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송익필 宋翼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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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익필-宋翼弼, 龜峰, 조선 성리학자, Korea


[출생] 1534년 2월 10일, 조선 한성부
[사망] 1599년 8월 8일 (65세)
조선 충청도 당진군 북면 원당리


[사인] 병사 (노환)
[거주지]
조선 한성부->경기도 교하군->전라도 진안
군 운장산->평안도 희천군->충청도 당진군
송산면 매곡리 마양촌

[국적] 조선
[별칭]
자(字)는 운장, 호는 구봉(龜峰) 또는 현승
(玄繩),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학력] 한학 수학
[직업] 문신, 사상가, 작가, 시인, 학자, 정치인
[종교] 유학 성리학
[배우자] 부인 창녕 성씨, 부실 이름 미상
[자녀] 아들 취방(就方), 서자 취대(就大),
서자 취실(就實), 서녀 여산 송씨(宋氏)
[부모] 아버지 사련, 어머니 연일 정씨
[친척] 형 인필(仁弼), 형 부필(富弼), 동
생 한필(翰弼), 누이 여산 송씨(宋氏)
-----------------------------
송익필(宋翼弼, 1534년 2월 10일∼1599년 8
월 8일)은 조선 중기의 서얼 출신 유학자,
정치인이다.

자(字)는 운장, 호는 구봉(龜峰) 또는 현승
(玄繩), 본관은 여산이다. 시호는 문경(文
敬)이다. 안당의 진외종손으로, 아버지는
서얼 출신 문신 송사련이며, 진외증조모는
안당 가문의 노비였다. 그는 서인 예학의
태두인 김장생과 김집, 김반 부자 및 인조
반정의 공신 김유 등을 문하에서 길러냈다.

서얼 출신으로, 출생문제에 대한 시비 및
아버지가 안당 일족과 사림 인사들을 역모
로 몬 것에 대해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관
직을 단념하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의 절친한 벗으로, 서인
의 이론가이자 예학, 성리학, 경학에 능하였다.

후일 안당의 증손부가 소송을 제기하여 환
천의 위기에 처했으나, 제자 김장생의 숙부
인 김은휘가 그의 일족을 배려하여 10년간
먹여 살렸다고 한다. 1591년(선조 24년) 평
안도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1593년
9월 석방되었다. 사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
었다가 1910년(융희 4년) 때 다시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

[학문 연구]
27세를 전후한 시기부터 교육자의 길을 걷
게 된다. 그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은 경기
도 교하에 있는 심학산의 구봉 아래였다.
교하 심학산에 서당을 짓고 이후 유생들과
문인들에게 글과 학문을 가르쳤다.

이이·성혼 등과 사귀어 성리학을 논하여
통하였고 예학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문장
에 능해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등과 함
께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와 글씨에
도 탁월하였다. 김장생·정엽 등 많은 제자
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김장생은 스승의 예
학을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
다. 특히 예학에 밝아 김장생에게 큰 영향
을 주었으며, 이는 후대의 송시열, 윤선
거, 송준길 등에게로 학문이 계승되었다.
또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
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송익필에게 배운 제자 중에서 유명한 이가
김장생으로, 친구인 이이의 수제자이기도
했다. 송익필은 미리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제자가 스스로 노력해서 터득하게 지
도했기 때문에 김장생은 먼저 스스로 수없
이 배우고, 읽고 생각하여 깨달은 바가 있
은 뒤에야 의문 나는 바를 물어 보았다고
한다. 그가 교하에서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는 동안 인근에 살던 이이와 성혼과
의 교유가 깊어 이들과 만나서 토론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으며 철학의 이치와 세상사
는 도리를 서로 탐구하였는데, 대개 이이
와 성혼의 질문에 송익필이 답하는 식이었
다. 이들의 우정은 서로가 죽을 때까지 계
속되었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이자 비슷한 연배였던
조헌 역시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친구로 지
내게 되었고, 정철, 윤두수, 윤근수 역시
그와 절친한 친구로 지내게 된다.

