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G 홍범도 洪範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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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洪範圖,독립운동가,Hong Beom-do,Korea
洪範圖, 의병장, 독립운동가, Hong Beom-do



[출생-사망] 1868년 10월 12일 (음력:8월
27일), 평안남도 평양 - 1943년 10월 25일 (75세)



[관련정보]
네이버[캐스트] -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
끈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위 SNS3 click)



[경력사항]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1920.09 청산리전투 북로군정서 제1연대
대장
1920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1911.05 동의회, 성명회
1910.06 십삼도의군 동의원

[수상내역]
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



[출생] 1868년 10월 12일 (음력 8월 27일)

조선 평안남도 평양 서문안 문열사 부근
(평안남도 양덕군 혹은 평안북도 자성군 설
도 있다.)

[사망] 1943년 10월 25일 (75세)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
SSR 크질오르다

[별칭] 범도(範道), 호는 여천(汝千)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
[부모] 부 홍윤식

홍범도(洪範圖, 1868년 10월 12일 (음력 8
월 27일) ~ 1943년 10월 25일)는 조선 말기
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
동가이자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생애]
평안북도 자성에서 출생하였으며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
꾼, 광산 노동자 등을 전전하다가 1895년경
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
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
였다. 1907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에 자극
을 받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삼수·
갑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만주 간도
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군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간도 국민회
의 대한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국내로 들어
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20년 일본군
이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3일간의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청산리 전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후에 독립군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
단을 조직하여 김좌진과 함께 부총재가 되었다.



1927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으나,
1937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했
고, 그곳에서 집단 농장을 운영하였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향년
76세의 나이로 죽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연표]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
평안북도 자성군에서 출생.
1883년 - 평안감영 입대 나팔수 근무.
1886년 - 어렸을 적에 일찍 부모가 죽자,
여러가지 막노동을 전전. 제지공장에서 일
하던 중, 친일파였던 공장주가 7달동안 품
삯을 주지 않고서는 도리어 먹고 입고 잠
잔 값을 받아야겠다고 하자 공장장을 살해
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감. 총술과 검술은 이
때 산생활에서 익혔다고 함.
1895년 -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홍범도도 강원도 철
령에서 봉기

1896년 - 14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함경남도
로 이동하여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 을미
의병 해산 후 포수로 위장하고 일제의 추적을 피함.
1907년 -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 발
발. 홍범도는 함병도 갑산 신포계 신포수
중심으로 의병 조직. 12월에 삼수 전투에
서 일본군 함흥/북청/갑산 수비대를 궤멸시
키는 등 대소 37회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
었으나 국내에서 무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
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함.
1919년 10월 - 평안북도 강계 만포진을 공
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
여 명을 살상.
1920년 6월 7일 - 봉오동에서 일본군 19사
단 소속 야스가와 소좌 휘하 부대를 격멸
(봉오동 전투)
1920년 10월 - 청산리 대첩 참가. 김좌진
과 공동 작전.



1921년 6월 - 자유시 참변. 러시아 자유시
에서 소련의 해산 명령을 계기로 독립군 조
직간에 분열이 발생하여 동족 상잔. 이후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적군 소속으로 편입되
어 이르쿠츠크로 이동
1922년 - 모스크바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대
회에 참석. 이때 레닌과 조우



1923년 - 연해주 이남 구역 차우돈카에서
농업 콜호스를 조직하여 활동
1927년 - 소련 공산당에 입당
1937년 -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정책에 의
해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자치공화국으로
옮겨져 연금으로 생활
1938년 - 알마아타의 크질 오르다 고려인
극장에서 수위로 근무
1943년 10월 25일 - 향년 76세의 나이에 소
련령 카자흐스탄 자치공화국에서 사망.
1963년 10월 25일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가족 ==
(출처: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여천홍
범도장군 연보)
[부친] 남양홍씨 홍윤식(洪允植)
[부인] 이옥구 (1908년 일제의 고문으로 순
국), 홍양순,홍용환 형제 출생;
이인복(1926년 러시아에서 재혼)

[아들]
장남: 홍양순, 1908년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 홍범도 장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
차남: 홍용환, 일본군에게 고문당한 후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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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연합뉴스)
2021년 8월 15일 광복절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이뤄진다고
청와대가 12일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위해 오는 8월 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한다.

특사단에는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민주당 우원식 의원과 이번에 '국민대표'로 선정된
배우 조진웅 씨가 포함됐다.



