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민자영 명성황후 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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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영-閔玆暎, 명성황후, 조선, Korea
명성황후,민자영 閔玆暎,
민비, 明成皇后, Empress Myeongseong of Korea, 조선


[왕비 재위]
1866년 ~ 1895년

[별명]
명성황후, 명성태황후, 민비
[배우자] 고종
[자녀] 순종 외 조졸 3남 1녀
[본명] 민자영
[부친] 여성부원군 민치록
[모친] 한창부부인 이씨

[출생] 1851년 11월 17일
조선 경기도 여주목 근동면
섬락리 사저


[사망] 1895년 10월 8일 (45세)
조선 한성부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오전 5시경)

[사인] 일본 정부에 의한 암살
[능묘] 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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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閔)씨이며,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致祿)의 딸로 태어났
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
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
여 주변에 알려졌다. 16세에 흥선대원군(興
宣大院君/이하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
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이하
비)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
씨로부터 완화군(完和君)을 얻고 비를 돌보
지 않았으나 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비는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
졌고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에 원자
가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
을 가지고 대원군과 더욱 대립하였다. 비
는 대원군의 반대파인 민승호,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 그 아들 재면(載冕),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대원군의 반대 세력
인 김병국, 조두순, 이유원 등을 규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마침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
論)으로 내외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景
福宮)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의 이
유로 대원군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이를
이용하여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
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고, 대원군의 실
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1873).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과 동시에 비 중심의 세력으로 정권을 구
축한 뒤, 개방정책을 펴서 일본과 수교하였
다(1876).


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여 민씨 세력
이 위협을 당하자 비는 궁궐을 탈출, 화개
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의 집을 거쳐 충
주(忠州)·장호원(長湖院)으로 옮겨 다니
며 피신하였다. 국내가 혼란해지자 고종은
대원군의 힘을 빌렸고, 비가 오랫동안 사라
지고 나타나지 않자 대원군이 중전의 국상
(國喪)을 선포하려 하였다. 이때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
은 청으로 압송되는 수모를 당했고, 민씨
중심의 정권이 다시 수립되었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
으키자, 심상훈(沈相薰) 등을 통하여 청군
이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
(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점차 정권을
좌우하고, 대원군에의 복수심을 키우고 궁
궐에서 굿을 하거나 치성 명분으로 명산대
천을 찾아다니며 국고를 낭비하기도 하였다.


일본 세력의 침투가 점차 강화되면서 김홍
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
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대
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
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
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
월 8일)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명
성황후를 살해하였다. 봉록을 받지 못하고
유랑하는 무사(武士) 계층을 가리키던 낭인
(浪人, 로닌)은 상당수가 조선과 만주에 진
출하여 일본의 대외침략주의에 앞장서고 있
었다. 일본 낭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다(을미사변 乙未事變).

그 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
년(광무 1)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
졌다. 그 해 11월 국장(國葬)으로 청량리
(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안장되었다. 고
종의 황제 즉위를 계기로 명성황후(明成皇
后)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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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력 9월 25일 (양력 11월 17일) ~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는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
(高宗)의 왕비이자 추존황후이다.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도시 첨정으로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봉된 민치록이고,
어머니는 감고당 한산 이씨이다.
아명은 자영(玆暎), 본관은 여흥. 출신지는 경기 여흥이며,
여주 나들목 인근에 생가 공원이 있다.

고종의 정비로 1871년 첫 왕자를 5일 만에
잃고, 최익현 등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간
섭을 물리치고 고종의 친정을 유도했다. 민
씨 척족을 기용함으로써 세도정권을 부활시
켰으며, 1882년 임오군란 후 일본의 견제
를 위해 청나라의 지원에 의존하다가 1894
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후에는 러
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했다. 맨 처음
에는 개항에 미온적이었으나, 점진적인 개
화시책을 통해 친일성향을 띤 급진개화파
의 개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그녀는 흥선
대원군과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공모
에 의해 일본인 병사와 낭인들에게 암살당
했다. 사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다. 정식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
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
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왕비 시절]
[입궐과 그리고 흥선대원군과의 대립]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
를 총애하고 있었다. 가례를 올린 첫 날 남
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다.

명성황후는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
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고종의 형
인 흥인군 이재면(李載冕), 서원 철폐에 불
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
과 제휴했다. 이와 같이 자리를 다지던 명
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에 아이를 낳았
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
에 죽어버렸다. 왕자의 죽음을 두고 민씨
는 흥선대원군이 왕자에게 달여준 약에 산
삼을 많이 넣은 일을 의심했다. 그 무렵
세 돌 된 완화군이 갑자기 죽자, 명성황후
는 완화군의 생모 귀인 이씨를 궁궐에서 쫓아냈다.

