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기대승 高峰 奇大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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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奇大升,조선 유학자,16C Philosopher,Korea
高峰 奇大升 Gi Dae-s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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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사망] 1527년 12월 11일(음력 11월 18일)~
1572년 12월 5일(음력 11월 1일) (45세)

[본관] 행주
[자] 명언
[호] 고봉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전남 나주 (또는 광주시 광산구)
[대표관직(경력)]
성균관대사성, 대사간, 공조참의

[주요저서]
《고봉집》 《주자문록》 《논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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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주자대전(朱子大
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
(3권)을 편찬하는 등 주자학에 정진하였
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다.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로 유명하다.

본관 행주(幸州). 자 명언(明彦). 호 고봉
(高峰) ·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전
남 나주(羅州) 출생.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
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 사가독서(賜暇
讀書)하고, 주서(注書)를 거쳐 사정(司正)
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
어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삭직(削職)되었
다가, 1567년(명종 22)에 복직되어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집의(執義)가 되
고,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 조광조(趙光
祖)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
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로서 시독
관(侍讀官)을 겸직하다가, 1570년(선조 3)
대사성(大司成) 때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후에 대사성에 복
직되었는데
이듬해 부제학이 되어 사퇴하고, 1572년 다
시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
향하는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
로 고금에 통달하여 31세 때 《주자대전(朱
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
錄)》(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하
였다. 32세에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으
며,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 호남
의 석유(碩儒)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선학(先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특히 스승이라
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
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
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
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
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
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
四七理氣往復說)》 2권에 남아 있다.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1590년(선조
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
(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
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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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저서에는 《고봉집(高峰集)》 《주자문
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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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奇大升, 1527년 12월 11일(음력 11월 18일)~
1572년 12월 5일(음력 11월 1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전라도 광주목 광산면 소고룡리 출신으로,
본관은 행주이며,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理氣) 논쟁을 통해
조선 성리학 수준의 제고에 기여했다. 광
주광역시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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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영남의 유학자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박승임, 유성룡은 그의 동문들이었다.

1558년(명종 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
(史官)을 거쳐 사정(司正)이 되었으나, 훈
구파에 의해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후
학 교육에 힘썼다. 1563년 명종비 인순왕후
의 외삼촌 이량이 그를 정치적으로 제거하
려 하였으나, 그의 6촌 형인 기대항이 이
를 심의겸과 기대승에게 알려서 위기를 모
면하고, 이량 세력을 역으로 제거하게 된
다. 후학 양성에 전념하며 이 시기, 그는
스승인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담론
중, 인심도심 논쟁과 이기논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때 한 서신에서 그는 스승 이황
이 도학에 치우쳤음을 지적하고 성리학의
정도로 수정할 것을 촉구하여 이황이 그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 뒤 선조 때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해
직된 다음에 다시 부제학 등의 벼슬이 내려
졌으나,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가던 중
병을 얻어 전라북도 고부에서 죽었다. 저서
에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
이 있다.

[저서]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

[사상]
어려서부터 독학하여 고전에 능통하였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황의 제자가
되어 김인후 등과 왕래하면서 새로운 학설
을 많이 제시하였다. 특히, 이황과 사단칠
정(四端七情)에 대해 8년 동안이나 논란을
편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 일 이후로는 이
황도 그의 이론을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
는 글씨에도 재주가 뛰어나 종계변무(宗系
辨誣)의 주문(奏文)을 써서 광국공신3등(光
國功臣三等)으로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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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활동사항]