조진웅 씨 파견은 영화 '암살'과 '대장 김창수'에
독립투사의 역할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긴 점이 고려됐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광복절인 15일 저녁 한국에 도착하며, 1
6일과 17일 이틀간의 국민 추모 기간을 거쳐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특히 정부는 이번 유해 봉환에 맞춰 홍범도 장군에게
애국심 고취 및 민족 정체성 함양 등의 공로를 인정해
1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홍범도 장군은 1962년 2등급 훈장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됐다.

유해 봉환은 16∼17일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에 맞춰 성사됐다.
홍범도 장군은 현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돼 있다.

문 대통령은 2019년 4월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당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요청했고,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가 협조할 것을 약속해
양국이 실무협의를 진행해 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아
SNS에 올린 글을 통해 "독립군을 기리는 일은 국가의 책무"라며
"코로나19 때문에 늦어졌지만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지난해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이 추진됐으나,
코로나19로 인해 1년가량 연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홍범도 장군은 101년 전인 1920년 최진동 장군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고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 월강추격대와 독립투쟁 최초의 전면전을 벌여
무장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뒀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유해 봉환은 80여년간 이어 온
양국의 우정을 되새기는 기회"라며 "카자흐스탄에 남은
홍범도 장군의 묘 역시 지속적으로 관리되도록
양국이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민족이 독립운동사의 영웅으로 기리고 있는 분인 만큼
최고의 예우를 다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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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유해, 이주 후 100년 만에 고국 품으로

(2021년 08월 15일 20시 59분)

봉오동·청산리 대첩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연해주 이주 후 100년 만이자, 서거한 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실은 군 특별수송기는
대한민국의 방공식별구역, KADIZ로 진입한 뒤,
공군 전투기 6대의 엄호 비행을 받으며 서울공항에 도착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직접 맞이했습니다.



정부는 지난 1921년 연해주 이주 후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홍범도 장군을
최고의 예우로 맞이하기 위해, F-15K와 F-35A 등 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는 전투기종을 모두 투입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6~17일 이틀 동안
온·오프라인 국민 추모 기간을 거쳐 2021년 8월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from ytn.co.kr)

한국.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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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석의 역사극장 VI]

(from https://blog.naver.com/ohyh45/221399562922,
[출처] 임경석의 역사극장Ⅵ-홍범도와 부인 이씨)

독립투사로 남은 ‘나는 홍장군’의 아내

홍범도 귀순 공작에 맞서 싸운 이씨 부인…
일제의 참혹한 고문에 저항하다 비명횡사


한국 주둔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관 야마모토 대좌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폭도’들의 귀순 공작을 강화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군사작전만으로는 그들을 진압하기 어려웠다.
‘폭도’들이 사냥꾼이었기 때문이다.
개마고원의 넓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제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다니던 이들이었다. 사냥꾼 출신 한국인 의병들의
전투력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다.

‘홍범도 폭도 무리’귀순 공작
사령관은 1908년 4월30일 자로 예하 ‘제3순사대’
대장 임재덕(林在德)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출몰하는 ‘홍범도 폭도 무리’를
유인하라는 내용이었다.
“귀관은 순사대를 인솔하고 5월1일 북청을 출발,
갑산 부근에 이르러 적당한 지점에 위치하여
폭도 귀순 권유에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방법도 제시했다.
“홍범도의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서
수시로 사용할 것”을 명시했다.

임재덕과 김원흥(金元興)은 일본군 103명과
한국인 순사보조원 80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이끌고,
갑산군 창평리 산간 마을에 주둔했다. 총기와 탄약을 넉넉히 지녔고,
‘속사포’라는 기관총 공용화기까지 갖춘 막강한 토벌대였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주둔지인 용문동 더뎅이 산골짜기가 지척이었다.
제3순사대장 임재덕은 일진회 간부이기도 했다.
1907년 7월 일진회 간부 송병준이 고종 폐위를 주도한 것과 관련해,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일진회를 타도 대상으로 간주했다.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1개월간 의병에게 처단된
일진회원은 무려 9260명을 헤아렸다.
마치 내전 양상과 같았다. 의병과 일진회는 총을 맞대고 겨누는
적대세력이었다.
또 한 사람 지휘관 김원흥은 대한제국의 고급 장교 출신이었다.
옛 한국군 참령 계급장을 달았던 고위 군사간부로서
북청진위대 대장까지 지냈다.
그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기꺼이 일본군 휘하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통감부 예하 경찰 조직에서 경시 계급을 부여받고
반일 의병운동을 탄압하는 최일선에 서게 됐다.