[고종의 친정 유도]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입을 모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
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입을 모았
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해왔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
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
핵을 받고 해임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랐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
원군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였고,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단체 역시 포섭에
성공하였다.

이어 명성황후는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올려주었으며, 최익현은 11월에 다시
흥선 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
종과의 논의 끝에, 1873년 11월엔 운현궁에
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폐쇄하였다.
이로써 대원군의 11년간의 간섭은 종결되었
다. 대원군은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로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대원군은 끊임
없이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 및 민씨 일
족과 수시로 갈등하였다.

[흥선대원군 퇴진과 권력투쟁]
1873년에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
과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리도록 했다. 22세로 성인이 된 국왕을
두고 섭정의 명분이 없었던 대원군은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흥선대원
군 세력의 최익현 공격을 우려하여 일시적
으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등용할 것을 고종
에게 상주하였다.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
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
해 2월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흥선대원군 계열은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왕비는 배후에서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보낸 뒤
다시 등용하여 승진시킨다.

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대외적으로도
개방이론을 포용하여 쇄국을 버리고 1876
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며 김홍집, 어윤중, 김
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이런 한편으로는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
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에 의하
면 그녀가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모의를 꾸
미다가 대원군 즉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발
각되었다고 한다.

이에 긴장한 명성황후는 우호세력을 중용하
여 세력을 강화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
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
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
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
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
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
(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한편 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
고, 1881년에는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
군)이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보고 유생들을 동원하여 고
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려 하지만 사전 발
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그러나 1874년 폭탄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
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부인 등 일가족 3
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일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 고
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애달파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보복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 등의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유배보내려 파면하였다. 1882년 2월
에는 친척 민태호(民台鎬)의 딸인 민씨를
왕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임오군란과 대원군의 정변시도]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허욱의 임오군란 때
에 죽을 위험에 달하였으나, 미리 변장을
해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했다. 이때 명성황후는
홍계훈의 누이로 연기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임오군란 동안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은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은 임오군란 때 군인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
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비는
경복궁에 그들이 다다랐을 때에 빠져나가고 없었다.

명성황후가 궁으로부터 도망다니며 빠져나
와있는 동안,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
은 임오군란의 6월 10일의 난군들에게 피
습 당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
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한 그는 흥선대
원군을 바라보고, "대감 내를 부디 목숨만
은 지켜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흥
선대원군은 비웃으며 "내 어찌 대감을 그대
로 둘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그는 계단으
로 내던져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아래서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주검
을 총검으로 마구 베어 잘라놓았다. 또 "중
궁은 어디 있느냐"며 매우 외치며 분위기
가 좋지 않았고, 잔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
녀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이때 어떤 궁인이 이
를 보고는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 이 말
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잘라내어
땅에 내던졌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홍계
훈의 오타이다.)가 '그 여인은 내 누이로,
상궁으로 있는 이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고 외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이 와중에 명성황후는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長湖院) 민응식의 집으
로 은신했으며, 궁에 남은 흥인군 이최응
(李最應)과 민겸호는 군인들에게 피습당했
다. 한편 한양에서는 정권을 위임받은 대원
군이 명성황후를 찾아내지 못하자 "황후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를 밟았다.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재정과 병권을 맏아
들 이재면에게 위임하고, 김윤식에게 청나
라 천진(天津)으로부터의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의 개입요청과 임오민병 진압]
명성황후는 궁궐에 있는 동안 고종을 움직
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게 하고, 대원군
이 부활시켰던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
며,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을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여 공업·무기제조법 등을 학습하도
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황준헌의 '조선
책략'이 전래되면서 조선책략의 연미론(聯
美論)을 접한 그녀는 1881년 김윤식이 영선
사로 청에 갈 때 비밀리에 호출하여 밀명
을 내려, 청나라에 한·미수교를 주선, 후
원해 줄 것을 부탁했고, 동시에 사람을 보
내 개화승려 이동인(李東仁)을 불러들인
뒤 그에게 밀명을 내린 뒤 일본에 파견, 주
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수교
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런 한편, 명성황후에 의해 기용되었던 개
화파 김홍집은 1881년 청나라의 외교관 황
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전했
는데, 이 책의 내용을 문제삼은 유생들이
1881년 2월 척사(斥邪) 상소 운동을 일으
켜 민씨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 역모를 계획
했다. 그 해 8월에는 대원군의 주변 인물
인 안기영과 권정호 등이 이재선(李載先)
즉 대원군의 서자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고종 폐위를 위한 역모를 은밀히 전개했으
나, 고변으로 인해 발각되어 이재선, 안기
영 등 주동자들이 옥에 갇히고 사형당했
다. 1882년에는 별기군과 구식군 간의 처
우 차별과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어 있었
던 군대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발생했다. 명
성황후와 그녀의 인물들은 대원군의 지원
을 받은 군인들의 위협을 받고, 명성황후
는 은신한 반면 많은 인물들이 피습당했다.
일본 공사관도 피습됐다.

