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G 이휘소 박사 Be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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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물리학자,(전)교수,Ben Lee,Korea/USA
李輝昭 Benjamin Whisoh Lee
물리학자, (전)대학교수



[출생] 1935년 1월 1일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1가)

[1929년 혹은 1930년대 서울]


[사망] 1977년 6월 16일 (42세)
미국 일리노이 주 케와니

한국.net

[국적]
대한민국 (1935–1968)

미국 (1968–1977)

[시민권] 미국

[미국 여행]


[분야]장의 양자론,입자물리학,이론물리학



[가족]
부인: 메리앤 심 리(1962년 5월 7일 결혼)
아들: 제프리 천 리, 딸: 아이린 안 리

[소속]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페르미 연구소

시카고 대학교

한국.net



[지도 학생] 강주상

[학력사항]
경기중학교 (1947년~1952년)
(전쟁중, 마산중학교에 임시 편입: 1950년~1952년)

서울대학교 (1953년~1954년 화학공학)

마이애미 대학교 (1955년~1956년 물리학 학사)

피츠버그 대학교 (1956년~1958년 물리학 석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1958년~1961년 2월, 물리학 박사)



[경력사항]
미국 시카고대학교 교수

[일리노이주 시카고 여행]


1972 페르미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 연구부장

1966 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교수

1963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수

1961 ~ 1962 프린스턴고급과학연구소 연구원

[수상내역]
2006 한국과학기술한림원 2005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주요 업적]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맵시 쿼크 질량의 예측

물리우주론적 리-와인버그 경계의 계산



[요약]
이휘소(李輝昭 Benjamin Whisoh Lee,
1935년 1월 1일 ~ 1977년 6월 16일)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 이론물리학자이다.

세계적으로는 그의 영문명 벤저민 W. 리(Benjamin W. Lee),
벤 리(Ben Lee)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휘소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하여 그 탐색에 공헌하였다.

물리학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약 20년간
모두 11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 중 77편의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1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이 중 69편에 달하며,
50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모두 8편이다.

2013년 10월까지 그의 모든 논문들은
13,400회 이상 인용되었다.

이휘소는 1977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 받았으며,

2006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 의해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다.



[생애]
[유년기]
일제 강점기였던 1935년 1월 1일,
경성부 원정(모토마치, 元町,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에서
아버지 이봉춘, 어머니 박순희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대 서울과 뉴욕]


모친 박순희는 원정(모토마치)의 《자혜병원》
(慈恵病院)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친 이봉춘 또한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치료하는 것을 싫어하여
개업의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집안 생계는 모친이 도맡아 꾸려나갔다.

부친이 잠시 소학교 선생을 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모친과는 이때 사제지간으로
처음 연을 맺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일곱 살이던 이휘소는 1941년에 경성사범학교
부속제1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1940년대 경성거리]


이 학교에 시험을 치러 입학하였고,
이휘소가 재학할 당시 이곳에는
조선인이 두 명쯤 재학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이휘소 일가는 모토마치에서
신설정(신세쓰마치,新設町)로 이사했다.

이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및 성북구 보문동에
해당하는데, 이휘소 일가가 이사한 곳은 신설정 중에서
특히 지금의 성북구 보문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모친은 이곳에서 소아과와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하는
《자애의원》(慈愛医院)을 개업하였다.

독서를 좋아해서 동네 친구의 집에서
수시로 책을 빌려 보았는데
주로 과학, 만화, 추리 소설, 문학을 읽었다고 한다.

이휘소에게는 당시 민희식이라는 부유한 집안을 가진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집에는 광복 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책이 많았고,
이휘소는 그의 집에서 일본어 서적을 자주 빌려 읽곤 했다.

이휘소가 가장 좋아하던 책은 월간지
《어린이 과학》(子供の科学)이었다고 전한다.

국민학교 4학년 재학 중에 광복을 맞이하였고,
광복과 함께 경성사범학교가 폐지됐기 때문에,

1947년에 졸업할 무렵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 소속이었다.