‘가족을 귀순 권유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끔찍한 짓이었다.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의병 지도자를 전향시키려는 술책이었다.
해방운동의 투사를 정신적·정치적으로 파멸시키려는 행위였다.
홍범도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함경남도 북청군 인필골,
깊은 산중 마을이었다. 처가 동네였다.
늙은 장인 장모와 함께, 아내와 두 아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 마을을 급습했다.

그리하여 홍범도의 아내와 17살 맏아들 홍양순을
토벌대 주둔지로 압송해 왔다. 홍범도의 귀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질이었다. 홍범도여, 가족의 안위가
걱정된다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이와 같이 위협하는 데
쓸모 있는, 인질들이었다.
홍범도의 아내 이씨 부인은 거센 강압을 받았다.
산중에 웅거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임재덕 순사대장은 아예 문안까지 일러줬다.
“일본 천황에게 귀순하면, 당신에게 공작 작위를 하사한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에게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자식들도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쓰라고 했다. 공작은 일본제국의 귀족 시스템 속에서
1등급에 해당하는 작위였다. 최상층 귀족이었다.
망국 이후 일본 귀족으로 편입된 조선인 고관대작 중에서
어느 누구도 공작 작위까지 오르지 못했다. 회유에다 협박도 덧붙였다.
임재덕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너희 모자를 어육 내겠다고 위협했다.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서
이럴 때는 차라리 글을 쓸 줄 모른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씨 부인이 글을 깨쳤다는 사실을 저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응할까, 거절할까. 두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쩌랴.
고초를 각오해야만 했다. 이씨 부인은 결심했다.
거절의 뜻을 단호히 표명했다.
그날 아내가 입에 담았던 말을 홍범도는 누군가에게서
전해들었던 것 같다. 평생토록 그 말을 잊지 않았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이렇게 말했노라고, 노년의 홍범도는 또박또박 기억해냈다.
이씨 부인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고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만적인 폭행이 쏟아졌다. 발가락 사이에 불붙인 심지를
끼워놓는 등, 참을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됐다.
거듭되는 악행은 이씨 부인을 반죽음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한 회상기에 따르면,
그때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고 한다.
처참했다. 그녀는 벙어리가 된 채 갑산 읍내로 이송돼 옥에 갇혔다.
하지만 머잖아 고문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향년을 정확히 댈 수는 없지만,
아마 30대 후반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일부 학자는 이씨 부인의 이름이 옥녀였다고 전한다.
북간도 조선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라 하니
전혀 불신할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증빙이 발견되기까지는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씨 부인이 홍범도와 부부가 된 것은 기이한 인연 덕분이었다.
처녀 때 그녀는 비구니였다. 동기는 뚜렷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찍부터 북청 산골의 친정집을 떠나 금강산 깊은 산속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에서 승려의 길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24살 홍범도도 승려였다.
금강산 유명한 사찰 신계사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 있었다.
평양 주둔 조선군 친군서영 제1대대 군인 출신으로,
제지 수공업자로 일하던 그는 산중 사찰에서 은신 중이었다.
부당한 대우와 체불임금에 항의해 공장주를 죽인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금강산 깊은 산속에서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어떤 가슴 설레는 과정을 거쳐 연인이 됐는지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머잖아 젊은 여승은 임신했음을 알게 됐다.
바로 큰아들 홍양순을 잉태한 것이다.
두 사람은 승복을 벗고 하산하기로 했다. 가정을 이루기로 합의한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이 정착한 곳은 여인의 친정이 있는
함경남도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 인필골 마을이었다.
북청에서 갑산 쪽으로 넘어가는 주요 길목인
후치령 고개 바로 아래였다.
그곳에서 부부는 짧으나마 단란한 가정생활을 맛보았다.
아들 둘을 얻었다. 큰아들 양순과 작은아들 용환이다.