일본은 중국(청)의 군대 파병에 대한 "일본
인 보호"의 명목으로, 도주했던 공사 하나
부사 요시모토(花房 義質)의 지휘 아래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을 통해 들어
왔다. 일본군은 일단 협의를 먼저 요청하
는 대원군을 무시한 채 한양으로 들어왔다
가, 이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대원군의 표
명으로 일단 인천으로 후퇴했다. 중국인 제
독 오장경(吳長慶)은 7월 일본군이 퇴각한
틈을 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했고, 그
날 밤엔 한성을 장악했다. 이와 함께 명성
황후는 청군의 보호 하에 입궁했다. 이 일
이후 명성황후는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
서 점차 배제시키며 외교적으론 친청 정책
으로 기울어졌다.



[개화파와의 대립]
임오군란이 가라앉은 이후 김옥균과 박영
효 등 급진 개화파들은 민영익 등을 필두
로 한 친청 세력에 의한 개화파에 대한 공
공연한 탄압에 위협과 불안을 느끼며 난과
거사를 꿈꾼다. 이에 민태호와 민영목 등
은 결국 김옥균과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
의 표적이 되어,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의 군인 난입 때에 피습당한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우궁으로 옮겨졌으며,
그들의 주위에 일본 군인 1개 중대가 보초로 둘러진다.

정권을 장악한 급진 개화파들은 즉시 자신
들의 정강과 개혁안을 공포하고, 각국 공사
관에 이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알
렸다. 이에 명성황후는 민영익과 경기 감
사 심상훈(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청군의
원조를 청하도록 했다. 명성황후와 고종이
연금되었던 경우궁의 보초를 맡았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에겐 우리들의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길 것
을 부탁했고, 다케조에는 이 요구를 받아들
여 명성황후와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바꾸도록 했다. 그 해 고종은 10월 18일 청
나라 공사 원세개(袁世凱)와 6백 명의 군인
들의 면회 요구를 받았고, 김옥균은 이를
저지하려하여 그들간에 말씨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날 오후에는 중국 군인들이 배
로 늘어났고, 일본인 군인들은 혼란 와중
에 민심의 표적이 되어 공격받았다. 일본
인 군인 2백 명은 일단 후퇴하였으며, 정부
군 8백 명도 열세로 인해 패배했다. 이런
때에 명성황후는 고종과 함께 홍영식, 박영
교, 몇 명의 사관생도의 호위를 받으며 이
탈하여 청군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김옥균
은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변수, 유혁로
와 함께 다케조에 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
의 호위를 받으며 북문을 통해 삼각산과 양
화나루,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했다.
명성황후는 이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의
존하게 된 반면, 일본은 공사관의 화재와
군중들에게 죽음을 당한 일본인들에 대한
배상을 조선에게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일본에게 갑신정변에 대한 배상을 해주기
로 한 한성조약을 체결했다.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혼란으로 더
욱 약화되어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는데, 남
하 정책으로 얼지 않는 항구를 얻으려는 러
시아의 개입으로 러시아와 청나라와 일본
등 열강들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왔다.
명성황후는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의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를 매
개로 러시아 공사와 접촉하여 밀약을 맺으
려 했다. 이러나 밀약은 먼저 중국에 발각
되어, 1885년 2월엔 묄렌도르프에게 영장
이 발부되고 대원군은 원세개를 대동하여
귀국되었다. 1885년 3월에는 거문도가 영
국 함대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1887년엔 조
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와
의 합의 끝에 철수했다. 이런 한편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르는 명성황후와 밀약을
또 맺으려 했으나 원세개가 정보를 먼저 입
수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조정의 실력자였던 조정 내의 민씨 일가 척
족의 대다수가 1884년 10월의 갑신정변의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표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 내관 유재현은 명성황
후의 개인 비서였으나, 그 조차도 표적이
되어 죽음을 당한다. 그 때 미국인 의원인
호러스 뉴턴 앨런(한국이름 안련)은 양조
카 민영익의 부상을 치료해주어 생명을 건
져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는 일본
과 급진 개화파를 매우 경계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이준용 등과 갈등]
1892년 봄엔, 운현궁으로부터 화약이 터지
고 또 화약이 여러 건물에 장치된 것이 발
견됐다. 다행히 이 폭탄들은 점화되지 않
은 채로 발견됐다. 명성황후는 이 일에 대
한 음모론의 표적이 되어, 그 전날, 명성황
후의 양오빠인 민승호에게 대원군이 폭약
을 보내 일가를 죽게 만든 일에 대한 정치
적 보복극을 꿈꾸지 않았겠느냐는 음모론
이 제기되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세
간의 소문을 빌어 명성항후가 운현궁 테러
의 배후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운현궁
의 폭탄 테러는 명성황후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추측성 유언
비어를 옮겨 놓은 것이다.