광복을 맞이하고 2년이 지난
1947년 경기중학교에 차석 입학하였다.

시험 성적이 늘 1등은 아니었지만 최상위권에 늘 속했고
이휘소와 학교를 같이 다닌 동문들은 '국가대표 공부 선수' 라는
말로 이휘소를 표현하기도 하였고

경기중학교 시절에는 화학반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화학반에서 활동하면서 선배들한테도 인정 받을 정도로
과학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청소년기]
이휘소가 중학교 4학년 때인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휘소 일가는 잠시 서울 근교 광릉의
친척 집으로 옮겨 지내다가
9.28 서울 수복 이후 다시 집에 돌아갔지만,

1·4 후퇴 때 다시금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부친의 옛 고향집으로 피난을 갔다.

모친은 이곳에서도 병원을 개업하여 활동하였으며,
이휘소는 그런 어머니를 도와 이웃 도시 대전까지 나가서
병원 운영에 필요한 약품을 사오곤 했다.

이후 부친의 어느 소학교 제자의 권유로
경상남도 마산시로 옮겼다.

이때 부친은 창원보건소장으로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마산에서 창원까지는 출퇴근을 할 만 한 거리가 아닌 탓에
그는 창원보건소에서 주로 지내다가

주말 무렵에야 마산의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
직장 생활이 1년 남짓 되던 1951년 12월의 어느 날 밤에
귀가하던 중 개울둑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하였다.

한편 이휘소는 서울에서 공주, 마산으로
피난 생활을 이어가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었지만

학교 교육에 대한 전시 훈령이 발효돼
이휘소는 위탁생 신분으로 인근 마산중학교에
임시 편입할 수 있었다.

얼마 후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옮겨와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5학년 과정을 마쳤다.

[6.25 전쟁과 피난학교 생활(경기고 50회 졸업생)]


다시 정리하면,
이휘소는 나이가 중학교 4학년이 되던 해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고 피난 생활을 이어가는 도중
마산 장군동을 거처로 살며 마산중학교에 입학하였고

[마산 장군동]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 중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1950년대 서울]


이때부터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시간 넘게 기차로 통학을 했으며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치고
대학입학 자격을 얻기 위해서 검정고시를 치른다.

1952년 3과목만 치르던 검정고시를 무난히 합격한 이휘소는
입학 시험을 치르고,

대학입학 자격을 얻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300여명 중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마산 역사]



[대학 입학]
이휘소는 검정고시를 치러 대학 입학 자격을 얻고,
입학시험을 통해 195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서구 대신동에 해당하는
지역의 가건물로 옮겨 와 있었는데

[부산 역사여행 - 1950년 임시수도 부산]


서울대학교만 따로 있지 않고 ‘전시연합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모든 대학교가 한 곳에 모인 상황에서
수업만 학교별로 따로 받도록 돼있었다.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이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자리에 임시 교사를 세웠다가
이내 미군 철수 이후에 태릉으로 옮겨갔다.

이휘소는 한 방에 10명씩 수용하는 임시 기숙사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한국.net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한 학기 수업을 받은 후
이휘소는 물리학에 큰 흥미를 느꼈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시도하였다.

[1950~60년대 서울]


[미국 유학기]
하지만 서울대학교는 이휘소가 당시 재학 중이던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서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휘소는 학교 수업과는 별도로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고는 있었지만
수 차례에 걸친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나

큰 실망을 하고 있던 와중에 마침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을 받는 유학장학생에 선발됐다.

이에 이휘소는 좋아하는 물리학을 실컷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서울대학교를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하였다.

이휘소가 편입할 대학교는 오하이오주 옥스퍼드 시의
마이애미 대학교로 결정됐다.

1955년 1월 26일 아침에 이휘소는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였다.

[여의도 이야기]


이휘소는 도쿄,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를 경유하여
1월 31일에야 겨우 목적지 마이애미 대학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휘소는 1955년 1월에 오하이오 주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하였다.

