에게도 사람이
있구나!"라고 평가했다.

[가족 관계
조카 안춘생할아버지 : 안인수(安益壽), 진
해 현감 역임 아버지 : 안태훈(安泰勳), 진

어머니 : 조마리아(趙마리아) 여동생 : 안
성녀 누시아(1881~1954), 독립운동가, 부
산 천주교 묘지에 안장.
남동생 : 안정근(安定根), 독립운동가,
1949년 상하이에서 사망. 조카 : 안진생,
미얀마 대사 역임

남동생 : 안공근(安恭根), 독립운동가,
1939년 사망 추정. 조카 : 안우생(安偶
生), 묘는 북조선의 애국열사릉에 있다.

부인 : 김아려(金亞麗) 장남 : 안문생(安
文生), 일명 안분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
가 병으로 사망.
차남 : 안준생(安俊生), 1952년 11월 폐결
핵으로 사망.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
장.
자부 : 정옥녀 손녀 : 안준생의 딸 안연호
(1938년에 태어나서)(2011년 2월6일 사
망), 안선호(2003년 사망)가 있다.
손자 : 유일한 손자로, 안웅호(雄浩)는 안
준생의 아들이다.

장녀: 안현생(1902 - 1960), 1953년 4월 ~
1956년 3월 효성여자대학교 (현 대구가톨릭
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함. 그녀의 남
편은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서 활동
했었다고 한다. 안중근 순국 100주기가 되
는 2010년 3월 26일, 그녀가 쓴 수기가 발
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사위 : 황일청 외손녀 : 황은주, 황은실

조카 : 안춘생,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육
군 중장, 초대 육사 교장, 국회의원 역임

4촌 : 안명근(安明根) 독립운동가
4촌 : 안홍근,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32]
4촌 : 안봉근(安奉根) 증손자 : 토니안(안
도영)

[기타]
[김구와의 인연]
백범 김구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후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
동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
하였으며, 김구는 그가 총으로 사냥을 잘하
며 남자다웠다고 평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
부미 암살 이후 그의 부인 등의 유족을 우
덕순, 김구 등이 돌보았으며 안중근의 동생
인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김구의 도움을 많
이 받았다. 안정근은 김구와 직접 연결되
지 않고 안창호를 따랐지만, 안공근은 김구
의 부하가 되어 한인애국단과 한국독립당특
무대를 조직하는데 동참한다.

[기념 사업]
1958년 -“애국열사 안중근”은 북한에서
창작, 공연되었다.
1963년 -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설립되어 초
대 이사장으로 윤치영이 취임하였다.
1974년 - 안중근 기념 동상이 작가 김경승
에 의해 제작되어 남산 구 조선신궁 자리
에 설치되었다.
1979년 -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가 북
조선에서 개봉되었다. 감독은 엄길선 조선
예술영화촬영소 총장이다.
1979년 - 명동성당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기념 대미사가 집전되었다.
1986년 -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뤼순 감옥을 방문하
여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요청하였다.
1990년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안
중근 (도마) 의사 추모 자료집-서거 80주년
을 맞이하여》를 발간하였다.
1999년 - 서울시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안중
근 의사 기념공원 조성 제안을 부결하였다.
2000년 - 안중근 의사 유골 발굴위원회가
발족되었다.
2000년 - 하얼빈 역에서 남한과 북조선의
공동 기념식이 열렸다.
2001년 - 오페라 “아시아의 횃불 안중근”
이 독일에서 초연되었다.
2002년 - 오페라 “안중근 손가락”이 한국
에서 공연되었다.
2002년 - 안중근 의사 국제 평화상이 제정
되었다.
2003년 -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사진의 퇴
진과 개혁을 촉구하는 100인 선언이 발표되
었다.
2004년 - 안중근의 삶을 그린 《도마 안중
근》이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연출가는 서
세원이다.
2006년 - 가짜 안중근 휘호가 8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로서는 최
초로 2008년 건조된 한국 해군의 1800톤급
인 손원일급 잠수함 대형 3번함의 이름이
안중근함으로 명명되었다. 안중근 잠수함
은 2008년 6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진수되
었다. 안중근함 진수식에는 김태영 대한민
국 합참의장과 정옥근 해군참모총장 등 군
관계자와 현대중공업 임직원, 안중근 의사
숭모회 관계자 등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
석했다.