윤효정은 이 사건이 이준용이 통위사에 오
른 것을 기념한 1894년 7월 중순 경에 일어
났다고 기록했다. 민승호일가의 폭사 사건
의 배후로 지목된 대원군은 그 뒤 무명의
자객에 의한 암살과 폭탄 테러의 위협을 받
았다. 이에 그는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명성
황후와 고종을 내쫓을 계획을 꾸민다.

[동학 농민군과의 대립]
이와 같이 조선을 둘러싸고 러시아, 일본,
청나라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속에서 명
성황후는 정부와 권력의 안정에 모든 역량
을 쏟았다. 이 와중에 최제우가 일으킨 동
학은 비록 민중을 거짓말로 홀렸다는 죄목
을 받은 최제우가 처형되었으나 제2대 교주
인 최시형을 중심으로 재기했다. 1893년 3
월 충청도 보은 집회에서는 농민들이 2만여
명 모여 농민을 괴롭히는 지방관들의 퇴출
과 민생고를 탕감하고, 오랑캐들을 몰아낼
것 등을 요구하였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1월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패를
규탄하는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명성왕후
는 온건 개화파 및 친척 척신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이 동학 농민군을 동비(東匪.
동학의 불한당들.)로 보고한 것을 그대로
믿고 지냈다.

같은 해 4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해
점령되고 흥선대원군이 반군을 지원하여 고
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성
황후는 지원을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
였다. 군인들이 청나라에 의해 파병되자 이
에 일본도 톈진 조약을 빌미로 파병하였
다. 농민군과 관군은 조선에 일본군과 청군
이 당도하자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53개
지역에 민정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
안과 행정을 처리키로 하고 휴전했다. 그러
나 조선에 온 이들 오랑캐들은 주둔하며 군
대를 증파했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빌미로 일본은 청나라와의 협력을 제의했으
나, 청나라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민씨 일
가는 일본이 궁궐에 보낸 일본 공사 오토
리 게이스케와 휘하의 군인들에 의해 퇴출
당하고 대원군은 또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됐으며, 일본은 김홍집을 총리 대신에 앉히
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단
행했다. 조선의 내정 개혁과 갑오경장을 통
해 일본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을
먼저 공격한 뒤에야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
으며, 7월 ~ 9월 사이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명성황후 폐위 음모와 실패]
갑오경장 초기에 명성황후와 고종 폐위 음
모를 꾸미던 대원군과 이준용은 먼저 명성
황후 폐위를 전초작업으로써 착수하였다.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를 적은 문건이 1894
년 6월 22일부터 흥선대원군에 의해 일본
공사 오토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일본
측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이준용도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재조선 일
본 공사 오토리 공사를 설득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과 이준용의 의도는 스기무라 일본
공사관 서기관 등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강
력한 반대로 좌절되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에 대한 감찰과 간섭을 강
화하려 흥선대원군은 6월 24일 이준용을 별
입직에 임명하였다. 고종은 7월 초 갑오경
장을 단행한다. 이때에도 명성황후 폐위의
정당성을 믿는 이준용은 꾸준히 일본 공사
관을 방문하여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명
성황후를 폐위하려는 음모는 갑오경장을 전
후해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주업이었으나 일
본 영사관에선 호응하지 않아 좌절된다.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이 일본군 혼성여단
에 의해 점령되었다. 대원군은 정권 회복
과 왕조 중흥 방안 마련에 골몰했으며, "조
선의 땅을 한 치도 요구하지 않겠다.”라
는 스기무라 후카시 일본 공사관 서기관의
확약을 곧이곧대로 믿고 일본 상인의 호위
를 받으며 입궐하였다. 이로써 민씨 일가
의 세도는 무너졌다. 대원군 일가는 그러
나 달포 만에 일본의 의도로 끌어내려진
다. 대원군의 대신으로 김홍집 내각이 일본
군의 괴뢰정부로 만들어지며, 이 정부는경
장사업(更張事業)을 진행한다. 이로 인해
민씨 일족은 좌찬성 민영준(뒤에 영휘(永
徽)로 개명)을 필두로 은 모두 유배되었
고, 명성황후도 위기 중에 폐위 위기를 아
슬아슬히 넘겨 홍순형(洪淳馨) 경기도 감사
의 집에 은신한다.