1549년(명종 4)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
고, 1558년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
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이량(李樑)의 시기
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
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
해 2월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
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
였다. 1567년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
官)이 되었고, 그 해선조가 즉위하자 사헌
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서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
을 겸직했고, 1570년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
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
고,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
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
던 도중에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학문세계와 저서]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
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
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정지운(鄭
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
고,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
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
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
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
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으
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
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
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하여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는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
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고 있었
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
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
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
로 엮어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이재양민
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
론(言路通塞論) 등이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서는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에서 이
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
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왕에게 아뢰었
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
命)·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
이 있으며, 저서로는 『논사록』·『왕복서
(往復書)』·『이기왕복서』·『주자문록
(朱子文錄)』·『고봉집』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
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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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퇴계 이황과 8년 동안 사단칠정
논했던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
http://bit.ly/1CmcrN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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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527년(중종 22) 광주 광산구 소고룡리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아버지 기진(奇進)과
어머니 진주 강씨(晉州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534년(중종 29)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매우 슬퍼하며 어른처럼 애통해하였다.
1537년 향숙(鄕塾)에 나아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배웠는데,
학우들이 배우는 것까지 아울러 통달하였으며,
수학(數學)과 육갑(六甲)과 오행성쇠(五行盛衰)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1546년(명종 원년) 가을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1549년(명종 4)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진사) 모두 합격하였다.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합격했으나,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복재 기준(奇遵)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1555년(명종 10) 부친 물재공(勿齋公)이 사망하자
여묘살이를 하였다. 1557년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해
주자문록 3권을 편찬했다.

1558년(명종 13)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도중 장성(長城)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태인(泰仁)의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1558년(명종 13) 10월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그달에 서울에서 추만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얻어 보고, 경저(京邸)에 와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1558년(명종 13)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다시
일재 이항을 배알하고는 전에 의논했던 것을 재차 논하다가
미처 결과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후 하서 김인후(金麟厚)를 배알(拜謁)하고 분별하기
어려움을 들어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金麟厚)는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며
그의 주장이 옳다하고 하루내 강론하다 파하였다.

1559년(명종 14) 1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발송
서(書)를 받아보고, 3월에는 퇴계(退溪)에게 저설(著說)
및 답서(答書)를 올려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
8월에 퇴계에게 편지를 올려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고, 성정설(性情說)을 주장하였다.
10월에 퇴계의 답서(答書) 및 변설(辨說)을 받아 보았다.
그해 겨울 인근에 살던 하서 김인후에게 매양 나아가
이기(理氣)를 강론했는데,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도 깊이 의심하여 질문하니 하서 김인후가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1560년(명종 15) 3월 세상을 버린 하서 김인후(金麟厚) 영전에
글을 지어 전(奠)을 올렸다.[2] 5월에는 서신으로 추만
정지운(鄭之雲)과 천명도(天命圖)에 대해 논하였다.
8월에는 그동안 하서 김인후로부터 얻은 소득을 바탕으로
「사칠설」(四七說) 및 「장서」(長書)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에게 드렸으며, 퇴계(退溪)와 「사칠호발(四七互發)」에
대해 강론할 때 이를 밝히니 수만 언(言)에 이르렀다.

1559년(명종 13) 3월부터 퇴계와의 12년간에 걸쳐 서신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1566년까지 8년간의 걸쳐 이루어진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의 서신이 유명한데,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계ㆍ고봉'의 「사칠 왕복서」이다.
이 논쟁은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1566년(명종 21) 그동안 하서 김인후를 통해 얻은
전설(前說)을 다 버리고, 결론에서 형식적으로 퇴계 이황의 설에
자신의 설을 합치시키며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논리의 일관성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562년(명종 17) 예문관(藝文館) 검열 겸 춘추관(春秋館)
기사관을 임명되고, 1563년(명종 18)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해 3월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와 사정(司正)에 임명되았다.
8월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
및 외척이었던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의 주도하에
삭직(削職)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을 당하였으나,
종형 기대항(奇大恒. 복재 기준 아들)의 상소로
12월 복직하여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 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명종 20) 병조좌랑,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 22)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충용(充用)되고, 이어서 장령,
의정부 사인,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사헌부 집의(執義),
홍문관 전한(典翰)겸 예문관 응교(應敎)에 제수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등에 대한 추존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직제학(直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다. 1570년(선조 3) 2월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대사헌(大司憲)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71년(선조 4) 4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3월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이어 종계변무(宗系辨誣)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선발되어
주문(奏文)을 썼다. 9월에 대사간(大司諫)·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내다가 병을 얻어 귀향하던 중 11월 초하루날에 46세의
나이로 전라북도 고부(古阜)에서 별세했다.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정철(鄭澈)·고경명(高敬命)·유근(柳根)·
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 《왕복서(往復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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