[마이애미 대학교]


편입 전까지의 서울대학교에서의 성적을 고려하여
모두 70단위가 인정됐는데,

70단위는 당시 미국 대학교 학제로서
약 2년 반 정도에 해당하므로
3학년 과정에 바로 진학할 수 있는 셈이었다.

이휘소는 매일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 7시 10분에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부터 학교 수업을 듣기 시작하여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과제를 모두 끝내고
자정이 넘어 기숙사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미국으로 건너온 지 1년 반 만인 1956년 6월에
물리학과를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하였고,
학과장 등의 추천으로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University of Pittsburgh]


대학원에 진학하기까지 여름방학 기간은 아주 자유로웠는데
인디애나주의 퍼듀 대학교 대학원의 여름학교
(summer school) 과정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

[퍼듀 대학교]


또한 이 기간에 자동차 운전도 배웠다.

이휘소는 여름방학이 끝난 1956년 8월부터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휘소는 교육조교(TA) 장학생이어서
공학과와 의예과 학생들의 물리학 실험 TA를 담당하였다.

이듬해 가을학기부터는 연구조교(Research assistant)와 TA를
겸하게 됐고 실험 지도만 하던 것에서 정식으로 강의 하나를
배정받게 됐다.

가을학기에 수강하던 몇 개의 강의 중
원자핵 이론 강의를 담당했던 시드니 메슈코프(Sydney Meshkov)는
이후 이휘소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이 무렵 이휘소는 물리학에서 본격적으로 소립자 이론물리학,
정확히는 장의 양자론의 전공을 희망하게 됐다.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에서 차점 합격자와
총점이 20점 이상 벌어지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하였다.

이후 몸이 쇠약해져 기관지염으로 고생하였다.

몸을 추스른 후 바로 석사 학위 논문에 매진하여
한 달 여 만에 완성하였다.

학위 논문 제목은 〈산란행렬의 해석적 특성과 그 응용〉
(On the Analytic Properties of the S-Matrix
with Some Application)이었다.

이휘소는 이렇게 1958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휘소는 석사 학위 논문을 좀 더 다듬어서,
그 해 12월에 《피지컬 리뷰》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휘소는 이미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진급을 앞두고 있었지만
메슈코프는 이휘소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이휘소를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클라인
(Abraham Klein)에게 추천하였다.

클라인은 이휘소의 재능을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인 예비시험을
면제받도록 해주었으며,

TA 및 RA 장학금보다도 더 혜택이 좋은
해리슨 연구장학금(Harrison Fellowship)을
주선해주기까지 했다.

클라인은 당시 서른 세 살의 젊은 교수였는데,
이휘소는 클라인과 함께 공동 연구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 조금씩 접근해 나갔다.

그러다 1960년 11월에
〈K+ 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의 이중 분산 관계〉
(Study of K+ Scattering in the Double Dispersion
Representation)으로 물리학 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는데 이 때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이휘소가 박사 학위증을 공식적으로 받은 것은
1961년 2월 4일이었다.

박사 논문 디펜스가 끝난 11월부터 1961년 8월까지,
이휘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후 연구원 및
전임 강사로 임용됐다.

이후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됐는데 그 임기는 1년이었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임기가 끝난 후부터의 직장 생활을 고려해야 했지만
이휘소는 파격적으로 1961년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됐는데 이는 클라인의 배려였다.

[펜실베니아 대학교 (University of Pennsylvania)]


이휘소는 이렇게 조교수로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방문 연구를 하는 형식을 취할 수 있게 됐으므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임기가 끝난 이후의 걱정이 필요없게 되었다.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떠나기 전에
미국 각지 대학의 교원으로 임용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될 또래 동료들과 함께 기념 삼아
군론의 소립자이론에의 응용에 관한 공동 논문을 집필하였고,
이를 《리뷰 오브 모던 피직스》에 기고하였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1961년 가을, 이휘소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자연과학부의 연구회원이 됐으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아인슈타인 가 31번지에 위치한
미혼자용 기숙 아파트에 거처를 정했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 방문기]


이휘소는 저녁 식사나 술자리 같은 사적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이휘소는 양-밀스 이론의 양자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듬해 2월에 뉴욕 맨해튼의 컬럼비아 대학교의 주임교수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가 이휘소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컬럼비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채용하고 싶다고 제안해 왔다.