[동학 농민군 진압]
조선에 대한 일본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
자 동학농민군이 다시금 모여 대일 농민 전
쟁을 감행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12월의 패
배로 봉기는 우금치 전투를 끝으로 마지막
을 맞으며, 녹두장군으로도 불리는 전봉준
도 순창에서 부하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
년 3월에 처형되었다.

동학의 농민 무리들에 조정은 동학 농민 운
동 초기의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그들이
단순 비적인 정도로 인식했으나, 명성황후
는 동학 농민군을 부정적으로 볼만한 이유
와 계기가 있었는데, 이는 녹두장군 즉 동
학 농민군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전봉준
과 흥선대원군의 관계 때문이었다. 운현궁
에 전봉준은 1890년에 찾아갔다. 운현궁에
서 전봉준은 1890년대 초반부터 흥선대원군
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 그 뒤 고향으로 내
려간 전봉준은 또 다시 흥선대원군을 찾아
가 협력을 청하기도 했던 것이다. 전봉준
은 1893년 2월 흥선대원군을 방문하려 한성
부로 올라가기도 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에게 잠깐 손님으로 와 있
던 것 뿐이나 전봉준에게 대원군은 매우 후
한 대접을 했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
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밀접한 관계로부터 전봉준과 흥선대원
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
이 세간엔 돌았다. 이런 한편 조선의 내정
은 또 한 번 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동원된
청나라 군대의 간섭을 받는다.

[개화당 제거 미수와 흥선대원군의 암살 공작]
1894년 가을, 명성황후는 개화당을 제거하
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이때 흥선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다. 명성황후를 암살하려
는 음모를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와 협의하
며 일본에게 약간의 도움을 부탁하였다.
명성황후 즉 그녀가 죽음을 맞게 되기로 음
모가 꾸며지는 때였다. 명성황후의 제거에
대원군은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
으리라는 일본 공사 오카모토의 언약을 받았다.


1895년 9월, 일본 공사에 미우라 고로와 명성황후
제거의 모의에 대원군을 끌어들이려는 일본
인들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스기
무라 후카시(杉村濬) 등이 대원군의 도움
을 받으려 대원군에게 다가왔으나 대원군
은 일단 거절하였다. 대원군은 공덕동 별장
에 칩거하면서 교동에 장손 이준용이 유폐
된 일에 불만을 품고 집 안에만 지내고 있었다.
운현궁에 대원군이 있을 적에 대원군을 오
카모도는 설득했다. 이런데 흥선대원군은
이때 일본 공사관을 비밀리에 자주 출입했
는데, 유길준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일
본 영사관을 드나들기를 수시로 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유길준은 왕비 제거에 대
원군이 일본 낭인들의 지원을 얻은 것은 매
우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래도 왕
비 제거 계획에 관해 유길준은 대원군에 협
력했는데, 이준용을 두고 박영효와 서광범
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위장된 의도적인 고
문치사를 계획하는 중에 유길준의 갑작스
런 왕비 제거 계획 가담 소식에 당황한다.


[명성황후의 마지막]
[명성황후에 대한 박영효의 암살 미수]
조선은 1895년 4월 일본의 영향권 아래 있
었다. 일본은 대원군을 퇴진시키는 한편 의
정부의 명칭을 내각으로 바꾸고 물러나있
던 김홍집을 7월에 다시 총리대신으로 앞세
워 연립 내각을 구성했고, 내정의 내각엔
일본인 고문관을 두어 내정 간섭을 강화했
다. 이에 명성황후는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 반도를 다시 청나
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몰아내려 했다. 명성
황후는 박정양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
고 김홍집 내각을 퇴출했다.

1895년(고종 32년) 7월 왕비를 암살할 계획
이 박영효에 의해 꾸며진다. 조선의 개화
이후로 고종은 안으로는 군국기무처가 마음
대로 하고 밖으로는 일본의 견제를 받아 고
종은 단 한 가지 일도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이에 명성황후는 이를 못마땅하고
분하게 여겨 러시아와의 제휴를 통해 점차
로 군권(軍權)을 회복하기를 기원했으나,
박영효는 이를 우려했다. 명성황후는 군국
기무처의 일부 급진개화파가 독단하는 것
을 우려했고 이들의 정책을 뒤엎을 기회를
찾았다. 이때 명성황후를 암살할 음모가 박
영효의 단독에 의해 계획됐다.