2009년 -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
하여 6월부터 국내 공연을 시작으로 11월까
지 하얼빈, 일본 등지에서 최수종이 안중
근 역을 맡은 연극 '대한국인 안중근'의 막
이 올랐다. 9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
빈 시에 세워졌다가 대한민국에 반입된 안
중근 의사의 동상이 대한민국 국회에 임시
전시됐다.
10월 9일~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
에서 안중근 의사의 1909년 10월의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최초로 국제 장기 기전
인 제1회 세계인 장기 대회가 개최 되었다.
10월 26일 -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지컬 '영웅'이 초연되었다. (제작사: 에
이콤 / 연출: 윤호진 / 공연장 : LG아트센
터)

2010년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안중근 의
사 추모행사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3월 26일 - 이명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
의 유해를 모셔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
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 서울 서울광장에서 안중근 의
사 순국 100주년 추념식이 정부 주관으로
열렸다.
7월 27일 배우 송일국이 1인 2역을 맡은 안
중근의 삶과 처음으로 그의 아들 안준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나는 너다' (2010년 7
월 27일 ~ 2010년 8월 22일)가 국립극장에
서 초연되었다.
9월 30일 - 국방부와 조선일보가 안 의사
순국 100주년과 조선일보 창간 90주년을 맞
아 공동으로 제정한 위국헌신상이 11명에
게 처음 수여되었다.
9월 30일 - 러시아 정부가 안중근과 관련
된 외교 문서를 대한민국 정부에 처음 전달
하였다.
12월 4일 안중근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뮤
지컬 '영웅'이 1년 만에 다시 막이 오를 예
정이다. (제작사: 에이콤 / 연출: 윤호
진 / 공연장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안중근 사형 이후의 축하연 기록을 찾아냈
다.

2011년 -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및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안중근뼈
대찾기사업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
수정 주교)가 안중근을 ‘근현대 신앙의 증
인에 대한 시복조사’ 대상으로 거론하면
서 안중근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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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n Jung-Geun 안중근 安重根

[Born] 16 July 1879
Haeju, Joseon
(now Haeju, Hwanghae, North Korea)
[Died] 26 March 1910 (aged 30)
Lushunkou (Ryojun), Kwantung Leased
Territory, Empire of Japan
[Nationality] Korean
[Religion] Roman Catholic

Ahn Jung-Geun or An Jung-geun
(September 2, 1879 – March 26,
1910; Baptismal name: Thomas) was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nationalist, and pan-Asianist.

On October 26, 1909, he assassinated
Ito Hirobumi, a four-time Prime
Minister of Japan and former Resident-
General of Korea, following the signing
of the Eulsa Treaty, with Korea on the
verge of annexation by Japan. Ahn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of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in 1962 by the
Korean Government, the most prestigious
civil decor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for his efforts for Korean
independence.

[Biography]
[Early accounts]
Ahn was born on September 2, 1879, in
Haeju, Hwanghae-do, the first son of
Ahn Tae-Hun (안태훈; 安泰勳) and Baek
Cheon-Jo (백천조; 白川趙), of the
family of the Sunheung Ahn (순흥안씨; 順
興安氏) lineage. His childhood name was
Ahn Eung-chil (안응칠; 安應七; [anɯ
ŋtɕʰil]). As a boy, he
learned Chinese literature and Western
sciences, but was more interested in
martial arts and marksmanship. Kim Gu
(김구; 金九), future leader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who had
taken refuge in Ahn Tae-Hun's house at
the time, wrote that young Ahn Jung-
Geun was an excellent marksman, liked
to read books, and had strong charisma.