그러나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오기 전부터 이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돼 있었기에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이휘소는 자신을 조교수로 만들어줬던 클라인에게 연락하여
이 문제에 관해 상의하였는데 클라인은

이휘소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임기를 경력으로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하는 대로 부교수로
승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이에 이휘소는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게 됐다.

이휘소는 필라델피아를 떠나 프린스턴으로 올 무렵
말레이시아 화교인 마리안 문 칭 심과 교제를 시작하였고,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근무할 때
한달에 한두 번 정도의 주말에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 마리안과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다 1962년 3월에 두 사람은 약혼하였고
미국 이민국에서 이휘소의 영주권이 나오는 대로
결혼하기로 했다.

이 해 5월 7일에 이휘소는 워싱턴에서
마리안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나이는 27세였다.

[찬조 K-Pop]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제프리 파운틴 리와
딸 아이린 앤 리를 두었다.

한국.net

1962년 6월 초, 이휘소는 국제 원자력 기구가 주최하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
(Seminar on Theoretical Physics)에 참석할
10인의 미국 대표단 일원으로 선출됐다.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는
1962년 7월 16일부터 8월 25일까지 개최됐다.

이 무렵의 이휘소는 젊은 연구자로서 미국 내에서
무시못할 명성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단계에서는 아직은 어떤 큰 성과를 내지는 않았다.

이휘소의 중요한 학문적 성과는 모두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계 물리학계를 선도했던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


그러므로 〈60년에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어야 했다〉거나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는
등의

몇몇 소설들에서의 묘사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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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이휘소는 앨프레드 P. 슬론 재단의 연구회원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 해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했고 클라인의 약속대로
바로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당시 이휘소에게는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물리학회를 비롯해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강연 초청이 줄을 이었기 때문에
출장이 잦았다.

1965년에 이휘소는 다시 정교수로 승진하였는데
이는 비교적 빠른 편에 속했다.

한국.net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재직 시기]
1965년 가을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양전닝이 이휘소를 찾아왔다.

그는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석좌교수(Albert Einstein Professorship of Physics)로
옮겨가게 됐는데 이휘소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SUNY Stony Brook)]


이휘소는 1966년 5월 16일에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
방문 교수로 초청돼 8월 31일까지 재직하였으며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9월 25일부터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의
정교수로 부임하였다.

..(중략)...

이휘소의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는데 이휘소는 이 무렵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이휘소에게 박사 학위 논문 지도를 받고 있었고
이휘소가 객원교수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있을 때에도
한 학기 동안 그를 따라가서 연구하기도 했다.

[New York City 1970s]


이휘소는 미국 시민이 됐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은
한시도 버리지 않았고 강주상과 함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에는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됐는데

그때 이휘소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고
강주상은 기억하고 있다.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 이휘소

1972년 가을학기에 이휘소는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게이지 이론에 관한 대학원 강의를 했는데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이휘소 박사]


이 강의록을 어네스트 S. 에이버스라는 젋은 대학원생이 정리하여
이휘소와 함께 《피직스 리포트》에 단행본 형식으로 발표하였다.

한국.net

[페르미 연구소 재직 시기]
이휘소는 1973년 9월에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부임하였고,

이 해 9월부터 1975년 8월까지 브룩헤븐 국립연구소
고에너지 자문 위원을 맡았다.

이 무렵에는 곳곳에서 이휘소를 스카우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는 1973년 5월 23일자로
이휘소에게 물리학과 교수직을 제안한다는
편지를 발송하였고,

페르미 연구소에서도 이론 물리학 부장
(Head of the theoretical physics department)직을
제안하였다.