박영효는 왕후의 능력과 권모를 두려워해
왕후가 암살되어 화근을 뿌리 뽑아야 된다
고 여겨, 1895년 7월로 날짜를 정하고 일본
에 병력 을 요청하였다. 유길준을 박영효
는 제 조력자로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이에 유길준은 매우 놀라워하며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바로 임금에게 알렸다. 유길준
의 밀고를 박영효는 알아채어 양복으로 바
꿔 입고 변장하며 일본인의 호위를 받아 도
성 을 빠져 나와 한강 자락의 용산에서 증
기선 을 타고 달아났다. 그의 일당인 이규
완, 신응희(申應熙) 등도 따라 달아났다.
이러나 왕비 암살 모의는 유길준에 의해 대
원군와 이준용과 또 꾸미어지고 있었다.

[암살 준비 과정]
1895년 8월에 명성황후는 죽고 대원군을 꼭
두각시로 만든다는 음모가 일본 공사 겸 예
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일본어: 三浦
梧楼)와 8월 15일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衫村濬),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
(楠瀬幸彦), 로닌 두목 오카모토 류
노스케(岡本柳之助) 등과 함께 꾸미어졌는
데, 명성황후의 죽음은 일본인 군인들과 로
닌들이 맡고, 대외적으로는 불만을 품은 조
선인 군인들의 반란이었다고 발표하는 것
이 골자였다.
8월 16일 대원군은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
된 맹세에 자필로 서명했다. 그 내용은 명
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가
죽은 뒤 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
록 미리 언약을 받아 둔 것이다. 이날 대원
군은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과 장손자 이
준용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자필로 각서에
서명했다.

8월 20일(양력 10월 8일)에 명성황후 암살
작전이 그들에 의해 결행에 들어갔다. 대원
군이 은거했던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我笑
亭)에, 일본군은 로닌과 일본 군인, 명성황
후에 불만을 품은 조선인 군인 300명가량
을 모았다. 대원군은 미우라와 결탁하고 합
의하여 가마에 태워져 경복궁으로 나아갔다.
대원군은 먼저 명성황후가 죽음을 맞아 마
땅하다는 주장의 '고유문'을 발표하고 이
를 내일 서울 시내에 게시하라고 지시했
다. 이 고유문의 내용은 '민씨 일가의 척족
이 권력을 잡고 갑오경장의 개혁을 무위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내용이다. 이를 대원군
은 제 자필로, 일본의 강요도 없이 적어놓
았다. 대원군이 이런 글을 적는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 글을 미리 들은 조선의 학자들
과 지식인들은 매우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대원군이 일본의 강요에 의해 그러
했는지 본인의 의지로 그러했는지는 논쟁
이 있다.

유길준에 의하면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화당(개화파) 모두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정보망에 발각되었고,
명성황후의 죽음과 암살을 위해 대원군은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내기
로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했다.'고 한
다. 일본 낭인들은 이두황, 이진호, 우범
선, 구연수, 이주회 등이 이끄는 조선인 궁
궐수비대 예하 각 대대 병력의 길안내를 받
으며 반나절도 안돼 도성에 인천으로부터 잠입했다.


[암살]
경복궁에서 이들을 마주친 홍계훈 경비 대
장이 이들을 가로막았으나, 홍계훈과
경비대원들은 일본 낭인들, 낭인들에게 협
력한 조선인 군인들의 발포에 맞아 죽는
다. 명성황후가 있던 궁궐에는 홍계훈을 죽
인 낭인들이 들어와 명성황후를 찾아다녔
다. 외침을 들은 명성황후는 궁녀복으로 갈
아입고 건청궁 곤녕합 쪽에 있는 옥호루로
은신했는데, 궁녀와 내관들은 낭인들에 의
해 피습당하고 있었다. 이경직 내부대신이
두 팔을 벌려 명성황후와 궁녀들 앞을 가로
막아 가리니 두 팔이 잘려 죽음을 맞는다.
궁녀들과 함께 있던 명성황후는 대궐에 다
다른 낭인들을 만난다.