[학문적 치적]
그는 무너진 사회 질서를 회복시키는 방안
으로 예의와 예절을 강조하였다. 제자들
중 사계 김장생은 단연 돋보이는 인물로,
그는 송익필에게서 예의와 예절에 대한 예
론을 전수받아 이를 아들 김집과 함께 조
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들 부
자의 문하에서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
길, 미촌 윤선거, 명재 윤증 등이 배출되
어 예학을 더욱 크게 계승 발전시킨다.

그러나 그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
상이 되고, 인정받지 못했다.

[평가와 비판]
[긍정적 평가]
송익필은 스승이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였으
나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 이치에 밝았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
여 스스로 고고하게 처신하였고, 아무리 고
관·귀족이라도 한번 친구로 사귀면 ‘자
(字)’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
러한 태도가 그의 미천한 신분과 맞물려 조
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율곡 이이는
그를 평하기를 "성리학을 논할 만한 자는
오직 송익필 형제 뿐"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의 1등 공신 9명을 직·간
접 제자로 둔 서인 세력의 정신적 구심점
이었으며, 정여립 사건을 비롯한 역사
의 고비마다 논리와 심리를 파고드는 예리
한 상소를 통해 동인의 몰락을 불러오
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조헌은 말하기를, “늙도록 글 읽기를 쉬
지 않아, 학문이 깊고 경(經)에 밝았으며,
행실이 방정하고 말이 정직하여 아버지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성혼
·이이 두 선생이 다 스승 같은 벗으로 대
하였다. 또한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상
대방을 잘 일깨워주었으니, 스스로 분발하
여 뜻을 세우도록 유도하였다.”라 하였
고, 토정 이지함은 말하기를, “천지를 가
슴속에 간직하였으니, 공자·맹자의 도(道)
도 진실로 멀지 않았다.”라 하였고, 상촌
신흠은 말하기를, “천품(天稟)이 매우 높
고 문장(文章) 신묘하였다.”라 하였고, 택
당 이식은 말하기를, “타고난 자질이 투철
하고 지혜로워서, 이치를 분석함이 정밀하
였다.”라고 평하였다.

실록에는 '송익필은 비록 송사련의 아들이
나, 노년에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
서에 밝았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아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이리하여 이
이, 성혼도 모두 존경하는 친구로 여겨...
(이하 생략)... 이이가 서얼의 임용을 허가
하자고 주장한 의도는 다만 훌륭한 인물을
구하여 임금을 보필하자는 것일 뿐, 일개
송익필에게 사심을 둔 것은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이의 과실로 돌린다.'는 평도 있다.

[부정적 평가]
아버지 송사련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안
당 집안의 노비로서 안돈후의 첩이었기 때
문에, 안처겸 형제의 대화를 엿듣고 고변
한 송사련은 주종관계와 친척관계를 파탄시
킨 인간이라는 지탄을 계속 받게 되었다.
이는 신분제도와 위계질서, 계급제, 가족제
가 중요시되던 조선사회에서는 용납되기 힘
든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송익필은 생전
과 사후에도 아버지가 행한 밀고의 멍에를
평생 지고, 사후에도 노비 출신이 참람하
게 예를 논한다며 인신공격을 당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기획자, 선조 이후 펼쳐
진 서인·노론 집권 플랜을 설계한 책략가
라는 평이 있다.

아버지의 무고사건 때문에 노비로 전락해
평생 관직에 나가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라
는 시각도 있다.


[사상과 신념]
[교육관]
그는 유생들과 문인들에게 처음부터 정답
을 가르쳐주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깨닭
을 것을 강조하였다.

송익필은 그에게 배우고자 찾아온 유생들에
게 자상하게 설명해 주는 법이 없었다. 스
스로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읽고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지식을 습
득하는데 있어 사색을 중요시 하되 연구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강조한 때문이었다.
송익필은 선생에게만 의지하는 주입식
교육이 자칫 학생들의 창의성을 저해할 수
있는 폐단을 생각했던 것이다.