At the age of 25, he started a coal
business, but devoted himself to
education of Korean people after the
Eulsa Treaty by establishing private
schools in northwestern regions of
Korea. In 1907 he exiled himself to
Vladivostok to join in with the armed
resistance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 rulers. He was appointed a
lieutenant general of an armed Korean
resistance group and led several
attacks against Japanese forces before
his eventual defeat.

[Religion]
At the age of 16, Ahn entered the
Catholic Church with his father, where
he received his baptismal name "Thomas"
(多默; 도마), and learned French. While
fleeing from the Japanese, Ahn took
refuge with a French priest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named Wilhelm
(Korean name, Hong Seok-ku; 홍석구; 洪錫
九) who baptized and hid him in his
church for several months. The priest
encouraged Ahn to read the Bible and
had a series of discussions with him.
He maintained his belief in Catholicism
until his death, going to the point of
even asking his son to become a priest
in his last letter to his wife.

[Assassination of Ito Hirobumi]
In 1909, Ahn passed the Japanese guards
at the Harbin Railway Station.

Ito Hirobumi had come back from
negotiating with the Russian
representative on the train. Ahn shot
Ito three times with an FN M1900 pistol
on the railway platform. He also shot
Kawagami Toshihiko (川上俊彦), the
Japanese Consul General, Morita Jiro (森
泰二郞), a Secretary of Imperial
Household Agency, and Tanaka Seitaro (田
中淸太郞), an executive of South
Manchuria Railway, who were seriously
injured. After the shooting, Ahn yelled
out for Korean independence in Russian,
stating "Корея! Ура!", and
waving the Korean flag.

Afterwards, Ahn was arrested by Russian
guards who held him for two days before
turning him over to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When he heard the news
that Ito had died, he made the sign of
the cross in gratitude. Ahn was quoted
as saying, "I have ventured to commit a
serious crime, offering my life for my
country. This is the behavior of a
noble-minded patriot." Despite the
orders from the Bishop of Korea not to
administer the Sacraments to Ahn, Fr.
Wilhelm disobeyed and went to Ahn to
give the Last Sacraments. Ahn insisted
that the captors call him by his
baptismal name, Thomas.

In the court, Ahn insisted that he be
treated as a prisoner of war, as a
lieutenant general of the Korean
resistance army, instead of a criminal,
and listed 15 crimes Ito had committed
which convinced him to kill Ito.

"15 reason why Ito Hirobumi should be
killed.

1. Assassinating the Korean Empress
Myeongseong
2. Dethroning the Emperor Gojong
3. Forcing 14 unequal treaties on Korea.
4. Massacring innocent Koreans
5. Usurping the authority of the Korean
government by force
6. Plundering Korean railroads, mines,
forests, and rivers
7. Forcing the use of Japanese banknotes
8. Disbanding the Korean armed forces
9. Obstructing the education of Koreans
10. Banning Koreans from studying abroad
11. Confiscating and burning Korean
textbooks
12. Spreading a rumor around the world
that Koreans wanted Japanese protection
13. Deceiving the Japanese Emperor by
saying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was peaceful when in
truth it was full of hostility and
conflicts
14. Breaking the peace of Asia
15. Assassinating the Emperor Komei.

I, as a lieutenant general of the
Korean resistance army, killed the
criminal Ito Hirobumi because he
disturbed the peace of the Orient and
estranged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Japan. I hoped that if Korea
and Japan be friendlier and are ruled
peacefully, they would be a model all
throughout the five continents. I did
not kill Ito misunderstanding his
intentions."