명성왕후는 방 한 구석에 기대어 몸을 감추
고 있다가, 낭인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눈
에 띄어 검에 베어 죽었다 한다(오전5시경).
명성황후의 죽은 몸은 그 뒤 기름부어져
불태워졌다. 이 때 명성황후의 나이는 45세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경복궁
내 강령전에 머물던 대원군이 휴식을 취하
던 중에 보고됐다. 놀라고 두려운 고종은
대원군을 불러 이 날 아침 경복궁내 건청궁
에서 아버지와 대면한다. 이런 대원군이 건
청궁으로 발길을 옮기던 때에, 명성황후의
주검은 대궐 홑이불에 둘러싸인 채 대궐 솔
나무 숲으로 옮겨져 기름이 부어진 가운데
가을의 바람에 한줄기 연기가 되어 날려가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유골의 일부만이 누군가에 의
해 주워져 닦이운 뒤에 고종에게 전달된
다. 고종을 대면한 자리의 대원군은 고종
의 형이자 그의 장남인 완흥군 이재면을 궁
내부대신에 앉히고 또 정권을 장악한다.


[사후]
명성황후의 암살은 바로 한성부에 체제하
고 있던 프랑스와 청나라 공사관의 외교관
및 외교관 부인, 언론인들의 입을 통해 외
국에 알려졌다. 주조선 러시아 공사 베베르
는 즉시 보고서를 작성하여 러시아 황제 니
콜라이 2세에게 보고했다. 당시 러시아 황
제 니콜라이 2세는 웨베르의 보고서를 직
접 읽은 뒤표지에 자필로 “정말로 놀랍
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
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
르 주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 프
랑스 공사관에서는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
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했다.

1895년 10월 문석봉은 김해로부터 나와 충
청북도 보은 등지에서 많은 이들을 모아놓
고 의병을 일으켜 적당들을 토벌하자고 외
쳤다. 이에 이곳과 인접한 읍의 유생, 선비
들이 두건과 도포를 입고 나아갔지만 얼마
뒤 공주부에서 보낸 군인들에 의해 모두 잡혔다.

명성황후의 직위는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죽음 이틀 뒤 폐인으로 강등했으나, 바로
다음 날 그녀의 직위는 고종의 명으
로 "빈"(嬪)으로 올라갔다.
나라의 어머니에게 저질러진 이런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10월에는 형식적인 조사를 했으며, 명성황
후의 지위도 완전히 복원되어 암살 이전과
같아졌다.
1896년 고종은 은신했던 러시아 공사로부
터 1897년 2월에 돌아와 8월에 연호를 광무
로 고치고, 10월에는 대한제국정을 발표하
고 황제에 올랐다. 이와 함께 명성황후의
사후 지위도 올라가 1897년 음력 1월 6일
문성황후의 시호를 받고, 능호는 홍릉으로
고쳤다. 그러나 뒤에 명성황후의 시호의 문
성(文成)이 정조의 시호와 같다 하여 음력
3월 2일 명성황후는 오늘날의 시호인 명성
황후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따라 명
성황후는 황후에 추존되었으며, 장례도 국
장으로 또다시 치러져 지금의 청량리동에
안치되었다가 지금의 위치로 이장됐다.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에게 태황제
(太皇帝)라는 시호가 올려지자 그 정후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 자의 시호가 올
려져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라 불리기도 한다.

이런 한편, 명성황후의 암살은 조선 민중들
의 분노를 야기하였고, 암살에 관련된 조선
인 장교들과 군인들은 피신하거나 은신해
있었다. 이 때에 백범 김구(이 때의 이름
은 김창수, 金昌洙)는 의병으로 만주에 있
다가 1895년 초 귀국하며 일본인 상인 쓰치
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일본 낭인으로 오인
하며 치하포에서 만나 그를 죽이는 일이 발
생하기도 한다. 김구는 이에 대해 뒷날 그
가 일본 낭인이거나 왕비 암살에 가담한 자
라고 주장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일본인 상
인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문제연구소 연구
원 배경식 교수는 "지금까지 확인 가능한
어떤 자료에도 그 일본인이 육군중위라는
기록은 없다"며 "일본 공사관의 보고서와
조선 관리의 보고서, 독립신문의 사건 보도
는 한결같이 그를 '상인(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배 교수는 백범
도 그가 육군 중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7년 도진순 창원대
학교 교수는 일본의 자료로부터 그가 계림
장업단의 상인이며 민간인이었다고으로 밝혔다.


[암살의 배후]
[일본 낭인]
일본 자객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한성
으로 잠입, 명성황후의 암살을 주도하였
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을 훈련하
여 표면적으로 앞세웠다.
또한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로 일본 공사 이
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 2006년에
는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가 일본 헌정자
료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
有朋) 육군대장과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
光) 외상 사이의 편지를 통해 일본 정부의
개입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명성황후의 암살 과정에서 조선인 병사들
이 길안내를 했고, 일본군이 양성한 훈련대
의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등이 일본 낭인
에 협력했다. 그 밖에 전 군부협판 이주회
등도 포섭하였다. 이 중 우범선이 1903년
고영근에게 죽음을 당했다.