사물을 연구할 때도 무엇이 옳고 잘못되었
나, 왜 옳고 옳지 않은가를 스스로 생각하
게 했다. 공자와 맹자, 사서육경, 주자, 태
극설 등을 강의함에 있어서도 무조건 수용
옳다고 하기 전에 왜 옳은가를 유생, 문인
들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직 철학]
인간본성인 선(善)을 회복하는 실천 방법으
로 예절 외에 거짓됨이 없는 바른 행동, 직
(直)에 대한 공부를 강조하였다. 그는 평
생 직(直)을 생활철학으로 삼아 직심(直
心), 직언(直言), 직행(直行)의 3직 실천
에 힘썼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학문도 중
요하나 정직함 역시 중요하다고 역설하였
다. 높은 학문의 경지와 뛰어난 재주 못지
않게 직(直)의 실천으로 행실도 바르고 곧
았기에, 자신의 출세를 위해 주종관계와 친
척관계의 파탄을 저지른 부친과 신분적 한
계를 가지고도 당대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논란과 의혹]
[기축옥사 배후 의혹]
그는 정철과 함께 기축옥사에 개입했는데,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
작한 이로 지목되기도 한다. 서자의 후손
인 송익필은 문장력이 뛰어나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가족 70
여 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
발, 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
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김은휘의 배려]
그러나 안당의 증손부의 상소 외에도 그의
아버지인 송사련이 역모를 날조하였으므
로, 이때문에 친척들이 환천되는 등 세론
의 증오를 받아 멸문의 궁지에 몰리자 10
년 동안이나 먹여 살렸다. 김은휘는 그의
제자인 김장생의 숙부이자, 다른 제자인 김
집, 김반의 종조부였다.

[기타]
전라북도 진안군의 운장산은 원래 운장산
(雲藏山)이었으나 그가 임진왜란 전후에 은
거했다 하여 그의 호를 따서 운장산(雲長
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인이던 홍가신은 개인적으로 송익필과 친
분이 있어 늘 따르고 존경하였다. 홍가신
의 동생 홍경신은 형이 미거한 신분과 친교
를 맺는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하루
는 홍경신이 "형님께서는 어째서 송익필과
친하게 지내십니까? 반드시 송가 녀석을 만
나면 모욕을 주겠습니다" 라고 하자, 홍가
신은 껄껄 웃으며 '과연 너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결코 못할 것이다.'라고 답하
였다. 마침내 어느 날 송익필이 홍가신의
집을 방문할때 잔뜩 벼르고있던 홍경신은
송익필을 마주하자 그의 안광이 벼락치는듯
하고 선풍도골의 풍채가 위압적인지라 자기
도 모르게 마당에 내려가 주저앉고 맞으며
말하기를, “내가 절한 것이 아니라 무릎
이 스스로 굽혀진 것입니다.”라고 둘러대었다.

율곡(栗谷)의 소개로 가르침을 구하려 송익
필을 찾은 이순신(李舜臣)은 병풍 속 앉은
학이 자신이 상상하던 거북선과 비슷하여
몇 개 구멍을 뚫었다. 돌아온 송익필이 몇
개 구멍을 뚫었느냐고 묻자 네 개라 했다.
이순신이 묻기를, "원래 완전 하려면 구멍
이 몇 개입니까"냐고 묻자 송익필은 48구멍
이 전부라고 답했다. 용병(用兵)과 진법(陣
法)등에 관해서 또한 둘이 논하니 밤이 새
는줄 몰랐다. 그후 송익필 선생의 제자로
입문하여 훗날의 국난에 대비하는 많은 수
련을 쌓았는데 충무공에게 내린 시가 전해
져 온다.