40살에 아내를 잃은 홍범도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새 아내를 얻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와 성화에 힘입어
새 아내 이인복을 맞아들인 것은 20년이 지나 노년기의 일이었다.
홍범도의 아들, 소년 의병 홍양순 이씨 부인의 협력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물러설 인간들이 아니었다.
토벌대는 가짜 편지를 만들어냈다. 이씨 부인이 남편에게
직접 쓴 글인 듯 꾸민 편지였다. 그 편지를 몸에 지닌 채
심부름꾼이 의병부대 주둔지 용문동 더뎅이로 파견됐다.
하지만 산속으로 올라간 사자들은 돌아올 줄 몰랐다.
이틀 동안 여덟 차례나 사람을 들여보냈는데,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토벌대 집행부는 홍범도의 맏아들 홍양순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홉 번째 사자였다.
귀순을 권유하는 가짜 편지를 지니게 한 채 산속으로 올려 보냈다.
홍양순은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의병 지휘부로 쓰는 집의 문 앞에 섰다. 홍범도는 격분했다.
아버지를 망치는 일에 아들이 가담하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놈아! 네가 전 달에는 내 자식이었지마는,
네가 일본 감옥에 서너 달 갇혀 있더니,
그놈들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놈이 됐구나.
너부터 쏘아 죽여야겠다!”
홍범도는 방아쇠를 당겼다. 비명 소리가 났다.
부관이 급히 뛰어나갔다. 천만다행이었다.
총알은 귓바퀴를 맞히고 지나갔다. 한쪽 귀가 떨어져나갔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백발백중의 명사수 아니었던가. 500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그만 동전을 맞히는 귀신같은 사격술을 익힌 홍범도였다.
격발 순간에 손가락이 떨렸음이 틀림없다.
결정적 순간에 아버지의 고뇌가 작동했던 것 같다.
총알은 미세한 각도로 빗나갔다.
상처를 회복한 홍양순은 아버지의 의병 대열에 합세했다.
17살짜리 소년 의병이 됐다.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함흥 신성리 전투, 통패장골 쇠점거리 전투, 하남 안장터 전투,
갑산 간평 전투, 구름을령 전투, 괴통병 어구 전투,
동사 다랏치 금광 전투 등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홍양순은 1908년 6월16일 정평 바맥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노년이 되어서도 홍범도는 그 전투를 잊지 못했다.
“정평 바맥이에서 500명 일본군과 싸움하여 107명 살상하고,
내 아들 양순이 죽고 의병은 6명이 죽고 중상자가 8명이 되었다.
그때 양순이는 중대장이었다. 5월18일 12시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
이씨 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은 그 뒤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의 운명은 길지 않았다. 임재덕과 김원흥이 이끄는
토벌대 200여 명은 용문동 더덩 장거리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짜놓은 매복에 노출되고 말았다.
그 결과 토벌대 지휘부를 포함해 군경 209명이 포로로 잡혔다.

임재덕과 김원흥의 최후
용문동 의병 주둔지 지휘소 앞에 임재덕과 김원흥이
결박된 채 무릎이 꿇렸다. 홍범도가 나섰다.
“너희 두 놈은 내 말을 들어라. 김원홍 이놈!
네가 수년을 진위대 참령으로 국록을 수만원을 받아먹다가,
나라가 망할 것 같으면 시골에서 감자 농사하며 먹고사는 것이
그 나라 국민의 도리이거든. 도리어 나라의 역적이 되니,
너 같은 놈은 죽어도 몹시 죽어야 할 것이다.
임재덕도 너와 같이 사형에 다 청한다.”
두 사람은 깎아 세운 두 나무 기둥에 각각 묶였다.
홍범도는 지시했다.
“석유통의 위 딱지를 떼어 저놈들 목욕시키고, 불 달아놓아라”라고.
지시는 즉각 실행됐다. 일본군 토벌대를 지휘하던
전직 한국군 고급 장교와 일진회 간부는 그렇게 생애를 마쳤다.

(by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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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 Beom-do
(August 27, 1868 – October 25, 1943),
was 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
Hong was born in Chasong, North Pyongan.

[Biography]
Hong was originally a hunter. In
September 1907 Japan proclaimed a law
to gather hunters' guns to weaken
Korean resistance. The law made hunters
angry, including Hong. So, he organized
a Righteous Army which defeated
Japanese garrisons around Bukcheong
through the use of hit-and-run attacks.

한국.net

In 1910, He moved to Gando. After March
First Movement, He became a Commander-
in-Chief of Korean Independence Army.
In August 1919, Hong crossed Tumen
River with 200 soldiers. He assaulted
Japanese troops in Hyesanjin and
Kapsan. He would cross the river twice
more, each time carrying out more
successful attacks.

In June 1920, Hong and his army fought
against Japanese forces, killing
hundreds of Japanese soldiers in
Samdunja and Bongodong. In October,
working together with Kim Jwa-jin, Hong
again fought against Japanese troops
(Battle of Chingshanli).

In June 1921 as the Soviet Union
disarmed Korean troops by force and
internal trouble occurred, resulting in
the collapse of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Hong ended up as a member of the
Russian red army.

In 1937, Hong and other Koreans were
deported to Kazakhstan by Joseph
Stalin. Hong would die there in 1943.

On October 25, 1963, Hong was
posthumously awarded the Republic of
Korea Medal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from naver.com wikipedia.org)


Deported, Domestic, Disarmed, inDependence activist, Influence(+)~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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