[조선인 협력자들]
명성황후 암살의 국내 고위급 협력자로 유
길준과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윤치호
는 그의 일기에서 그를 암살한 일본 낭인들
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
였다. 명성왕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즈카가 사건의 전말
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
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대
원군이 명성왕후 암살의 조선 측 주동자라
고 지목하였다. 1894년 가을 명성왕후가 개
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
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
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
정하였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
선인 거물 협력자로 지목했다. 미국인 교
수 에드워드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유
길준은 명성왕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대원
군이 명성왕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
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
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
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
도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돈
(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
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2대
대장 이두황(李斗璜)·3대대장 이진호(李軫
鎬)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 국
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일
본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문신 구연수(具然壽)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
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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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ress Myeongseong of Korea

[Reign]
1 November 1873 – 1 July 1894
6 July 1895 – 10 October 1895

[Spouse] Gojong of Korea
[Posthumous name]
Short: Empress Myeongseong
*명성황후
*明成皇后
*Myeongseong Hwanghu
Full: The Filial and Benevolent, the
Origin of Holiness, the Proper in
Changes, the Uniter of Heaven, the
Immensely Meritorious, and the
Sincerely Virtuous Grand Empress
Consort Myeongseong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명성태황후
*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明成太皇后

[Father] Min Chi-rok
[Mother] Lady Hanchang of Yi clan
[Born] 19 October 1851
Yeoju, Gyeonggi Province, Joseon

[Died] 8 October 1895 (aged 43)
Okhoru Pavilion, Geoncheonggung,
Gyeongbokgung, Seoul, Korea

[Burial] Hongneung

Empress Myeongseong (19 October 1851 –
8 October 1895), known in life as Queen
Min, was the first official wife of
Gojong of Korea, the twenty-sixth king
of Joseon and the first emperor of the
Korean Empire.

The government of Meiji Japan
considered Queen Min an obstacle
against its overseas expansion. Efforts
to remove her from the political arena,
orchestrated through failed rebellions
prompted by the father of King Gojong,
the Heungseon Daewongun (an influential
regent working with the Japanese),
compelled her to take a harsher stand
against Japanese influence.

After Japan's victory in the First Sino-
Japanese War, Queen Min advocated
stronger ties between Korea and Russia
in an attempt to block Japanese
influence in Korea, which was
represented by the Daewongun. Miura Gor
ō, the Japanese Minister to Korea at
that time and a retired army lieutenant-
general, backed the faction headed by
the Daewongun, whom he considered to be
more sympathetic to Japanese interests.

In the early morning of 8 October 1895,
the Hullyeondae Regiment, loyal to the
Daewongun, attacked the Gyeongbokgung,
overpowering its Royal Guards.
Hullyeondae officers, led by Lieutenant
Colonel Woo Beomseon, an ardent
supporter of the Daewongun, then
allowed a group of Japanese ronins,
specifically recruited for this purpose
to infiltrate inside the palace,
allegedly under orders from Miura. Upon
entering the Queen's quarters (Okhoru
Pavilion), the assassins "killed three
court [women] suspected of being the
queen. When they confirmed that one of
them was Min, they burned the corpse in
a pine forest in front of the Okhoru
Pavilion, and then dispersed the
ashes." She was 45 years old.

The assassination of Queen Min ignited
outrage among other foreign powers.
To appease growing international
criticism, the Japanese
government "recalled Miura and placed
him under a staged trial at the
Hiroshima District Court, while the
military personnel involved were tried
at a military court. All were given the
verdict of not-guilty on the grounds of
insufficient evidence."

However, the assassination prompted
anti-Japanese sentiment in Korea with
the "Short Hair Act Order", and some
Koreans created the Eulmi Righteous
Army and actively set up protests
nationwide. Following the queen's
assassination, King Gojong and the
crown prince (later Emperor Sunjong of
Korea) fled to the Russian legation in
1896. This led to the general repeal of
the Gabo Reform, which was controlled
by Japanese influence. In October 1897,
King Gojong returned to Gyeongungung
(modern-day Deoksugung). There, he
proclaimed the founding of the Korean Empire.

In South Korea, there has been renewed
interest in Empress Myeongseong due to
popular novels, a film, a TV drama and
even a musical based on her life story.

(from naver.com wikipedia.org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


Domestic, Daewongun, Dynasty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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