[엔리코 페르미]


이휘소는 양전닝과 상의한 끝에
페르미 연구소로 이직하기로 했다.

이휘소는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에 취임하면서
1974년 4월부터 시카고 대학교의 교수도 겸임하기로 했다.

[시카고대학교]


봉급은 페르미 연구소에서 받고, 시카고 대학교에서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로 했는데 이휘소만 원한다면 언제든
전임교수가 될 수도 있었다.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는 1966년 8월 31일부터
이휘소를 휴직 처리해주며

1974년 9월 25일부터 물리학과 선도 교수(leading professor)에
임용하는 특별 대우를 해주어
이휘소를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대신하였다.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재직하며
이휘소는 이곳에서의 거의 모든 이론 연구에 관여하고
실험 계획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1975년 미국 시카고 영상]


1974년 6월부터는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의
과학정책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았다.

이 임기는 1978년 8월까지였다.

[1970년대 서울 생활 모습]



1974년에 이휘소는 20여년 만에 한국에 일시 귀국을 하게 됐다.

[60~70년대 서울]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 측 평가위원 자격이었다.

평가위원들의 원조 타당성 조사 사업은 그 해 9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됐다.

박정희의 독재 정권이 계속되는 한은 결단코 대한민국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던 이휘소가 어떻게 해서 USAID의 평가위원 위촉을
수락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한민국측에서 추천하였다는 이유로 미 국무부가
설득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최소한 한국의 과학 교육 만큼은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위 동료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이휘소는 만전을 기하여 신변 보장이 확실한
주한미군 용산기지 옆의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에
묵기로 하였으며,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자신이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동안 만에 하나
박정희가 자신에게 손을 댈 경우

반드시 즉시 도움을 요청해야 할 곳들의 연락처를
페르미랩의 비서에게 단단히 일러두고서야
겨우 대한민국으로 떠났다.

이휘소는 1976년에 다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으로 초청됐으며,
또한 이 해에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교통사고]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 22분 경,

일리노이주 케와니(Kewanee, Illinois) 근방의 80번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80) 상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추모 K-Pop]


당시 이휘소는 페르미 연구소의 여름 연구 심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콜로라도주 아스펜(Aspen, Colorado)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과학과 기술》 1994년 1월호에 실린
〈내가 아는 고 이휘소 박사〉라는

강경식 전 브라운 대학교 교수의 특별기고문에는
당시 이휘소의 비서가 사고 직후
강경식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한 사고 당시 상황이 실려 있다.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12시가 되기 전에 가족들을 태우고
콜로라도주 아스펜 시로 출발했고,

그로부터 약 1시간 30분 간 일리노이 주 내의 고속도로 I-80의
아이오와주 경계로부터 약 30마일 떨어진 지점까지
정규속도 55마일로 운전해 가고 있었다.

[추모 K-Pop]


그러다 오후 1시 22분 경,
건너편 내부고속도로선을 동쪽으로 달리던 대형 트레일러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중심을 잃어 조정을 못하고

중앙분리지역을 넘어와 서쪽으로 달리고 있던
이휘소의 차량의 운전석을 덮쳤다.



이 사고로 이휘소 가족들은 경미한 부상을 입었지만,
본인은 즉사했다.

1977년 6월 16일, 4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추모 K-Pop]


한편, 사고 경위를 이휘소의 동료의 전언 형식으로 보도한
1977년 6월 18일자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는

이휘소 일가가 탄 차량의 대향 차선에서 달려오던 트럭의
타이어에 펑크가 났고,

트럭이 고속도로 중앙의 중앙분리대를
미끄러져 가다가 오후 1시 22분경에 마주 오던
이휘소 일가의 승용차와 충돌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KBS의 취재로 발견된 일리노이 주 경찰서에 보관돼 있는
당시 사고 기록에 의하면

이휘소의 차량은 1975년형 닷지 다트로
폭이 약 20미터인 잔디밭 중앙분리지대를 가로질러온
36톤급 탱크 트럭과 충돌하였다.