[Imprisonment and death]
Ahn's Japanese captors showed sympathy
to him. He recorded in his
autobiography that the public
prosecutor, Mizobuchi Takao,
exclaimed "From what you have told me,
it is clear that you are a righteous
man of East Asia. I can't believe a
sentence of death will be imposed on a
righteous man. There's nothing to worry
about." He was also given New Year's
delicacies and his calligraphy was
highly admired and requested. After six
trials, Ahn was sentenced to death by
the Japanese colonial court in Ryojun
(Port Arthur). Ahn was angered at the
sentence, though he expected it. He had
hoped to be viewed as a prisoner of war
instead of an assassin. On the same day
of sentencing at two o'clock in the
afternoon, his two brothers Jeong-Geun
and Gong-Geun met with him to deliver
their mother's message, "Your death is
for the sake of your country, and don't
ask for your life cowardly. Your brave
death for justice is a final filial
regards to your mother."

Judge Hirashi, who presided over Ahn's
trial, had promised Ahn that a stay of
execution for at least a few months
would be granted, but Tokyo ordered
prompt action. Prior to his execution,
Ahn made two final requests; that the
wardens help him finish his essay, "On
Peace in East Asia", and for a set of
white silk Korean clothes to die in.
The warden was able to grant the second
request and resigned shortly
afterwards. Ahn requested to be
executed as a prisoner of war, by
firing squad. But instead it was
ordered that he should be hanged as a
common criminal. The execution took
place in Ryojun, on March 26, 1910. His
grave in Harbin hasn't been found.

[Views]
There has been an argument that Ito's
death resulted in the acceleration of
the final stage of the colonization
process, but the claim has been long
disputed by some.

According to Donald Keene, author
of "Emperor of Japan: Meiji and His
World, 1852–1912", Ahn Jung-Geun
was an admirer of Emperor Meiji of
Japan. One of the 15 'charges' Ahn
leveled against Ito was that he had
deceived the Emperor of Japan, whom Ahn
felt desired peace in East Asia and
Korean independence. Ahn requested that
Meiji be informed of his reasons for
his assassination of Ito in the hopes
that if Meiji understood his reasons,
the emperor would realize how mistaken
Ito's policies were and would rejoice.
Ahn also felt sure that most Japanese
felt similar hatred for Ito, an opinion
he formed from talking with Japanese
prisoners in Korea. While Ahn was
staying in the prison and on the trial,
many Japanese prison guards, lawyers
and even prosecutors were inspired by
Ahn's great spirit, righteousness, and
humanity.

[Legacy]
The assassination of Ito by Ahn was
praised by Koreans and many Chinese as
well, who were struggling against
Japanese invasion at the time. Well-
known Chinese political leaders such as
Yuan Shikai, Sun Yat-sen, and Liang
Qichao wrote poems acclaiming An.

In the 2010 Ahn Jung-Geun Symposium in
Korea, Wada Haruki (和田春樹), an
activist who once worked at Tokyo
University, evaluated Ahn by quoting
Ito Yukio (伊藤之雄), a fellow history
scholar in Kyoto University. In his
text published in 2009, Ito Yukio
claims that the reign by Ito Hirobumi
resulted in strong resistance from
Koreans as it was considered the first
step for annexation of Korea due to the
cultural differences, and that Ahn is
not to be blamed even if he
assassinated Ito without understanding
Ito's ideology (2009, Ito).

On March 26, 2010, a nationwide
centenary tribute to Ahn was held in
South Korea, including a ceremony led
by the Prime Minister Chung Un-Chan and
tribute concerts.

[Ancestry]
Ahn's family produced many other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Ahn's cousin An
Myeong-Geun (안명근; 安明根) attempted
to assassinate Terauchi Masatake, the
first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조선총독; 朝鮮總督) who executed
the Japan-Korea Annexation Treaty in
1910. He failed, however, and was
imprisoned for 15 years; he died in
1926. Ahn's brothers Ahn Jeong-Geun (안
정근; 安定根) and Ahn Gong-Geun (안공
근; 安恭根), as well as Ahn's cousin
Ahn Gyeong-Heun (안경근; 安敬根) and
nephew Ahn Woo-Saeng (안우생; 安偶生),
joine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China, which led by Kim Gu, and fought
against Japan. Ahn Chun-Saeng (안춘생;
安春生), another nephew of Ahn's,
joined the National Revolutionary Army
of China, participated in battles
against Japanese forces at Shanghai,
and joined the Korean Liberation Army
in 1940. Later, he became a lieutenant
general of the Republic of Korea Army
and a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of South Korea.