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달 밝은 밤 기러기
높이 나니 선우는 밤에 도망치리라 (밤 깊
을 때에 도주하는 왜적을 섬멸할것을 암시)

毒龍潛處水偏淸 伐木丁丁山更幽 독룡 숨은
곳의 물은 편벽되게 맑고 산에서 나무하는
소리는 정정 울리니 산이 다시 그윽하도다
(수로에 수중철색을 설치하여 적을 붙잡아
두고 가로막아 쳐부술것이며 현대의 횡렬진
에 해당하는 일자진(一字陣)을 해안과 산에
서 협공할것이다)
===================================

[정의]
1534(중종 29)∼1599(선조 32). 조선 중기
의 학자.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
는 구봉(龜峯). 할아버지는 직장(直長) 인
(璘)이고, 아버지는 판관 사련(祀連)이다.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
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그러나 아버지 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
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
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
서 교육받았다.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
어나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
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
였다.

초시(初試)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
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
(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
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
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
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그의 형제들
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
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갈고 도피 생활
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
·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
축옥사의 막후 조종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
였다. 뒤에 또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
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
을 받아 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
처없이 친구·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
하게 살다 죽었다. 1586년 안씨의 송사 전
까지는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
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그 문하에서 김장생·김집(金集)·정엽(鄭
曄)·서성(徐渻)·정홍명(鄭弘溟)·강찬(姜
澯)·김반(金槃)·허우(許雨) 등 많은 학자
들이 배출되었다.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
나 이산해·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
勳)·최립(崔岦)·이순신(李純臣)·윤탁연
(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
대의 8문가로 불렸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했고, 문장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
로 하였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
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하게 행세하였
다. 또한 아무리 고관·귀족이라도 한 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으
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그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
소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
구봉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송익필(宋翼弼 : 1534~1599)은 조선 중기
의 학자이다. 자는 운장(雲長)이고, 호는
구봉(龜峰)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서출로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교우하면서 성리학과 에
학(禮學)을 탐구하여 조예가 깊었다. 그의
성리설은 『태극문(太極問)』에 잘 제시된
다. 그는 이(理)와 기(氣)는 개별적으로 존
재하는 것이 아니고 선후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모
두 정(情)으로 보아 기대승(奇大升)·이이
(李珥) 계통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견지한다. 인심도심(人心道心)도 하나의 심
(心)의 발현이므로 이기(理氣)에 분속할
수 없다고 하여 이이의 설과 비슷하다. 그
는 후진을 양성하여 그의 문하에 김장생(金
長生)·김집(金集)·정엽(鄭曄)·정홍명(鄭
弘溟)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에
『구봉집(龜峰集)』이 있다.
-----------------------------------

(2015.5.15 경인일보 기사)
조선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연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선생 기념사업회가 파주에
서 창립된다.

구봉선생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회장·황
의동 충남대 명예교수, 율곡학회 회장 역
임)는 정치, 경제, 문화, 학문, 출판 등 각
계 전문가 60여 명으로 구성돼 16일 기념사
업회를 창립한다.

기념사업회는 파주를 중심으로 고양, 당
진, 광주 등 구봉선생과 관련 있는 지역 문
화계 인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갖고 구봉선
생 현양 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다. 구봉 송
익필 선생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선생과
함께 파주를 중심으로 조선 성리학의 전성
시대를 연 삼현(三賢)의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구봉, 율곡, 우계 선생은 우의가 돈독
해 각 문하의 제자들이 서로 문하를 자유롭
게 출입하며 학문을 익힌 일화가 유명하
다. 구봉 선생의 제자 중에는 동국 18현
(賢)의 한 분인 조선 예학의 대가인 사계
(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있다.


또한 보물 1415호로 지정된 ‘삼현수간(三
賢手簡)’은 구봉, 율곡, 우계 삼현이 주고
받은 편지를 구봉이 하나로 묶은 책으로,
역사적, 학술적으로 귀중한 교육문화유산
이 되고 있다. 파주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충남 당진에 선생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from 이종태기자 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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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naver.com wikipedia.org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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