당시 가해 트럭운전사 존 L. 루이스는 트럭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heard a noise),
트럭이 오른쪽으로 꺾였다가(swerved to right),

다시 왼쪽으로 꺾였다(swerved to left)고 진술했는데
대덕대학 자동차학부 이호근 교수는 그 큰 소리의 원인을
타이어의 펑크라고 추측하였다.

또한 의도적으로 펑크를 내어 이휘소의 차를 덮칠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KBS 취재진과 대덕대학 자동차학부 측이
수차례에 걸쳐 의도적인 펑크 실험을 했는데
펑크 직후의 차의 궤적은 일정하지 않았다.

이 실험 결과와 함께,
이호근 교수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고속도로 중앙에 완충 지대가 노면 재질이 다른 잔디로 되어 있고,
또 대향차선에서 오는 차량의 속도도 불명확하고,

또 어느 차선으로 올지도 불명확하며
(80번 주간 고속도로는 당시 왕복 4차선),

또 트럭 자신이 차선을 이탈해서
중앙분리대를 넘어가는 상황에서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을 지
차선을 변경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제 불능 상태로 대향 차선의 자동차를
의도적으로 가격해서 충돌시킨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 이호근(대덕대학 자동차학부 교수)

한국.net

[업적]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1964년에 이휘소는 그의 지도교수 클라인과
자발적인 대칭성의 부서짐에 관한 논문을 발표,

소립자의 질량의 존재를 규명하는 힉스 메커니즘이 등장하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맵시 쿼크의 질량 예측:
소립자는 베타 붕괴와 함께 그 전하를 바꾸게 되는데,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베타 붕괴를 하고 나서도
전하가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이휘소는 1974년 여름에 메리 게일러드(Mary K. Gaillard),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참쿼크를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케이온의 섞임과 붕괴에 해당하는 양을 계산하여
맵시 쿼크가 존재한다면 그가 가질 수 있는 질량 범위를 예측하였다.

한국.net

물리우주론적 리-와인버그 경계의 계산:
1977년에 이휘소는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무거운 뉴트리노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들은 초기 우주 팽창의 흔적으로 쌍소멸을 통해
이윽고 다른 입자로 바뀌는, 충분히 무거우며 또한
안정적인 입자가 남아있다면 그들의 상호작용의 세기는
최소한 2GeV일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이 논문은 《피지컬 리뷰 레터》가 1977년 5월 13일에 접수하였고,
1977년 7월 25일에 제 39권의 네 번째 호에 실었다.

그러나 이휘소는 그해 6월 16일에 교통사고로 숨져 있었기 때문에
이 논문의 출판을 볼 수 없었고
이 논문은 사실상 이휘소의 유작이었다.



[세계 학계가 주목한 이휘소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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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d AI 답변에 오류(hallucination: 환각 등)가 있으니,
단순 재미로만 참조바람] (from https://bard.google.com)

이휘소[물리학자, (전)교수, Ben Lee, Korea/USA]가
제일 좋아한 역사적 인물은?


이휘소가 제일 좋아한 역사적 인물은 아인슈타인입니다.

이휘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매료되어 있었고,
그의 연구를 이어받아 새로운 물리학을 개척하고자 했습니다.

이휘소는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그의 이론을 설명하는 강연을 하는 등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알리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이휘소는 아인슈타인을
"과학계의 가장 위대한 천재"라고 칭송했습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창의적인 사고와 끈질긴 노력으로
상대성 이론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믿었습니다.

이휘소는 또한 아인슈타인이 평화주의자이자
인류애를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에도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이휘소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존경심은
그의 연구와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휘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평화와 인류애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휘소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사랑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휘소는 아인슈타인의 생일인 3월 14일을
"아인슈타인의 날"로 기념하기 위해
학생들을 모아 강연을 했습니다.