[Pan-Asianism]
Ahn strongly believed in the union of
the three great countries in East Asia,
China, Korea, and Japan in order to
counter and fight off the "White
Peril", namely, the European countries
engaged in colonialism, and restore
peace to East Asia. He followed the
progress of Japan during the Russo-
Japanese War and claimed that he and
his compatriots were delighted at
hearing of the defeat of one of the
agents of the White Peril, but were
disappointed that the war ended before
Russia was totally subjugated.

Ahn felt that with the death of
Itō, Japan and Korea could become
friends because of the many traditions
that they shared. He hoped that this
friendship, along with China, would
become a model for the world to follow.
His thoughts on Pan-Asianism were
stated in his essay, "On Peace in East
Asia" (東洋平和論; 동양평화론) that he
worked on and left unfinished before
his execution. In this work, Ahn
recommends the organization of combined
armed forces and the issue of joint
banknotes among Korea, Japan, and
China. Sasagawa Norikatsu (笹川紀勝), a
Professor of Law at Meiji University,
highly praises Ahn's idea as an
equivalent of the European Union and a
concept that preceded the concept of
United Nations by 10 years.

[Calligraphic works]
Ahn is highly renowned for calligraphy
works. While he was in prison, many
prison guards such as Chiba Toshichi (千
葉十七) who respected him, made
requests to Ahn for calligraphy works.
He left many calligraphy works which
were written in the jail of Lushun
although he hadn't studied calligraphy
formally. He would leave on his
calligraphy works a signature of "大韓國
人" (Great Korean) and a handprint of
his left hand that was missing the last
joint of the ring finger, which he had
cut off with his comrades in 1909 as a
pledge to kill Ito. Some of the works
were designated as Treasure No. 569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972. One of
his famous works is "一日不讀書口中生荊
棘"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Unless one
reads every day, thorns grow in the
mouth), a quote from the Analects of
Confucius.

[Memorial Hall]
Memorial halls for Ahn were erected in
Seoul in 1970 by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d in Harbin by the Chinese
government in 2006.
South Korean President Park Geun-Hye
raised the idea of erecting a monument
for Ahn while meeting with Chinese
President Xi Jinping during a visit to
China in June 2013. Thus another
memorial hall honoring Ahn Jung-Geun
was opened on Sunday, 19 January 2014
in Harbin. The hall, a 200-square meter
room, features photos and memorabilia.

[In popular culture]
The North-Korean film An Jung Gun
Shoots Ito Hirobumi is a dramatized
story of the event. He is commemorated
in the martial art Taekwondo with the
Joon Gun pattern being dedicated to him.

Novelist Bok Geo-il's 1987 novel
Looking for an Epitaph (碑銘 (비명)을 찾
아서) is an alternate history story,
which is set in the 1980s of Korea that
remained a permanent colony of Japan,
as a cascade effect of Ahn's failure to
assassinate Ito. The Korean movie 2009
Lost Memories is very loosely based on
the novel but tells a completely
different story. In the Korean film,
Ahn Jung-Geun is spotted and killed by
Japanese soldiers before he is able to
shoot Ito Hirobumi.

The South-Korean film Thomas An Jung-
geun (도마 안중근) is another
dramatized story of the event. Released
on September 10, 2004, it is directed
by Seo Se-won. Ahn Jung-Geun is played
by actor Yu Oh-seong and Ito Hirobumi
is played by Yoon Joo-sang.

(from naver.com wikipedia.org)


Catholic Church, for Country, in China, Confucius, influence(+)~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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