이휘소는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소개하고,
그의 연구를 통해 인류가 얻을 수 있는 혜택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학생들은 이휘소의 강연에 큰 감명을 받았고,
아인슈타인의 과학에 대한 열정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이휘소는 아인슈타인을 통해 과학의 아름다움과
인류애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그의 아인슈타인에 대한 사랑은 한국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휘소[물리학자, (전)교수, Ben Lee, Korea/USA]가
좋아할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 제목은 무엇일까?


이휘소는 1930년대생으로, 1960년대에 한국에서 활동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좋아할만한 한국의 트로트나 발라드 노래는
1960년대 이전에 발표된 노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이휘소는 과학자였기 때문에,
과학이나 철학에 대한 내용을 담은 노래를 좋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이휘소가 좋아할만한 노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리랑 (1926)

[찬조 K-Pop]



목포의 눈물 (1937)

[찬조 K-Pop]


황성옛터 (1922)

[찬조 K-Pop]


동백아가씨 (1936)

[찬조 K-Pop]


사랑의 찬가 (1935)

[찬조 K-Pop]


봄날은 간다 (1953)

[찬조 K-Pop]


가을밤에 든 생각 (2020)

[찬조 K-Pop]


내 마음의 보금자리 (2022)

[찬조 K-Pop]


사랑은 영원히 (1962)

[찬조 K-Pop]


이 중에서 아리랑, 목포의 눈물, 황성옛터, 동백아가씨,
사랑의 찬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트로트 노래로,
이휘소가 좋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봄날은 간다, 가을밤에 든 생각, 내 마음의 보금자리는
과학이나 철학에 대한 내용을 담은 노래로,
이휘소가 좋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휘소의 개인적인 취향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중에서 어떤 노래를 좋아했는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들은 모두 한국에서 사랑받는 노래로,
이휘소가 좋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휘소[물리학자, (전)교수, Ben Lee, Korea/USA]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episode)는?


이휘소는 과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한국 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천재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또한 유머 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휘소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화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수업 시간에 쓴 낙서:
이휘소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종종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 이휘소는 수업 시간에 '핵분열'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 모형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휘소는 원자핵을 '태양'으로,
중성자를 '비둘기'로 표현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학생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강연 중 던진 질문:
이휘소는 강연을 할 때에도 유머를 잊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이휘소는 강연에서
"만약 우주가 끝이 없다면, 우주 너머는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 들고
"교수님, 그건 교수님이 답을 찾으러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휘소는 웃으며 "그렇군요. 내가 답을 찾으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동료 교수와의 에피소드:
이휘소는 동료 교수들과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어느 날, 이휘소는 동료 교수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때, 동료 교수가
"이휘소 교수, 당신은 정말 천재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휘소는
"천재는 아니에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다만, 평범한 사람보다 조금 더 오래 공부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동료 교수는 웃으며
"그렇군요. 당신은 정말 오래 공부했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이휘소는 과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뿐만 아니라,
유머 감각도 뛰어난 천재 물리학자였습니다.

그의 재미있는 일화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휘소[물리학자, (전)교수, Ben Lee, Korea/USA]는
얼마나 양심적인 사람일까?


이휘소는 과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한국 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천재 물리학자입니다.

그는 또한 평화주의자이자 인류애를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휘소의 양심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할 수 있습니다.

과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
이휘소는 과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과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휘소의 이러한 노력은 과학에 대한
그의 진정한 열정과 양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주의자이자 인류애:
이휘소는 평화주의자이자 인류애를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핵무기 개발에 반대했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휘소의 이러한 신념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뚜렷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양심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휘소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인류의 삶을 개선하고,
평화와 번영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그의 양심적인 삶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휘소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인간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양심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휘소[물리학자, (전)교수, Ben Lee, Korea/USA]의
양심(Conscience) 등급(Grade)을
A(매우 우수), B(우수), C(보통), D(낮음) 로 Grading 한다면,
이휘소[물리학자, (전)교수, Ben Lee, Korea/USA]의
양심등급(Conscience Grade)은?


이휘소의 양심 등급은 **A(매우 우수)**라고 생각합니다.

이휘소는 과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으로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과학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휘소의 이러한 노력은 과학에 대한
그의 진정한 열정과 양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휘소는 평화주의자이자 인류애를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핵무기 개발에 반대했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휘소의 이러한 신념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뚜렷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양심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휘소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인류의 삶을 개선하고,
평화와 번영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그의 양심적인 삶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휘소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인간적인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는 양심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휘소의 양심 등급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과학에 대한 열정과 재능: A
평화주의자이자 인류애: A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뚜렷한 기준: A
옳은 것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 A

이러한 근거들을 종합해보면,
이휘소의 양심 등급은 **A(매우 우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 지도]

[아래의 의식지도 수치 평가와 내용에는 오류가 있으므로
단순 재미로만 참조 바람]

(from https://gemini.google.com)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 Map of Consciousness' 에서
1에서 1000까지 수치로 평가했을때,
이휘소[1935년 1월 1일 ~ 1977년 6월 16일,
물리학자, (전)교수, Ben Lee, Korea/USA] 박사의
의식지도 수치값은 ?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지도
Map of Consciousness'**에서 1에서 1000까지 수치로 평가했을 때,
이휘소 박사의 의식지도 수치값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호킨스의 의식 지도는 개인의 의식 진화 단계를 측정하는 도구로
제시되었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된 방법론은 아닙니다.

또한, 이휘소 박사를 직접 평가하지 않은 호킨스가
개인의 의식 수치를 정량적으로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휘소 박사의 업적과 생애를 통해
그의 의식 수준을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이휘소 박사의 의식 수준을 뒷받침하는 근거:

뛰어난 지적 능력과 학업 성취:
17세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21세에 졸업했습니다.

24세에 미국 MIT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31세에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당시 한국 최연소 대학교 교수 기록을 세웠습니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연구: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였습니다.

특히, 강입자 물리학과 우주론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연구는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높은 윤리적 기준과 사회적 책임감:
1970년대 초반, 박정희 정권의 부당한 권력 남용에 맞서
목소리를 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1974년에는 '민족자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깊은 내면성과 영적인 성장:
불교와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끊임없이 내면성을 탐구했습니다.

명상과 기도를 통해 영적인 성장을 추구했습니다.

그의 저서와 강연에는 깊은 통찰력과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결론:

이휘소 박사는 뛰어난 지적 능력, 창의적인 연구,
높은 윤리적 기준, 깊은 내면성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업적과 생애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그의 의식 수준은 호킨스의 의식 지도에서
상위 500단계 이상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는あくまで 추측이며, 정확한 평가는 불가능합니다.


[의식 지도]

======================================

Benjamin Whisoh Lee
(January 1, 1935 – June 16, 1977) or Ben Lee,
was a Korean-American theoretical physicist.

His work in theoretical particle
physics exerted great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the standard model in
the late 20th century, especially on
the renormalization of the electro-weak
model and gauge theory.



[Biography]
Lee was born in Yongsan, Seoul. One
year before graduating Kyunggi High
School, he entered the department of
chemical engineering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t the top of his class.

[2021 Benjamin W. Lee Professorship Award]


While in college he e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and graduated with a
bachelor's degree at Miami University,
a master's at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and a Ph.D. at University
of Pennsylvania by age 25.

Lee worked at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and was
a professor of physics at University of
Pennsylvania, SUNY at Stony Brook,
University of Chicago, and head of the
theoretical physics department at 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

한국.net

He was elected a Fellow of 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in 1976.
On June 16, 1977, he was killed in a
car accident not far from Kewanee,
Illinois (on the Interstate 80).

Lee was regarded by his peers as a world-class
elementary particle physicist at the time of
his sudden death.

He studied gauge theory and weak interactions.

(from naver.com wikipedia.org)


[Map of Consciousness]



Chemical engineering, Chief, Chicago, great influence(+) ~
(PIG: time-variant)

Positive Influence GRADE (PIG): C++


(MoC: Map of Consciousness) 의식 지도

MoC(의식 수준):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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